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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8.18 17:47 수정 : 2019.08.18 19:19

본인과 두 아들 모두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인 박수신씨가 지난 5월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청와대에 공개서한을 전달하기 전 삭발식을 하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2010년 이마트를 비롯한 일부 대형마트에서 판매하는 즉석 피자가 소비자들에게 큰 인기를 얻자,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과 네티즌 사이의 설전이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 한 네티즌이 “신세계는 소상점들 죽이는 소형 상점 공략을 포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자영업자들 피 말리는 치졸한 짓입니다”라는 글을 썼고, 이에 정 부회장은 ‘소비자의 선택’을 강조하면서 “소비를 이념적으로 하나?”라고 대꾸했다.

정 부회장의 반론은 그동안 오래된 상식이었다. 소비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는 것이지 소비를 이념적으로 한다는 건 낯선 일이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이념적·정치적·윤리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소비를 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그동안 ‘소비자’는 ‘시민’에 비해 이기적이고 열등한 존재로 여겨져왔지만, 그런 구분은 사라져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소비 행위를 통해 시민으로서의 자각성을 갖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지금 우리는 기존 정치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격변의 시대에 살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새로운 소비 행위를 집단적으로 하는 걸 ‘정치적 소비자운동’이라고 한다. 영국의 정치적 소비자운동가들은 “쇼핑이 투표보다 더 중요하다”는 슬로건을 들고나왔다. 정치가 불신과 혐오의 대상이 된 가운데 특정 제품의 소비를 거부하거나 지지하는, 보이코팅(boycotting)이나 바이코팅(buycotting)이 세상을 바꾸는 데에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반론도 있다. 우파는 시장 질서를 교란한다는 이유로 비판하고, 좌파는 정치를 약화시키는 반정치 행위라는 이유로 비판한다. 하지만 오늘날 시장과 정치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시장과 정치를 정상화시키는 데에나 힘을 쓸 것이지, 시장과 정치의 실패로 인해 나타난 운동에 시비를 걸 일은 아니라는 게 정치적 소비자운동가들의 생각이다. 시장·정치와 정치적 소비자운동의 상호보완도 가능하니, 비판자들이 우려할 일은 아닌 것 같다.

한국은 정치적 소비자운동이 발달돼 있는 나라가 아니다. 최근 일본 제품 불매가 범국민적 운동으로 전개되고 있지만, 비상한 시기에 발동되는 민족주의·애국주의 운동의 성격이 두드러진다. 평소 일상적 삶에서 이루어지는 정치적 소비자운동은 아직 미약한 편이지만, 젊은층과 여성을 중심으로 이전에 비해 크게 늘고 있으며 앞으로 급격한 성장세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

국내에도 정치적 소비자운동의 성공 사례가 꽤 있지만, 범국민적 차원의 정치적 소비자운동이 벌어졌어야 마땅함에도 그러지 못한 비극적인 사건도 있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가 바로 그런 경우다. “세상에 어떤 참사에서 사망자가 1300명을 넘을 수 있을까요. 전쟁 말고 비교할 수 있는 게 있습니까.”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이 올해 초에 한 말이다. 이젠 가습기 살균제 피해로 숨진 사람이 1400명을 넘어섰다. 가습기 살균제 문제가 드러난 건 2011년이었는데 그동안 가해 기업, 정부, 정치권은 무엇을 한 걸까? 구연상 숙명여대 교수는 관련 논문에서 이 사건은 ‘재난’이나 ‘참사’가 아니라 ‘악행’으로 규정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악행을 방관한 언론과 시민사회는 면책될 수 있을까?

최승운 유가족연대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언론이 처음부터 추적보도를 해줬으면 (상황이) 이렇게까진 오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가지고 보도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몇몇 언론인이 고뇌 어린 반성 칼럼을 쓴 건 경의를 표할 일이지만, 언론의 기존 시스템과 관행은 그대로다. 그래서 이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도 지난 7월에 나온 검찰의 3차 수사결과 발표를 보도한 것으로 끝내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래선 안 된다. 피해 신청자는 6400명이지만, 피해를 인정받은 사람은 460여명으로 인정률이 7.5%에 불과하다. 살아남은 피해자 66.6%가 ‘만성 울분’으로 고통받고 있다. 이걸 외면하는 또 한번의 악행을 방관해선 안 된다.

기업, 정부, 정치권, 언론이 악행을 저지르거나 방관하는 상황에서 정치적 소비자운동은 마지막 자구책일 수밖에 없다. “쇼핑은 투표보다 더 중요하다”는 행동강령을 철저히 실천하되, “나도 피해자가 될 수 있었다”는 역지사지의 수준까지 나아가야 한다. 의사이자 의료인류학자인 김관욱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라는 책에서 그런 역지사지 후 “온몸의 장기가 다 끊어지는 ‘단장지애’의 고통이 눈앞까지 밀려왔다”고 했다. 우리 모두 숨진 1400명을 ‘통계’로만 여기는 냉담과 결별해야 한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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