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배 칼럼
|
무차별 규제철폐는 또다른 경제파국 부를수도
우리나라는 1997년 말 국제통화기금(아이엠에프)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았다. 금융 거래의 규제를 함부로 풀어 해외 투기자본의 먹이사냥을 제때 막아내지 못했던 탓이었다. 적지 않은 기업체가 파산해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가정은 파탄났으며 상점은 문을 닫았다. 집을 빼앗기고 거리에서 잠을 자는 노숙자들이 대규모로 나타난 것은 아마 그때가 역사적으로 처음이지 싶다. 참으로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이 사태에 아무런 잘못이 없었던 선량한 서민들이 외환 유동성 부족으로 인한 국가적 고통을 거의 모두 뒤집어써야 했다는 것이다. 사태의 책임이 명백히 경제 관료와 정치인들, 그리고 경영진의 잘못된 정책에 있었음에도 그들이 시행한 정책의 희생양이 돼 혹독한 형벌을 치러야 했다. 가계수지 적자가 쌓여 가정이 파탄나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가장은 노숙자로, 아이들은 보육원에 맡겨지는 비극이 속출했고 개중에는 행려병자가 돼 거리에서 죽음을 맞기도 했다. 모두 살기가 바빠 누구 한사람 남의 사정을 돌봐줄 형편도, 여유도 없었던 참으로 힘든 시절이었다. 당시 정부가 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 조건을 충족시킨다면서 금융 관련 각종 규제를 마구 풀었던 것이 참혹한 결과를 빚은 것이었다. 당시 우리 외환시장을 먹잇감으로 막대한 이득을 남겼던 주범은 해외 투기자본들이었다. 외환 유동성 부족을 틈타 환투기로 큰돈을 벌었을 뿐 아니라 수많은 우량 국내 기업들을 헐값에 먹어치웠다. 이들의 수법은 항상 똑같았다. 유동성 위기로 흑자 도산한 알짜 기업들을 사들여 제일 먼저 직원들을 마구 내쫓아 기업의 노동 비용을 대폭 줄인다. 그러면 자동으로 이윤율이 높아져 과실 송금도 몇 배씩 늘릴 수 있는 것이다. 재무 건정성이 높아진 만큼 회사 자산가치도 커지게 돼 되팔 때는 앞서 시장에서 산 가격에 몇 곱절을 붙일 수 있었다. 이런 수법으로 이들은 한국에서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다. 주로 미국의 금융자본가들이었던 이들의 부도덕성은 지난 1990년대 후반 엔론과 월드컴 등의 회계부정 사건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세계 금융거래의 왕자라는 미국이 지금 과거 우리가 겪었던 신용위기 상황을 겪고 있다. 물론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심각한 대규모 신용 위기여서 그 여파는 전세계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다. 무자비한 해고로 기업의 이윤율을 높였던 월스트리트의 주역들이 어느 날 갑자기 회사 도산으로 짐을 싸 거리로 나앉는 모습은 아이러니이다. 1990년대 닷컴 버블을 불렀던 정보통신 분야의 과잉 투자와 대량 해고에 의한 노동비용 감축으로 한때 재미를 보았던 자본가들이 이제는 실물가치를 뻥튀기해 돈놀이로 더 큰 재미를 볼 욕심을 부리다가 덜미가 잡힌 것이다. 실질 임금이 줄어든 노동자 계급의 구매력 저하는 헤아리지 않고 저금리로 부동산 구매를 유도해놓고 결국 주택채권과 그 파생상품을 ‘수학 공식을 동원해’(금융공학이라고도 불림) 전세계 금융회사들에 팔아 1990년대 후반까지 천문학적인 돈을 긁어모았다. 기업의 구조 조정과 대량해고로 이미 실질 임금이 크게 줄어든 미국 국민들에게 싼 이자로 부동산 매입을 부추긴 정책 당국과 이에 편승한 주택 담보 대출업체들의 신용이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함께 최악의 위기에 휩싸이게 된 것은 필연적 결과였다. 실물가치는 고려하지 않은 채 수치상으로만 수익률을 계산해 내놓은 금융 파생상품 돈놀이의 말로는 너무도 허망한 것이었다.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처럼 대출 보증채권을 취급한 정부 보증기관들이 잇따라 파산하면서 그 파생상품을 산 전세계 투자은행과 증권회사 등이 연쇄적으로 무너졌다. 미국 경제의 위기는 이미 1990년대부터 예고돼 있었다. 저금리와 신흥국가들의 저가 수출품에 힘입어 잠시 일시적 호황과 소비붐으로 위기는 모면하는 듯했으나 오히려 그 모순은 더 심화됐다. 2006년 모기지 업체 부실화를 신호로 더욱 피해는 커졌다. 이게 금융자본의 추악한 말로이자 자본주의 위기의 원인이다. 전세계 자본주의는 이제 불가피하게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게 됐다. 총체적으로 실패한 시장을 국가의 개입으로 살려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온 것이다. 금융자본가들은 시장의 최소한의 규제마저 허물어뜨리고 실물시장의 적신호를 무시한 채 오로지 이윤율 제고와 돈놀이에 미쳐 날뛰다 이제 와서는 무책임하게 국가의 구제금융을 요청하는 무책임한 짓을 저지르고 있다. 이들은 시장은 만능이며, 규제는 악이라고 주장했던 사람들이다. 미국 신용위기는 외환위기를 겪었던 우리에게 거듭 값비싼 교훈을 남기고 있다. 엊그제의 비극을 잊은 채 꼭 필요한 규제조차 나쁜 것처럼 선전하고, 규제는 쇄국이요, 탈규제야말로 마치 선진화로 가는 지름길인 양 떠들어대는 이명박 정부가 이 교훈을 새겨듣지 못한다면 얼마 안 가 퇴출 1호가 될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고소득층의 과소비와 저금리 대출에 의한 부동산 붐을 틈탄 이른바 금융공학 박사들의 돈벌이로 우리 자본시장은 어지럽다.뭐든 지나치면 미치지 못함만 못하다고 한다. 실질임금 삭감과 비정규직 급증, 실업 증가의 현실에서 구매력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내수경제를 최악으로 몰아넣은 이 정부의 부자 편향적 정책이 계속된다면 신용위기는 또다시 닥칠 수도 있다. 김형배 기획위원 hbk3@hani.co.kr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