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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1.13 15:31 수정 : 2008.11.14 16:47

김경욱 이랜드 노조 위원장 / 사진 이규호

[그사람,그후] ⑥ 김경욱 이랜드일반노조 위원장
파업 500여일만에 합의…남은건 ‘빚더미’ ‘신불자’
“간부 복직 포기…해고와 외주화 막아낸 건 성과”

“이랜드일반노조와 삼성테스코의 일괄타결 보도가 나오면, 노조가 양보한 것으로 알아주세요. 아마 타결 뒤에는 이런 인터뷰 못할 겁니다.”(웃음)

김경욱(39) 이랜드일반노조 위원장을 만난 지난 6일, 그는 대뜸 이 말부터 꺼냈다. 상암동 홈플러스 매장 앞에 세워진 농성천막에서 만난 그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이랜드일반노조는 월드컵점 점거농성 1년을 기념해 지난 6월 이곳에 천막을 세웠고, 조합원들은 이곳을 터전 삼아 파업투쟁을 이어왔다.

 

“협상 타결된 뒤였다면 절대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을 것”

김 위원장은 인터뷰 당시 홈에버를 인수한 삼성테스코와 이랜드사태 해결을 위한 막바지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노사는 비정규직 계약해지자와 해고자 복직 등의 쟁점에 대한 이견을 조율 중이었다. 그는 “어쩌면 조만간 쉽게 타결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다만 그는 여기에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였다.

“어쩔 수 없다. 조합원들을 한 명이라도 더 복직시키고, 조합원들에게 걸려 있는 250억원의 손배소 소송 취하를 위해서는”이라는 말에서 그의 고뇌를 읽을 수 있었다.

“노동조합을 상대로 한 손배소 소송이 걸리면 생계 때문에라도 노조는 위축될 수밖에 없어요. 조합원 한 명이라도 더 복직시켜 먹고 살게 하는 게 승리냐 패배냐의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이랜드노조에는 250억원의 손배소 소송이 걸려 있다. 조합원 1명당 1억원 남짓 된다.


“‘500일 파업’ 타결됐지만 남은 건 수천만원의 빚”

13일 500여일에 걸친 이랜드투쟁이 협상타결로 마무리된다는 보도가 나왔다. ‘비정규직 투쟁의 상징’으로 꼽힌 이랜드사태가 일단락된 것이다. 노사는 추가 외주화 금지, 비정규직의 고용 보장, 노사화합 선언 등에 잠정 합의했고, 조합원 찬반투표를 거쳐 이날 합의문에 서명했다. 비정규직 투쟁 면에서 본다면, 이는 어쨌든 상당한 성과다.

인터뷰 당시 김 위원장이, 회사쪽이 내놓은 ‘노조를 와해하기 위한 4대 전제조건’이라고 밝힌 △무파업 약속 △임금인상 회사 위임 △이랜드노조와의 분리 △징계해고자 복귀 불가 등을 노동조합이 수용한 결과다. 김 위원장을 비롯해 파업을 주도했던 핵심간부와 일부 분회장 12명이 복직을 포기하는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6일 인터뷰에 앞서 “협상이 타결된 뒤였다면 절대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이번 인터뷰가 그의 속내를 밝힌 마지막 인터뷰일 지도 모른다. 최종 협상 결과야 어쨌든 비정규직 대량해고와 외주화에 맞서 아줌마 부대를 이끌고 싸워온 이랜드일반노조는 비정규직 조합원들의 해고와 외주화 전환을 막아내는 성과를 이뤄냈다. 16개월 이상 근무한 비정규직의 무기계약직 전환도 얻어냈다. 그렇다면 김경욱 위원장은?

“조합원들은 굶고 있고 연대 끊어지고…” 

그는 지난 6월 홈에버 월드컵점의 21일 점거농성을 이끈 장본인이다. 애초 그는 하루 이틀이면 사태가 해결될 줄 알았다. 예상은 빗나갔다. 조합원의 분노는 그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적잖이 당황했다. 이후 그 자신이 감내해야 할 징계와 처벌 등을 생각하니 두렵기도 했지만 모든 걸 조합원의 뜻에 맡겼다.

