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진보는 억울하다. 똑같은 도덕적 잘못을 저질러도 보수에 비해 훨씬 더 호되게 당하니 말이다. 그래서 진보진영 일각에서는 그걸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며 진보는 도덕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덕을 아예 내팽개치자는 주장은 아닐 테고, 아마도 도덕적 굴레에 너무 얽매이지 말자는 걸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유권자들은 정책을 완전히 외면하는 건 아니지만 정책보다는 사람을 보고 표를 던지는 걸 어이하랴. 진보는 지금 이대로의 세상이 문제가 많다며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그 과정에서 변화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향해 비판을 하면서 사실상 ‘도덕적 우월감’을 드러내거나 과시하기도 한다. 그래놓고선 보수와 같은 수준의 도덕을 누리겠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물론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중요한 건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유권자가 많다는 사실이다. 이는 2016년 미국 대선에서도 충분히 입증된 사실이다. 민주당 후보 힐러리 클린턴과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가 맞붙었던 이 대선의 주요 쟁점 중 하나는 바로 위선 문제였다. 트럼프는 대선 기간 내내 힐러리를 ‘위선자’로 몰아붙였다. 트럼프는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인 막말도 서슴지 않았지만, 그마저 ‘솔직’으로 포장하면서 자신은 위선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걸 강조했다. 단지 그 정도였으면 트럼프가 대선에서 승리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문제는 힐러리의 위선이 부도덕한 축재에서 각종 특권의 향유에 이르기까지 충분한 근거가 있다는 게 대선 기간 내내 주요 이슈로 부각됐다는 점이다. 이는 트럼프의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인 언행에 비하면 비교적 ‘사소한’ 것이었지만, 스스로 ‘악당’을 자처한 트럼프에겐 그런 몹쓸 언행마저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진보의 입장에선 기가 막힐 일이었지만, 이는 위선에 대한 대중의 혐오가 얼마나 강한지를 간과한 자업자득이었다. 진보는 위선에 둔감하다. 왜 그런가? 개인적으로 먹고사는 문제나 자녀 교육에서 진보와 보수의 차이가 거의 없다는 건 이제 상식이 되었다. 진보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분리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상식의 함의를 깨닫는 데에 무능하다. 진보는 늘 중하층의 민생을 염려하면서 최상층을 비판하는 말을 많이 한다. 적당히 대충 하는 게 아니라 온갖 화려한 수사를 동원해 가면서 한다. 가능한 한 유권자들의 심금을 울리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감성적 수사가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문재인과 더불어민주당 정부에서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고 선언했다. 역사에 길이 남을 명언이었지만 과욕이었다. 이 명언은 지식인이 당위적 선언으로나 할 수 있는 ‘꿈과 같은’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5년 임기의 정권이 해낼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었다. ‘문재인과 더불어민주당 정부’를 빼고 “우리 대한민국은 평등한 기회, 공정한 과정, 정의로운 결과를 추구하는 나라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정도로 만족했어야 했다. 지금 우리는 ‘조국 사태’의 와중에서 이 명언이 엄청난 부담과 책임 추궁으로 돌아오는 부메랑 현상을 목격하고 있다. 그게 얼마나 타당한가 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전체 국민의 절반가량이 그런 추궁을 하고 있다는 정치적 현실이 중요하다. 문재인 정부가 심혈을 기울여 추진한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 초과 근로 금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강사법 시행’ 등 일련의 정책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아름답고 훌륭한 정책이었다. 하지만 정책 시행 때 일어날 수 있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나 부작용에 대한 대처 방안이 사전에 제대로 검토조차 되지 않았다는 게 충분히 드러났다. 이 또한 진보가 선호하는 추상적 당위의 함정이다. 이는 ‘결과적 위선’으로 지탄받기 마련이다. 진보는 여전히 억울하겠지만, 위선은 관리의 대상임을 인식하고 말을 앞세우는 걸 자제해야 한다. 적어도 정책 영역에선 현실을 당위적 수사에 종속시키지 말고, 실천은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는 ‘책임 윤리’를 가져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반대 세력과도 소통하고 타협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하게 될 것이다. 위선에 민감해지기 위해선 일부러 악역을 맡아 문제를 끊임없이 지적하는 ‘악마의 변호인’ 제도를 광범위하게 도입해야 한다. 내부 고언을 하는 사람을 ‘내부의 적’으로 몰아 몰매를 주는 현 상황에선 그 방법밖엔 없지 않은가.
