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지난 22일 ‘서울-지방 상생을 위한 서울선언문 선포식’이 열렸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서울이 대한민국 수도로서 오늘날 세계 톱 도시 위상을 갖게 된 것은 서울 혼자만의 힘이 아니었다”며 “제가 농사꾼 부모님의 헌신적 노력으로 서울시장이 됐듯이 지방의 희생과 헌신으로 서울이 이런 위상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그래서 지방에서 취업과 창업을 꿈꾸는 청년들을 돕겠다고 밝혔다. 나는 네번 놀랐다. 첫째, 서울이 지방과의 상생을 고민하고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내놓았다는 데에 놀랐다. 둘째, 이걸 보도한 언론 기사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매우 빈약하다는 데에 놀랐다. 셋째, 나는 이게 박 시장의 큰 업적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들이 비난 일색이라는 데에 놀랐다. 넷째, 관련 기사에 인용된 어느 서울 소재 대학 교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에 놀랐다. “오히려 서울시는 우수한 인재를 서울로 데려오는 등 자체 경쟁력을 높여야 하는데, 서울시민의 세금을 들여 인력을 지방으로 나가게 하는 건 서울시 정책으론 맞지 않는다고 본다.” 나는 모든 의견을 존중한다. 그런 존중심을 갖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았다. 내가 과거 서울시민으로 살 때 나는 지방을 어떻게 생각했던가? 돌이켜 생각해보니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서울을 한국으로 간주하고 살지 않았나 싶다. 그랬던 내가 이젠 지방 시민이 되었다곤 하지만 예전의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어찌 존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체로 정의롭고 양심적인 교수들일지라도 서울에 살게 되면 이런 생각을 하기 십상이다. “이 좁은 국토에서 수도권에 쏠려 있는 게 뭐 그리 큰 문제인지 모르겠다.” “미국이나 중국처럼 땅덩이가 큰 경우 불균형한 발전은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아무리 먼 곳이라도 반나절이면 갈 수 있는 조그만 나라에서 불균형 발전 운운하는 건 옳지 않다.” 서울에 살면서도 ‘지방 소멸’과 그로 인한 국가적 대위기를 걱정하는 마강래 중앙대 교수의 책에 인용된 반응들을 소개한 것이지만, 나 역시 면전에서 자주 들었던 말들이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럼 네가 지방에서 살아봐!”라는 식으로 대꾸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이들은 죽었다 깨나도 지방에서 살 뜻이 없으니 하나 마나 한 말이다. 원초적으로 역지사지의 무능력 상태에 빠져 있는 그들의 속마음은 간단하다. “억울하면 서울에서 살지 누가 지방에서 살라고 등 떠밀었나?” 맞다. 나는 누가 등을 떠밀어서 지방에 살게 된 건 아니다. 억울하면 출세할 일이지, 세상 탓할 일은 아니다. 이런 ‘책임의 개인화’ 현상은 한국인의 완고한 생활문법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 문법을 동원할 때에 꼭 따라붙는 ‘좁은 국토’라는 표현의 정체다. 국토가 크면 불균형 발전이 문제 될 수 있지만, 국토가 작으면 문제 될 게 없다는 이 발상은 도대체 어떤 근거를 갖고 있는 걸까? 정치·경제·사회·문화적 권력과 부가 서울에 집중돼 있어도 어디서건 반나절이면 갈 수 있으니 서울 구경 하는 데에 무슨 문제가 있느냐는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그게 아니라면, 반나절의 거리라도 그게 가장 중요한 취업과 진학에서부터 문화적 기회의 향유에 이르기까지 지방민들의 일상적 삶에 얼마나 큰 장애이며 얼마나 큰 희생과 비용을 요구하는지 몰라서 그러는 걸까? 이건 ‘잔인한 무지’라는 말 이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앞서 나는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들이 비난 일색이라고 했는데, 내가 어이없어 웃음을 터뜨린 건 ‘서울-지방 상생’이 박 시장의 대권 전략이라고 비난하는 댓글들이었다. 한국을 몰라도 이렇게 모를까? 지방으로 놀러만 다니지 마시고 선거 때 지방 나들이 좀 해보시기 바란다. 후보들마다 앞다투어 유능한 인재들을 서울로 더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지방 유권자들은 ‘서울-지방 상생’에 별 관심 없다. 기존 ‘서울공화국’ 체제에 분노하다간 제명에 살기 어렵다는 걸 간파하고 체념의 지혜를 발휘한 지 오래다. 이게 바로 서울 교수들이 ‘좁은 국토’ 운운하면서 서울이 인재를 더 독식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배경, 즉 ‘믿는 구석’일 게다. 나 역시 개인적으론 평온을 위해 체념의 지혜를 적극 실천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직업적 의무에서 서울의 지식인들이 ‘잔인한 무지’에서 탈출하는 게 꼭 필요하다는 말씀은 드리고 싶다. 물론 나 역시 서울에 계속 살았더라면 ‘잔인한 무지’의 포로가 되었을 것이기에 겸허한 자기 성찰의 자세로 드리는 말씀이다.
