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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0.02 14:36 수정 : 2008.10.02 16:17

고산 항공우주연구원 선임연구원. 박종찬 기자

[그사람 그후] 1등 같은 2등 예비우주인 고산
“우주인 훈련경험 강연하고 달 탐사 연구
후배에게 꿈과 희망 환원하는 일 하고파”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국보 1호 남대문’을 알아도, 국보 2호는 잘 모른다.

우리 사회엔 1등만 있다. ‘한국 최초 우주인 이소연’은 있어도, ‘한국 최초 예비우주인 고산’은 그림자인 이유다. 2등인 고산 앞에선 1만8천대 1을 뚫었다는 경쟁률이 작고 초라한 것처럼 느껴지는 건, 1등에 올인하는 한국사회의 씁쓸한 단면 탓이다.

고산. 그는 1등이 될 뻔한 2등이다. 한국 최초 우주인으로 낙점됐지만, 소유즈호 발사를 한 달 남짓 앞두고 이소연씨와 교체됐다. 훈련규정 위반, 교재 외부 반출, 러시아 정보기관 개입 등 원인을 둘러싼 뒷말은 많지만, 명확하게 밝혀진 건 없다. 고산씨도, 항공우주연구원도 6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다. 소유즈 우주선 발사 이후 다섯 달, 고산씨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 고산씨는 지금


고산씨에 대한 관심은 개인적인 호기심도 작동했다. 러시아에서 귀국한 뒤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우주과학연구팀 선임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는 그의 근황이 궁금해졌다. 최초 우주인 신분으로 다양한 행사와 강연에 초대되는 등 언론의 노출이 많은 이소연씨에 비하면 그의 근황은 거의 묻혀있다. 죄책감 때문에 혹시 그 커다란 눈망울과 서글서글한 웃음을 잃지는 않았을까.

그를 만난 건 지난 9월 25일 대전 항공우주연구원에서였다. 기우였다. “정장으로 차려 입을까 하다 너무 어색할 것 같아 그냥 평소 복장이다”는 그의 표정은 밝고 명랑했다. “새로운 환경이긴 하지만 좋은 사람들과 함께여서 잘 적응하고 있다”고 입을 열었다. 그가 맡고 있는 업무는 크게 두 가지. 우주인 훈련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외부 강연이 일주일에 1~2회꼴이고, 달 탐사와 관련한 방안을 마련하고 연구를 진행하는 실질적인 작업을 한다.

항공우주연구원 연구실과 기숙사를 오가는 쳇바퀴 삶이지만 그 나름대로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2004년 전국 신인 아마추어 복싱선수권에 출전해 동메달을 따고, 같은해 중국 파미르 고원의 해발 7500m 뮤스타크 아타를 등반할 정도로 ‘운동광’인 그는 여전히 수영과 헬스로 ‘체력단련’ 중이었다. “몸이 건강하면 머리도 맑아지고, 기분 나쁜 일이 있을 때 운동을 하면 기분이 좋아져요. 많은 사람들에게 운동을 권하고 싶어요.” 그는 어쩔 수 없는 ‘운동 예찬론자’다.

고산씨는 지금껏 엘리트 코스만 밟아온, 흔히 말하는 1% 인재다. 외고-서울대-삼성종합기술원, 그리고 우주인까지. 비록 소유즈호에 승선하지 못했어도 ‘예비 우주인’이라는 명예도 얻었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연구원 내에서 시샘 어린 눈길이 있을 법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다”고 한다. 나름의 시련이 있었다는 뜻이다. 최종 우주인에 선발된 뒤 그가 “이 모든 영광을 일찍 혼자되셨음에도 훌륭히 형제를 키워주신 어머니의 두 발 앞에 놓고 싶다”고 말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가족과 친구. 주위에 좋은 분들이 많았고, 그분들의 도움으로 지금 이 자리에 있습니다. 우주인 훈련 역시 국민의 세금으로 한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사회에 환원하는 작업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그 사람, 고산  

‘높은 산’. 그의 이름의 뜻을 풀면 이렇다. 큰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이다. 이름처럼 그의 삶도 등성이와 계곡의 연속이다. 그 스스로도 33년의 인생을 “비뚤배뚤”이라고 말한다. 후회하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 가다가 이 길이 아니다 싶거나 다른 길이 보이면 길을 바꿨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도 100% 만족.

그렇다면 우주인 교체를 둘러싼 일련의 과정도 불만은 없다는 뜻인가? 그의 대답 속엔 우주인 교체와 관련해서도 후회나 미련이 없음이 내비쳐진다. “어떤 목표나 꿈이 있고, 자기가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이뤄졌건, 이뤄지지 않았건 큰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그 당시 제가 담담하게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에게 격려의 메시지를 받았는데, 제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갖는데 큰 힘이 됐습니다.”

