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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1.20 15:05 수정 : 2008.11.21 10:11

강정구 동국대 사회학과 교수

[그 사람 그 후] ⑦ ‘빨갱이 교수’ 낙인 강정구 교수
직위해제 뒤 천막강의…평화협정안 만들어
“뉴라이트, 학문 본질 벗어나 학자 자격 없다”

‘빨갱이 교수’. 강정구(64) 동국대 사회학과 교수에게 씌워진 낙인이다. 그의 글과 발언은 언제나 보수 언론과 학계의 공격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공격의 빌미가 될 발언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그는 우리사회 이념전쟁의 뇌관이었다.

‘만경대 필화사건’이 대표적이다. 그는 2001년 평양에서 열린 8.15 민족통일대축제 때, 김일성 주석 생가인 만경대를 찾아 방명록에 ‘만경대 정신을 이어받아 통일위업 이룩하자’는 글을 남겨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김일성 주석 가문이나 주체사상을 찬양할 의사가 없었고, 단지 순간적으로 나타난 단상을 방명록에 가벼운 마음으로 적었다”는 그의 해명은 공감을 얻지 못했다.

 2005년 7월엔 ‘통일전쟁’ 발언으로 또 다시 도마위에 올랐다. 그는 한 인터넷매체의 기고문에서 “6.25 전쟁은 통일전쟁이면서 동시에 (외세가 지원한) 내전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발언도 국가보안법을 피해가지 못했다. 검찰은 그를 구속수사할 방침을 밝혔으나 당시 천정배 법무부장관이 ‘수사지휘권’을 발동하면서 논란은 증폭됐다. 김상렬 당시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은 “강 교수 수업을 들은 학생들에게 취업 때 불이익을 주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같은 해 10월 동국대는 결국 그를 직위해제했고, 그는 강단을 떠나야 했다. 전국교수노동조합,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등 25개 단체가 참여한 ‘강정구 교수 사건 교수·학술단체 공동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동국대 졸업생 120여명은 졸업장을 반납했다. 2006년 3월부터는 직위해제에 항의하는 천막강의를 했다. 그리고 2년8개월이 흘렀다. 강 교수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사람, 그후’ ⑦ 강정구 교수

“전쟁 소지 근본적으로 없애는 완벽한 안”  


 직위해제로 3년 째 강단에 설 수 없는 답답한 심정이나마 위로받고 싶어서였을까. 그의 집은 동국대가 자리잡은 남산 자락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서울 중림동의 한 아파트였다. 일과의 대부분을 집에서 보낸다. 일주일에 1~2번꼴로 학교에 나가긴 하지만, 강의는 하지 않는다. 그를 만난 건 지난 17일이었다.

 직위해제의 발단이 된 ‘통일전쟁’의 발언 취지를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이승만이든, 김일성이든 누구에 의해서건 하나로 합쳐지는 게 통일이예요. 남이 하면 통일이고, 북이 하면 통일이 아닌 게 아니죠. 식물학적으로 과일이면 과일이지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바나나를 과일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2004년 9월부터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부설 평화통일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그는, 최근 1년 반 동안 ‘평화협정안’을 만들어왔다.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소지를 근본적으로 없애는 완벽한 안”이라고 설명했다. 그가 기초한 평화협정안의 뼈대는 △협정 대상국이 남과 북, 중국과 미국이고 △전제조건이 한미군사동맹과 조중군사동맹 폐기 △한반도 비핵화 △주한미군의 철수다.

 “주한미군의 철수라뇨?”

 “전쟁 위기의 핵심이니까. 남북의 GDP(국내총생산)는 각각 9000억달러, 60억달러예요. 남북의 국방비 규모는 280억달러 대 5억달러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전쟁을 치른다는 건 어불성설이예요. 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미국의 전쟁위협 속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어요.”

“정세와 정권 입맛 따라 움직일 수 없지 않은가?” 

 그는 2004년부터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해왔다. 그래서 그는 늘 ‘주한미군 철수 불가론자’들에게 거센 비판을 받았다. 지난 7월 ‘정전협정 55주년 기념토론’에서 그가 주장한 ‘북한의 핵무기 개발 불가피론’ 역시 도마에 올랐었다.