칼럼 |
[강준만 칼럼] 잔인한 무지 |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지난 22일 ‘서울-지방 상생을 위한 서울선언문 선포식’이 열렸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서울이 대한민국 수도로서 오늘날 세계 톱 도시 위상을 갖게 된 것은 서울 혼자만의 힘이 아니었다”며 “제가 농사꾼 부모님의 헌신적 노력으로 서울시장이 됐듯이 지방의 희생과 헌신으로 서울이 이런 위상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그래서 지방에서 취업과 창업을 꿈꾸는 청년들을 돕겠다고 밝혔다. 나는 네번 놀랐다. 첫째, 서울이 지방과의 상생을 고민하고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내놓았다는 데에 놀랐다. 둘째, 이걸 보도한 언론 기사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매우 빈약하다는 데에 놀랐다. 셋째, 나는 이게 박 시장의 큰 업적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들이 비난 일색이라는 데에 놀랐다. 넷째, 관련 기사에 인용된 어느 서울 소재 대학 교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에 놀랐다. “오히려 서울시는 우수한 인재를 서울로 데려오는 등 자체 경쟁력을 높여야 하는데, 서울시민의 세금을 들여 인력을 지방으로 나가게 하는 건 서울시 정책으론 맞지 않는다고 본다.” 나는 모든 의견을 존중한다. 그런 존중심을 갖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았다. 내가 과거 서울시민으로 살 때 나는 지방을 어떻게 생각했던가? 돌이켜 생각해보니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서울을 한국으로 간주하고 살지 않았나 싶다. 그랬던 내가 이젠 지방 시민이 되었다곤 하지만 예전의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어찌 존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체로 정의롭고 양심적인 교수들일지라도 서울에 살게 되면 이런 생각을 하기 십상이다. “이 좁은 국토에서 수도권에 쏠려 있는 게 뭐 그리 큰 문제인지 모르겠다.” “미국이나 중국처럼 땅덩이가 큰 경우 불균형한 발전은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아무리 먼 곳이라도 반나절이면 갈 수 있는 조그만 나라에서 불균형 발전 운운하는 건 옳지 않다.” 서울에 살면서도 ‘지방 소멸’과 그로 인한 국가적 대위기를 걱정하는 마강래 중앙대 교수의 책에 인용된 반응들을 소개한 것이지만, 나 역시 면전에서 자주 들었던 말들이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럼 네가 지방에서 살아봐!”라는 식으로 대꾸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이들은 죽었다 깨나도 지방에서 살 뜻이 없으니 하나 마나 한 말이다. 원초적으로 역지사지의 무능력 상태에 빠져 있는 그들의 속마음은 간단하다. “억울하면 서울에서 살지 누가 지방에서 살라고 등 떠밀었나?” 맞다. 나는 누가 등을 떠밀어서 지방에 살게 된 건 아니다. 억울하면 출세할 일이지, 세상 탓할 일은 아니다. 이런 ‘책임의 개인화’ 현상은 한국인의 완고한 생활문법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 문법을 동원할 때에 꼭 따라붙는 ‘좁은 국토’라는 표현의 정체다. 국토가 크면 불균형 발전이 문제 될 수 있지만, 국토가 작으면 문제 될 게 없다는 이 발상은 도대체 어떤 근거를 갖고 있는 걸까? 정치·경제·사회·문화적 권력과 부가 서울에 집중돼 있어도 어디서건 반나절이면 갈 수 있으니 서울 구경 하는 데에 무슨 문제가 있느냐는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그게 아니라면, 반나절의 거리라도 그게 가장 중요한 취업과 진학에서부터 문화적 기회의 향유에 이르기까지 지방민들의 일상적 삶에 얼마나 큰 장애이며 얼마나 큰 희생과 비용을 요구하는지 몰라서 그러는 걸까? 이건 ‘잔인한 무지’라는 말 이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앞서 나는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들이 비난 일색이라고 했는데, 내가 어이없어 웃음을 터뜨린 건 ‘서울-지방 상생’이 박 시장의 대권 전략이라고 비난하는 댓글들이었다. 한국을 몰라도 이렇게 모를까? 지방으로 놀러만 다니지 마시고 선거 때 지방 나들이 좀 해보시기 바란다. 후보들마다 앞다투어 유능한 인재들을 서울로 더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지방 유권자들은 ‘서울-지방 상생’에 별 관심 없다. 기존 ‘서울공화국’ 체제에 분노하다간 제명에 살기 어렵다는 걸 간파하고 체념의 지혜를 발휘한 지 오래다. 이게 바로 서울 교수들이 ‘좁은 국토’ 운운하면서 서울이 인재를 더 독식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배경, 즉 ‘믿는 구석’일 게다. 나 역시 개인적으론 평온을 위해 체념의 지혜를 적극 실천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직업적 의무에서 서울의 지식인들이 ‘잔인한 무지’에서 탈출하는 게 꼭 필요하다는 말씀은 드리고 싶다. 물론 나 역시 서울에 계속 살았더라면 ‘잔인한 무지’의 포로가 되었을 것이기에 겸허한 자기 성찰의 자세로 드리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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