하지만 곧 그는 진퇴양난의 벽에 부닥쳤다. 김 위원장은 “막상 점거투쟁에 들어가자마자 서비스연맹 몇몇 간부들은 ‘점거농성을 철회하라’고 압박했다”고 주장했다.

“민주노총이 개입하면 희망이 있겠다 싶었는데, 이런 사람들을 믿고 싸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당연히 신뢰가 깨질 수밖에 없었고….”

민주노총에 대한 서운함은 지금도 남아 있지만 “그것이 민주노총의 현실과 한계라고 생각한다. 다 이해한다”고 에둘러 표현했다. 실제 민주노총은 이랜드와 뉴코아, 코스콤 등 비정규직 싸움에 생계비 지원과 연대투쟁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힘을 보탰다. 하지만 500여일이 넘는 지난한 투쟁과정 속에서 쌓인 서운함은 어쩔 수 없나 보다.

김경욱 이랜드 노조 위원장 / 사진 이규호

그는 “민주노총에서 16억원의 지원금을 결의해 파업중인 조합원 1인당 50만원의 생계비를 주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가 아니”라고 했다. 이와 별개로 “외부에서 시민단체나 학생들이 ‘이랜드 투쟁기금’으로 민주노총 서비스연맹에 모금해 준 수천만 원이 지금까지도 전달되지 않았다”고 김 위원장은 말했다.

(반면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김형근 위원장은 이에 대해 “민주노총은 중앙집행위에서 오히려 이랜드 투쟁을 적극 지원하기로 결의했고, 그렇게 해왔다. 몇몇 간부들의 점거투쟁 철회 요구는 사실이 아니다. 12억원의 생계비는 물론 공동투쟁기금 역시 올 추석까지 생계비, 선물, 문화제 등으로 지원해 거의 다 소진했다. 오해다. 민주노총은 오히려 이랜드-뉴코아 투쟁으로 110억원의 손배소 소송을 당하는 등 여러모로 힘든 상황”이라고 밝혔다.

민주노총 우문숙 대변인은 지원금과 관련해 “민주노총은 이랜드 투쟁 지원금으로 16억원을 모으려 했으나 모금액을 채우지 못해 10억원을 모아 전달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10월22일 집행유예를 받고 출소한 뒤부터 가장 힘들었어요. 구치소 안에 있을 때는 온갖 희망적인 메시지만 받았거든요. 정작 나와 보니 조합원들은 계속 굶고 있었고….”

결국 노사 협상을 통한 사태 해결만이 살 길이었다. 그러나 이랜드그룹은 집중교섭에 들어간 지난해 12월, 교섭위원들마저 해고시켰다. ‘협상’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거대한 벽이었다. 1500여명에 달했던 조합원이 반으로 줄고, 파업에 동참하는 조합원은 150여명에 불과했지만, ‘이랜드 투쟁’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육사 출신으로 자신도 정규직, “근사한 사회생활 꿈꿨는데…” 

이랜드일반노조에는 특이하게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조원이 섞여 있다. 김 위원장 역시 정규직 출신이다.

육군사관학교 출신인 김 위원장은 임관 뒤 5년 간 복무를 하고 전역했다. 군인이라는 옷이 그에게 맞지 않았다. 전역한 뒤 그는 98년 까르푸 정규직 매니저로 입사했다. “다들 그렇듯 승진 빨리 해서 점장도 하고, 본사 진출도 하는 게 꿈이었어요.” 그의 첫 근무지는 부천 중동점. 2002년 새로 부임한 프랑스인 점장은 그의 인생을 180도 바꿔 놓았다.