칼럼 |
[강준만 칼럼] 진보의 ‘위선 관리법’ |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진보는 억울하다. 똑같은 도덕적 잘못을 저질러도 보수에 비해 훨씬 더 호되게 당하니 말이다. 그래서 진보진영 일각에서는 그걸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며 진보는 도덕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덕을 아예 내팽개치자는 주장은 아닐 테고, 아마도 도덕적 굴레에 너무 얽매이지 말자는 걸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유권자들은 정책을 완전히 외면하는 건 아니지만 정책보다는 사람을 보고 표를 던지는 걸 어이하랴. 진보는 지금 이대로의 세상이 문제가 많다며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그 과정에서 변화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향해 비판을 하면서 사실상 ‘도덕적 우월감’을 드러내거나 과시하기도 한다. 그래놓고선 보수와 같은 수준의 도덕을 누리겠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물론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중요한 건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유권자가 많다는 사실이다. 이는 2016년 미국 대선에서도 충분히 입증된 사실이다. 민주당 후보 힐러리 클린턴과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가 맞붙었던 이 대선의 주요 쟁점 중 하나는 바로 위선 문제였다. 트럼프는 대선 기간 내내 힐러리를 ‘위선자’로 몰아붙였다. 트럼프는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인 막말도 서슴지 않았지만, 그마저 ‘솔직’으로 포장하면서 자신은 위선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걸 강조했다. 단지 그 정도였으면 트럼프가 대선에서 승리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문제는 힐러리의 위선이 부도덕한 축재에서 각종 특권의 향유에 이르기까지 충분한 근거가 있다는 게 대선 기간 내내 주요 이슈로 부각됐다는 점이다. 이는 트럼프의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인 언행에 비하면 비교적 ‘사소한’ 것이었지만, 스스로 ‘악당’을 자처한 트럼프에겐 그런 몹쓸 언행마저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진보의 입장에선 기가 막힐 일이었지만, 이는 위선에 대한 대중의 혐오가 얼마나 강한지를 간과한 자업자득이었다. 진보는 위선에 둔감하다. 왜 그런가? 개인적으로 먹고사는 문제나 자녀 교육에서 진보와 보수의 차이가 거의 없다는 건 이제 상식이 되었다. 진보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분리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상식의 함의를 깨닫는 데에 무능하다. 진보는 늘 중하층의 민생을 염려하면서 최상층을 비판하는 말을 많이 한다. 적당히 대충 하는 게 아니라 온갖 화려한 수사를 동원해 가면서 한다. 가능한 한 유권자들의 심금을 울리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감성적 수사가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문재인과 더불어민주당 정부에서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고 선언했다. 역사에 길이 남을 명언이었지만 과욕이었다. 이 명언은 지식인이 당위적 선언으로나 할 수 있는 ‘꿈과 같은’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5년 임기의 정권이 해낼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었다. ‘문재인과 더불어민주당 정부’를 빼고 “우리 대한민국은 평등한 기회, 공정한 과정, 정의로운 결과를 추구하는 나라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정도로 만족했어야 했다. 지금 우리는 ‘조국 사태’의 와중에서 이 명언이 엄청난 부담과 책임 추궁으로 돌아오는 부메랑 현상을 목격하고 있다. 그게 얼마나 타당한가 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전체 국민의 절반가량이 그런 추궁을 하고 있다는 정치적 현실이 중요하다. 문재인 정부가 심혈을 기울여 추진한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 초과 근로 금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강사법 시행’ 등 일련의 정책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아름답고 훌륭한 정책이었다. 하지만 정책 시행 때 일어날 수 있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나 부작용에 대한 대처 방안이 사전에 제대로 검토조차 되지 않았다는 게 충분히 드러났다. 이 또한 진보가 선호하는 추상적 당위의 함정이다. 이는 ‘결과적 위선’으로 지탄받기 마련이다. 진보는 여전히 억울하겠지만, 위선은 관리의 대상임을 인식하고 말을 앞세우는 걸 자제해야 한다. 적어도 정책 영역에선 현실을 당위적 수사에 종속시키지 말고, 실천은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는 ‘책임 윤리’를 가져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반대 세력과도 소통하고 타협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하게 될 것이다. 위선에 민감해지기 위해선 일부러 악역을 맡아 문제를 끊임없이 지적하는 ‘악마의 변호인’ 제도를 광범위하게 도입해야 한다. 내부 고언을 하는 사람을 ‘내부의 적’으로 몰아 몰매를 주는 현 상황에선 그 방법밖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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