“그렇더라도, 우주선 발사 과정에서 눈물을 글썽였는데요? 미련 때문 아닌가요?”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우주인 사업에 애정이 많았는데, 한국인 우주인을 배출하는 과정을 직접 목격하니까 감개무량 했어요. 그때도 아쉽다는 생각은 접어뒀던 것 같아요. 성격적인 면도 있겠지만, 어쨌건 한국 최초 우주인으로 뽑혀서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 나름의 최선을 다했으니까요.”

“행복하세요?”

“올 12월에 결혼합니다. 그래서 올해는 200% 행복합니다.”

예비신부는 서울대 수학과 동기(현재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밟고 있는 중)이다. 학업이 끝나지 않아 앞으로 2년간은 서로 떨어져 지내야 한다. 얼마 전 그는 주례를 서기로 한 신영복 선생을 찾았다. 그는 “사랑은 서로를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다”며 “그런 면에서 여자친구는 나와 많은 것을 공유한 사람이며, 평생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 2인자 고산? 우주인 고산

고산 항공우주연구원 선임연구원. 박종찬 기자, 한겨레 자료사진

공교롭게도(?) 예비신부는 그의 인생을 180도 바꿔놓은 장본인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천문회 활동을 했던 그의 여자친구는 “같이 한번 응모하자”고 그에게 제안했다. 당사자는 일정이 맞지 않아 응모를 포기한 반면 고산씨는 “우주인을 뽑는 역사적 과정에 동참하고 싶어 당연하게” 응모를 했다. 선발 가능성과 상관 없이. 실제 그는 우주인 응모 전 유학(박사과정)을 준비 중이었고, 한 대학으로부터 입학 허가까지 받았으나 우주인 최종후보로 선발되면서 포기했다.

“언제 탈락할지 몰라 처음 달리기 심사할 때부터 받았던 등번호부터 기념 삼아 다 모았어요. 다행히 우주인 선발 때 중요하게 보는 포인트들을 제가 많이 갖고 있더라고요. 전공과 체력, 극한 상황에서의 경험 등이 플러스 요인이 된 것 같아요. 선발 확률이 높아지면서 어쩌면 내가 뽑힐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이 높아졌죠.”

“우주인을 동경했나요?”

“어릴 때부터 우주인을 꿈꾸지는 않았어요. 누구나 그렇듯, 우주왕복선 발사장면이나 우주선과 우주, 은하에 대해 배우면서 가진 동경 정도였다. 우리 세대에선 실현 가능한 꿈이 아니었잖아요.”

러시아 가가린센터의 훈련과정은 힘들었지만, 순간순간이 기억에 남을 만큼 뜻 깊은 경험이었다. 자기의 모든 시간을 투자하면, 하고 싶은 일을 100% 할 수 있었다. 부족한 부분을 메우기 위해 여러 교관을 찾아다니면서 배웠고, 틈 나는 대로 러시아어를 비롯해 개인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기 위해 스스로를 몰아붙였던 기억이 또렷하다. 그의 싸이월드 미니홈피(http://www.cyworld.com/ko_san)를 채우고 있는 것도 바로 이때 사진들이다. 그는 “혹한기·해양생존·무중력 훈련보다 교관 쫓아다니면서 배운 경험이 더 기억에 남는다”고 회상했다.

◇ 고산의 10년 후? 20년 후?

고산씨가 항공우주연구원에 설치한 국제우주정거장의 모형을 놓고 설명하고 있다. 박종찬 기자

“2등을 기억하지 않는 건 보편적인 사실인 것 같아요. 그런데 남들이 날 2등으로 기억하느냐, 1등으로 기억해 주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아요. 남들이 나를 2등으로 봐도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가는 게 더 중요하죠.”

고산의 10년 후는 어떤 모습일까. ‘한국 최초 우주선 조종사’? “우주인의 꿈을 갖고 있어요. 우리 로켓에, 우리 우주선을 띄워 보내는 날, 제가 그 자리에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죠. 지금은 그 꿈이 넓어졌어요. 우리 우주선을 띄우는 날, 제가 탑승하느냐 여부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런 날이 하루라도 빨리 올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역할을 했으면 합니다.”

일각에서 조심스레 제기되고 있는 ‘한국인 1호 우주선 조종사=고산’이라는 풍문에 대한 답변을 이렇게 에둘러 피해갔다. 그는 “우주인 경험 이후 우주와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넓어졌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주인이라는 타이틀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주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도 바뀌었단다. “과거에는 주위를 돌아볼 여력 없이 엔지니어·과학자로서의 길만 걸어왔다면, 지금은 사람들과 함께 광장에 나와 더불어 살아간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요. 국민 여러분의 도움으로 우주인 훈련을 받았는데, 되돌려줘야죠. 지금은 우주인의 꿈을 키우고 있는 후배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이 먼저인 것 같아요. 또한 꿈이 실현되지 않더라도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얻는 행복감이 얼마나 큰지 알려주고 싶어요.”