“당시 점장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직원들을 무조건 다 내보내라고 하는데, 차마 그 지시를 따를 수는 없었어요. ‘회사를 그만둬야 하나, 싸워야 하나’ 고민하다가 노조에 가입한 게 2003년 1월3일이었어요. 그리고 6월부터 파업에 들어가 70일 만에 결국 승리했죠. 임금 인상도 됐고, 해고를 지시한 지점장도 물러났으니까요. 이 과정에서 노조위원장이 됐고, 지금까지 온 거죠.” 까르푸는 이랜드그룹에 인수된 뒤 다시 삼성테스코에 넘겨졌다.

평소 사회문제나 노조활동에 관심이 없었던 그였지만, 불의에 맞서는 ‘정의감’이 결국 그를 투사로 변신시켰다. 중동점 파업을 겪으면서, 비정규직이 노조에 가입해야 정규직도 살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도 깨달았다.

“중동점 파업 때 정규직 180명 중에 60명이 파업에 동참했어요. 3분의 1이 참여했으니 당연히 매장이 멈출 줄 알았죠. 근데, 그 자리를 비정규직이 메우더라고요. 우리만큼 일도 잘하고요. 비정규직도 파업에 참여했으면 문제가 더 빨리 해결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뒤부터 비정규직도 노조로 가입시켰죠. 각 지점마다 조합원이 10명쯤 생기면 ‘누나가 해야 해’라며 분회장 자리를 떠맡겨 노조를 조직화시켰죠.”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비정규직 노조를 가입시킨 뒤부터 정규직-비정규직 간의 갈등이 조금씩 풀렸다. “못하겠다”던 아줌마 분회장과 비정규직 아줌마들이 오히려 노조활동에 더욱 적극적이었다.

비정규직 노조원들에 대한 차별없는 고용을 요구하며 매장 점거 농성을 벌여온 서울 상암동 홈에버 매장에 지난해 7월20일 경찰이 투입돼 김경욱 이랜드 일반노조위원장(가운데) 등 조합원들이 경찰에 연행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노조활동을 하면서 비정규직 아줌마들이 ‘우린 사람이 아니에요’라고 했어요.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노조를 통해 자기 목소리를 원 없이 낸 셈인데, 비정규직 문제는 정규직 노조가 앞장서서 하지 않으면 불가능해요. 코스콤 정규직 노조가 오히려 비정규직 노조를 탄압하고, 현대백화점 정규직 노조는 회사와 비정규직의 외주화에 합의했어요. 노조가 정규직만을 위한 조직으로 전락하면, 언젠가는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와해될 수밖에 없어요.”

“후회? 재미있었지요, 뭐. 어쩔 수 없는 것도 있고 ” 

“지금까지의 삶에 후회는 없으세요?”

“재미있었지요. 뭐. 어떤 사람들은 평범하지 않다고 하는데 사실 사관학교에 간 것도, 까르푸에 입사한 것도, 노조활동도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겁니다. 내 스스로 결정해서 한 것도 있지만, 큰 틀 안에서 분위기 때문에 선택한 거죠. 사관학교는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간 거고, 지점장의 부당해고에 맞서 노조 활동을 하게 된 것도 그렇고……. 내 갈 길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정해져 있는 것 같아요. 후회보다도 앞으로는 좀더 재밌고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10년 전처럼 상급자가 직원해고라는 똑같은 지시를 내린다면요?”

“어려운 질문이네요. 그런 일은 없겠죠. 하지만 거부는 당연한 것이죠. 다만 점거농성이라는 방법 대신 다른 방법을 생각할 것 같아요. 결과를 이미 알았기 때문에.”

“다시 위원장을 맡으실 건가요?”

“5년째 위원장을 했어요. 너무 힘들어요. 가정생활도 안 좋고. 이제는 쉬고 싶어요. 매년 임금협상과 파업 등으로 쉬지 못했어요. 너무 힘들었어요.”

그는 올 초부터 부인과 이혼을 전제로 별거 중이다. 벌써 10개월째다. 2002년 결혼을 했지만, 노동조합 활동으로 가정에 소홀했던 탓이다.