 그의 발언과 글로 인해 논란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빨갱이 교수’ 낙인으로 강의권까지 박탈당했지만, 그의 소신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합법과 위법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학자의 양심 때문이죠.”

 그는 “이제 그만 좀 하시라”는 부인의 충고도 지금껏 매정하게 뿌리쳤다. “학문하는 사람이 정세와 정권의 입맛에 따라 움직이면 기본자세가 아니다”라는 소신 때문이다. 그는 “자기 전공 영역에서 불씨를 안 만들려하는 이들까지 비난할 생각은 없지만, 왜곡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부산 출신으로 서울대 사회학과를 거쳐 미국 위스콘신대학교 매디슨교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딴 이력만 본다면, ‘친미’ 쪽이어야 하지만 그의 학문적 토양은 ‘반미’에 더 가까워 보인다.

 “반미주의자인가요?”

 “반미로 보이지만, 또 상당히 친미적일 때도 있어요. 2000년 10월12일 ‘북-미 공동성명’일 발표됐을 때 쓴 글들은 친미적이었어요. 이를 부정하는 부시 때는 반미였지만, 오바마가 되면 분명 친미적인 글을 쓸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미국의 정책이 평화와 통일에 적합하면 친미해야 하지만, 평화와 통일을 저해하고 민족의 자존심을 짓밟는데 반미를 안하면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죠. 일례로, 미선이 효순이가 비참하게 죽었는데, 반미 안할 수 있나요? 우리의 고문서를 약탈한 프랑스가 이를 돌려주지 않으면, 반프랑스 해야 하는 것처럼요.”

“미국은 다양한 옷 입어…친미-반미 자체가 말 안 돼” 

강정구 동국대 사회학과 교수
 “반미주의자가 아니라는 뜻인가요?”

 “네. 억울하죠. 이분법적으로 재단 당하는 거요. 미국은 다양한 옷을 입고 있어요. 케네디 시절과 클린턴 시절 다르고, 공화당이냐 민주당이냐에 따라 달라요. 세계를 억압하는 국방부가 있는 반면 미국인들은 가난한 사람을 도울 줄 알며, 소박하고 서민적이죠. 이런 다양성을 제쳐두고 ‘친미’ ‘반미’로 낙인찍는 것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죠. 학문의 본질이라는 게 참과 진실을 밝히는 것이고, 불의에 제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것이라면 반공이데올로기 속에서 친미만 하면 안되죠.”

 다만, 그는 해방-분단-토지개혁 등 해방공간에서 본다면 미국을 향해 비판의 목소리를 안 낼 수 없다고 했다. 38도선과 6.25 전쟁으로 인한 남북 분단의 고착화, 친일파 청산과 토지개혁의 염원이 물거품 된 것 등은 우리 민족의 요구와 상관 없이 미국과 미군정의 개입 때문이라고 말했다.

 “분단은 미국과 소련 모두 책임이 있지만, 그 비율은 80~90%대 10~20%예요. 38선은 미 국무성이 일방적으로 그었어요. 46년에 토지개혁을 하고 친일파 청산을 한 북한과 달리 남한은 그러지 못했고, 해방 후 북한은 북조선 임시위원회를 통한 자치를 했지만, 남한은 미 군정이 했어요.”

 “국가보안법에 또 걸리겠는데요?”

 “학문적 얘기를 하면서 국가보안법 얘기를 안하면 학문 윤리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미국에 대해 부정적인 측면을 얘기하거나, 북한의 긍정적인 측면을 얘기하면 반미주의자나 빨갱이로 몰립니다. 미국을 좋게 결론낼 수밖에 없게 하는 게 바로 국가보안법입니다. 학문적 연구 결과를 국보법 때문에 미국 입맛에 맞춰서 발표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부자세습은 바람직 않지만 주체사상은 무조건 나쁜 건가?” 

 “(그렇다면) 미국이나 일본에 관대한 ‘뉴라이트’를 어떻게 보고 있나요?”