“10년, 20년, 30년 뒤 고산씨는 어떤 모습으로 있을까요?”

“가장 바람직한 것은 제가 지금 상상할 수 없는, 지금과 전혀 다른 장소에 서 있으면 만족스러울 것 같아요.”

“다른 장소라면? 우주요?”

“글쎄요. 어디에 가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제 신념을 찾아나가면서, 제 삶의 신조에 맞게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겠죠.”

“우주인 선발 공고가 내일 다시 난다면 지원할 건가요?”

“당연하죠. 다시 합니다. 공모에 지원한다면….”

그는 끝내 말문을 잇지 못했다.

글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사진·영상 박종찬 기자 pjc@hani.co.kr, 은지희 피디 eunpd@hani.co.kr

◈ 고산 인터뷰 뒤안길

‘시련’에 대한 질문에 “10년, 20년 뒤, 아니면 더 나중에…”
이소연씨에 대해서는 “갑자기 유명해져 잘 버텨나갈지…”

반듯한 도시 청년. 고산씨의 첫 인상은 그랬다. 인터뷰를 하겠다고 마음 먹을 때만 해도 ‘의기소침해 있을 것’이라고 어림잡았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쾌활하다. 쫄았던 마음이 살짝 펴진다. 막상 만나보니 꽃미남이다. 운동으로 다져진 다부진 몸에 깔끔한 외모까지. 말도 조리있고 반듯하다. 1만8천대의 1의 경쟁률을 뚫고 우주인 후보로 뽑힌 이력의 소유자답게 몸가짐에 군더더기가 없다.

그의 이야기엔 구김이 없었다. 탄탄대로에서 느닷없는 궤도 이탈의 아픔을 겪은, ‘시련’ 따위는 훌훌 털어버린 듯 보였다. 물론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스며들어 있을 작은 생채기까지 찾아내기엔 시간이 절대 부족했다. 제약과 통제도 많았다. 그럼에도 인터뷰 내내 그는 비교적 솔직하고, 담담하게 자신을 보여줬다. 홀어머니 아래서 어렵게 자랐지만 ‘반듯하게 큰 청년’이라는 느낌을 받은 건 기자뿐 아니라 동행했던 일행들의 공통된 평이었다.

사실 인터뷰 초반 탐색전까지 그에 대한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그의 싸이월드 미니홈피 소개글이 하필이면 ‘I’m a stupid’였다. 우주인 훈련과정 때 활발하게 업데이트하던 미니홈피와 블로그(http://my.blogin.com/kosan)는 그의 심경을 대변하는 것처럼 몇 개월째 굳게 닫혀 있었다. 인터뷰 중간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바빠서 업데이트를 못했지만, 그렇지 않아도 최대한 빨리 새로운 글로 채워 넣으려고 하고 있어요”라며 웃는다.

‘우주인 교체’와 우리나라의 ‘우주산업’에 대해 묻지 않기로 한 것은 인터뷰 수락의 전제 조건이었다. 아마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애써 끄집어내야 하는 고통을 피하고 싶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10년 뒤, 또는 20년 뒤, 아니면 더 나중에 할 수 있는 얘기”라는 말로 에둘러 답했다. 아쉽게도 그 때가 되면 ‘우리와 가장 먼저 인터뷰하자’는 약속은 받아놓지 못했다.

오랜 기간 동거동락한 이소연씨와는 어떻게 지낼까 하는 것도 궁금했다. “자주 연락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지나다니면서 계속 본다”고 웃었다. 대신 진심어린 충고를 잊지 않았다. “사회경험 없는 학생 신분에서 갑작스럽게 유명해져서 잘 버텨나갈 수 있을지 걱정은 되요. 오빠로서, 인생 선배로서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최대한 도와줄 생각”이란다. 이소연씨가 우주선에 탑승할 때, 노란색 꽃을 꺾어주며 “잘 다녀오라”고 격려했던 그는, 무사히 귀환한 뒤에는 “고생 많았다. 수고했다”는 짧은 말로 격려를 대신했다. 서울에서 오랜 기간 살고, 지금은 대전에 터를 잡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어쩔 수 없는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였다.

그는 인터뷰 도중 ‘함께’, ‘관계’, ‘도움’, ‘나눔’, ‘나라에 빚졌다’ 등의 말을 자주 했다. 그래서 그는 “우주인 훈련을 받은 경험을 밑거름 삼아 소외된 아이들과 꿈을 나누는 일”을 가장 시급하게 해야 할 사명으로 느끼고 있었다. 소외된 아이들을 보살피는 어른들이 불러주면 언제든, 어디든 달려가겠노라고 말했다.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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