수천만원 빚과 신용불량 족쇄…“책이나 한번 써볼까요?” 

‘이랜드 투쟁’은 종착점에 다달았지만, 그의 인생은 이제부터 고행의 시작이다. 이랜드 투쟁을 하면서 신용카드 대출 등으로 얻은 수천만원의 빚과 신용불량자라는 족쇄를 해결해야 한다.

하루라도 빨리 생계수단을 찾아야 할 판이다. “일단은 쉬고 싶어요. 책을 한번 써볼까요? 대한민국 인사·노무자와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읽을 수 있는 책. 노조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파업 중 조합원들의 심리상태, 지도부의 고민 등을 담은 거요.”

“노조 팔아 책 쓴다고 욕먹을지도 모르는데요?”

“그러면 어때요. 먹고 살아야지. 누가 절 회사에 취직시켜 주겠어요.”(웃음)

“노조활동을 포함한 사회운동을 계속할 생각인가요?”

“전혀 계획 없어요. 일단 먹고 살 길을 찾아야죠. 운동도 먹고 살 길을 찾아놓고 해야 하지 않겠어요? 뭔가를 해야 한다면 그때 고민을 다시 해봐야겠지만. 놀면서 생각해 보려고요.”

그는 활짝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에는 씁쓸한 ‘슬픔’이 묻어나왔다. 과연 누가 그의 고뇌를 읽을 수 있을까. ‘연대’를 말하지만, 장기파업 농성장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언제나 그 때뿐이다. 코스콤, 기륭전자, 케이티엑스….

투쟁과정에서 생계를 위해 빚더미에 앉을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처지를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생계난 때문에 파괴되어가는 이들의 가정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래서 더욱 쓸쓸하고 스산한 가을이다. 글 김미영 기자kimmy@hani.co.kr, 사진·영상 이규호 피디 pd295@hani.co.kr

 


남은 건 씁쓸한 뒷맛과 수천만원 빚 

비정규직과 징계해고자의 복직이라는 성과를 얻었지만, 김경욱 위원장에게 남은 건 수천만원의 빚과 신용불량자라는 낙인뿐이다. 홈에버 점거농성으로 7월10일 연행돼 구속된 뒤 그 해 10월22일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결국 전과자로 전락했다. 안정적인 생계수단이었던 직장을 잃었고, 소중한 가족이라는 울타리도 잃었다. 두 아이의 아빠이자, 한 가정의 가장이었던 그에게 남은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다. 건강상태도 좋지 않음은 물론이다.

“투쟁에 대한 회의나 이해관계를 따졌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겠죠. 싸움을 시작할 때만 해도 빨리 끝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전쟁이 터져 사람이 죽을 각오로 싸우는 데 가족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당시에는 너무나 많은 직원들이 해고되고 있었고, 그걸 막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이랜드일반노조의 투쟁은 작년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랜드그룹은 2007년 7월1일 시행된 비정규직법을 앞두고 ‘2년 이상 일한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지 않기 위해’ 홈에버와 뉴코아에서 계산업무를 담당하던 비정규직 노동자 700여명에게 계약해지를 통보하며 집단 해고했다. 그리고는 ‘외주 용역’으로 전환했다. 이랜드 노동자들은 계산업무를 멈추고 파업 투쟁을 벌였다. 2007년 6월30일. 결국 이랜드 조합원은 홈에버 월드컵점에서 무기한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7월20일 공권력이 투입되고, 강제해산 될 때까지 21일간을 싸웠다. 그는 이 투쟁에서 맨 앞에 섰다.

“작년 6월20일 지방노동위로부터 비정규직 조합원에 대한 계약해지가 부당해고이며, 원직복직 시켜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지만 회사는 이 결과도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파업도 해봤지만 안됐고, 대법원까지 가는 법정투쟁을 벌이려면 최소 3년은 걸리고. ‘매장 1개라도 멈춰야 해결된다’는 생각에 상징적으로 월드컵점을 점거한 거죠.”  김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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