 “학문의 본질에서 벗어났지. 그걸 학자라고 얘기하면 안되죠. 구체적인 연구 과정이나 결과에 있어서까지 자신의 가치관이나 당파성에 끼워 맞춰 연구 과정이나 결과를 좌지우지 한다면 자격상실이죠. 뉴라이트는 학자로서는 자격이 없죠. 기본이 안 된 거죠.”

 “뉴라이트는 박정희 정부의 공과를 구분해서 보자고 하는데요?”

 “개인적으로 영웅사관을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히틀러가 총독이 아니었다면 2차대전이 안 일어났을까요? 자본주의가 식민지 쟁탈전 경쟁으로 변질되는 제국주의가 되면서 전쟁은 필연적이었어요. 일본은 물론 70년대 우리나라와 80년대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의 관건은 미국 시장의 개방이었어요. 중국도 미국 시장에 진입하면서 제조업이 활성화 됐고, 냉전 이후 미국은 세계지배전략의 구도 속에서 일본을 지원했죠. 70년대 누가 집권을 했든, 정도야 다르겠지만 경제적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어요.”

 “주체사상, 북한의 부자세습에 대한 생각은요?”

 “주체사상이 무조건 나쁜 것이었다면 지금까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었겠습니까? 대내외 자주성을 중시하는 것은 높이 평가하죠. 자주는 인류사회의 보편적인 이념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수령론이나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은 지금까지 문제제기를 해왔던 부분입니다. 북한의 부자세습 역시 바람직한 게 아니죠. 앞으로도 부자 세습이 가능하겠습니까?”

강정구 동국대 사회학과 교수

“1년6개월 뒤 정년, 남은 학기만이라도 교단에 서고 싶다” 

 그는 2006년에도 한 시민단체가 주최한 강연회에서 서해교전(제2연평해전)에 대해 “우발적 사고였다”고 발언해 논란을 빚었다. 서해교전은 2002년 6월 29일 연평도 근해 북방한계선에서 대한민국 해군과 북한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로 6명이 전사, 18명이 부상하고 참수리급 고속정 357호가 침몰했다. 발언 이유는 뭘까.

 그는 “정전협정에 명시되지 않은 북방한계선은 남한이 임의적으로 규정한 것에 불과하고, 12해리를 영해로 규정하는 국제법에 따르면 백령도는 북쪽 바다에 위치한 남쪽 섬이고, (연평해전 장소 역시) 엄밀히 말해 북쪽 바다라는 취지의 발언이었다”고 밝혔다.

 2007년 고려대에서 진행된 강연회에서 “탈레반이 테러집단이면, 상해 임시정부도 테러집단으로 봐야 한다”는 취지로 발언한 것과 관련해서는 “탈레반이 테러집단이라고 하지만, 그들 시각에서 보면 독립을 위한 것이지 않느냐”며 “우리 역시 자살폭탄테러를 한 이봉창, 의열단 단장 김원봉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민족 해방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측면에서 비유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통일전쟁’ 발언으로 강 교수는 2심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자격정지 2년을 선고받았다. 따라서 직위해제 신분이 언제 해소될지 현재로서는 기약할 수 없다. 대법원이 어떤 판결을 내리느냐에 달렸다. 올해 동국대 임용 20주년을 맞았지만, 그는 쓸쓸히 보내야 했다.

 “교수 생활이 끝나기 전에 확정 판결이 났으면 해요. 복직이 되든, 형을 받아 해임이 되든 매듭이 되어야죠. 강의를 해야 교수로서의 생명력이 유지되는 건데…, 1년6개월 뒤면 정년입니다. 그 이전에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만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올해 나이 예순넷. 건강도 염려해야 할 시기다. 그는 “그렇지 않아도 주변 산에 오르는 등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며 “관심은 있었지만 제대로 배우지 못했던 민요와 판소리 등 우리 가락에 대한 연구도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인터뷰가 끝난 뒤 그는 판소리가 울려퍼지는 자신의 연구실 책상에 앉아 책을 읽었다. 

 글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영상 은지희 피디 eun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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