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칼럼 |
[강준만 칼럼] ‘민원해결 저널리즘’을 위하여 |
지난 4월16일치 <한겨레>에 중요한 기사 하나가 실렸다. 채윤태 기자와 이정규 기자가 행정안전부의 재난연감을 분석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기 전 3년(2011~2013년)에 견줘 세월호 참사 발생 뒤 3년(2015~2017년)의 안전사고가 오히려 늘어났으며, 특히 선박 사고가 증가했다는 걸 밝힌 기사다. 세월호 이후 재난에 대해 엄격해진 사회적 분위기가 통계에 반영됐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간 우리 사회가 더 안전해졌다고 믿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우리는 도대체 그간 무엇을 한 것인가?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정부의 문제는 평소 언론이 잘 지적하고 있으니, 언론의 문제를 살펴보자. 방송기자연합회 저널리즘특별위원회는 언론의 세월호 보도 양상을 가리켜 ‘저널리즘의 침몰’이라고 했는데, 이 ‘침몰’은 비단 한국 언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전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기존 저널리즘 모델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문제의식으로까지 나아갈 필요가 있다.
언론을 일컬어 행정·입법·사법에 이은 ‘제4부’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영국의 보수 사상가이자 정치가인 에드먼드 버크가 1787년에 처음 쓴 말이다. 오늘에 비해 민권의 힘이 약했던 18~19세기, 아니 20세기까지도 언론은 3부의 감시자였고 그래야만 했다. 언론의 사명은 오직 감시와 비판이었다. 3부를 포함해 사회의 어둡고 추한 것들을 찾아내 고발하는 데에 목숨을 걸다시피 했으니, 뉴스는 곧 ‘나쁜 뉴스’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1920년대에 <타임>을 창간해 언론제국을 세운 헨리 루스는 “‘좋은 뉴스’는 뉴스가 아니며 ‘나쁜 뉴스’가 뉴스”라는 정의를 내렸고, 이 정의는 미국을 넘어 전세계의 언론인이 내면화한 가치가 되었다. 이스라엘의 언론학자 타마르 리베스의 표현에 따르자면, 언론은 “규칙보다는 예외를, 규범보다는 일탈을, 질서보다는 무질서를, 조화보다는 불협화음”을 보도하는 걸 사명으로 삼아온 것이다.
그 사명의 실천은 지난 수백년간 민주주의 발전과 언론의 성공에 큰 기여를 했지만, 이젠 세상이 달라졌다. ‘민주주의의 죽음’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기존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왕성한 문제 제기가 이루어지고 있고, 언론은 디지털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존폐의 위기마저 맞고 있다. 어떤 조직이나 기업도 수백년 묵은 원칙을 고수하지는 않는 법이건만, 언론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고하다. 전통을 죽도록 사랑하면서 더 많은, 더 자극적인 ‘나쁜 뉴스’를 생산하는 걸 살길로 여기는 듯하다. 그 대가로 언론 신뢰도의 추락이라는 재앙에 직면했건만, 그 어떤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하지 않는 걸 보면 아예 ‘나쁜 기업’이 되기로 작정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더 이상 이대론 안 된다”며 새로 태어난 저널리즘 모델 중의 하나로 ‘솔루션 저널리즘’이 있다. 이름에서 드러나듯, 솔루션 저널리즘은 “문제는 비명을 지르지만 해법은 속삭인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사회 문제에 대한 해법 위주로 보도를 하는 저널리즘이다. 국내에선 이정환 미디어오늘 대표가 2017년부터 ‘솔루션 저널리즘 전도사’를 자처하며 전파에 앞장서고 있으며, 일부 언론사들이 부분적으로 도입해 실천하고 있는 중이다.
솔루션 저널리즘이 가장 필요한 곳은 지방언론이다. 지방언론은 자주 ‘홀대’ ‘소외’ ‘낙후’를 외치는 ‘나쁜 뉴스’ 생산에 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앙 권력자, 고위 관료, 지역 정치인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좋은 뜻에서 그러는 것이겠지만, 오히려 그런 뉴스가 지역 주민들의 무력감을 키워 ‘지방 소멸’을 부추기는 건 아닌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이미 10여년 전 김주완 경남도민일보 기자는 ‘솔루션 저널리즘’과 비슷한 ‘민원 해결 저널리즘’의 가능성을 제시한 바 있는데, 이게 훨씬 더 나은 방법이 아닐까? 사사로운 민원이 아니라, 공적 성격을 갖는 민원 해결에 지역언론이 앞장섬으로써 생활밀착형 저널리즘을 실천하는 동시에 지역민의 신뢰를 얻어 지역 발전의 동력을 스스로 만들어내자는 것이다.
민원 해결 저널리즘의 실천을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는 언론인들이 신봉하는 ‘나쁜 뉴스’ 종교다. ‘나쁜 뉴스’는 문제만 던져놓고 외면해도 무방하며 그 과정에서 기자들에게 큰소리 뻥뻥 치는 맛을 주지만, ‘민원 해결 뉴스’는 번거롭고 성가시며 좀스럽다는 느낌마저 줄 것이다. 문제 제기는 쉽지만, 문제 해결은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다. 이제 기자들은 기존의 ‘권력자 모델’에서 새로운 ‘봉사자 모델’로 전환할 때가 되었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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