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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3.31 17:42 수정 : 2019.04.01 09:24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신뢰·연대·협동을 할 수 있는 정신적 인프라를 구축하지 않고선 ‘전쟁 같은 삶’에 대해 갖는 집단적 공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그 어떤 긍정적인 변화도 기대하기 어렵다. 당장 성과를 보지 못하더라도 멀리 내다보는 ‘넛지 행정’을 보고 싶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지방자치단체들은 각종 사업, 행사, 이벤트의 기획과 홍보를 어떻게 하고 있을까? 늘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는데, 과거에 비해 크게 발전했다는 점은 인정해도 좋을 것 같다. 그런데 한가지 아쉬운 건 여전히 ‘직설’과 ‘성급함’을 선호한다는 점이다. 달리 말해 ‘넛지’를 위해 공을 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넛지’(nudge)는 ‘팔꿈치로 슬쩍 찌르다’라는 뜻으로, 타인의 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개입을 뜻한다. 넛지는 주창자인 리처드 세일러 미국 시카고대 교수가 2017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음으로써 국제적 공인을 받은 셈이지만, 그 기본 이치는 오래전부터 우리가 일상적 삶에서 실천해온 것이다.

남의 잘못을 지적할 때에 아무리 옳은 말일지라도 직설법으로 말하면 듣는 사람은 반발하기 마련이다. 효과가 있을 리 없다. 요즘 유행하는 속어를 쓰자면 ‘꼰대들의 지적질’이 바로 그런 경우다. 상대의 감정이 상하지 않게끔 우회적으로 부드럽게 말하는 기술, 이게 바로 넛지다.

화장실 소변기에 그려진 파리 한마리 이야기가 넛지의 대표적 사례로 자주 거론되지만, 넛지의 방법론은 무궁무진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다양하다. 국내에선 넛지가 주로 교통 분야에서 디자인 중심으로 활용되고 있지만, 넛지는 모든 행정 분야에 두루 적용할 수 있다.

넛지의 관점에서 보자면, 행정적 계몽 캠페인이 채택하고 있는 언론 모델은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언론은 권력감시와 고발을 주요 임무로 삼기에 늘 사회의 부정적인 면만 부각한다. 이걸 그대로 답습한 계몽 캠페인은 일부 시민들의 부정적인 행태를 지적하면서 그걸 바꿔야 한다고 호소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수많은 연구 결과에 따르면, 그런 방식은 효과가 없거나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른바 ‘사회적 증거’의 원리 때문이다. 이 원리는 옳고 그름에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이 하는 행동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며 그걸 그대로 따라서 하는 경향을 말한다. 그래서 일부 시민들의 부정적인 행태를 강조하는 대신 긍정적 행태를 보이는 시민이 다수임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캠페인을 벌이는 것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온다. 언론도 이젠 ‘사회적 증거’의 부작용을 고려한 ‘넛지 저널리즘’을 고민할 때가 되었다.

이렇듯 넛지는 ‘직설’과 ‘성급함’을 자제하면서 한번 더 깊이 생각해볼 것을 요구한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자. 전국의 많은 지자체들이 인구 늘리기를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인구를 늘릴 수 있을까? 이런 고민 끝에 미혼 남녀들의 결혼을 진작시키기 위해 우선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한 만남 프로그램을 기획했다고 가정해보자. 하지만 이걸 그대로 실천에 옮기는 건 곤란하다. 결혼을 출산의 도구로 보는 천박한 발상이라는 비판에서부터 특정 집단을 위해 세금을 쓰는 건 부당하다는 비판에 이르기까지 욕먹기 십상이다.

반면 넛지로 접근한다면 이런 기획이 가능하다. 지역의 희망인 청년들과 더불어 지역의 문제와 비전을 고민하고 토론하는 마당을 마련하겠다고 널리 알린다. 그 마당을 문화 프로그램으로 기획해 참여율을 높이고, 이후 상시적인 프로그램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행사 운영을 청년들에게 넘기면서 지자체는 후원만 담당한다.

지자체는 그런 간접적인 만남의 장만 제공해주는 것으론 만족할 수 없다고 불평하겠지만, 멀리 내다볼 일이다. 즉각 효과를 보고 싶다는 욕심이 오히려 일을 그르친다. 우선 지역에 서로 모르는 미혼 남녀들이 만나서 접촉할 수 있는 소통의 기회와 공간이 존재하는가부터 살펴볼 일이다. 각종 취미 동아리는 많지만, 이렇다 할 취미가 없거나 끈끈한 관계 맺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은 그곳에 들어가길 꺼린다. 비교적 ‘느슨한 연결’을 원하는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소통의 기회와 공간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혼율을 높이겠다는 속셈을 알리지 않은 채 그런 프로그램을 기획해도 되느냐는 윤리적 문제가 제기되겠지만, 결혼과 출산은 아예 잊는 게 좋다. 그건 청년들이 각자 알아서 할 일이다. 고립된 개인들로만 존재하는 파편화된 공동체를 넘어서는 것은 결혼과 출산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신뢰·연대·협동을 할 수 있는 정신적 인프라를 구축하지 않고선 ‘전쟁 같은 삶’에 대해 갖는 집단적 공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그 어떤 긍정적인 변화도 기대하기 어렵다. 당장 성과를 보지 못하더라도 멀리 내다보면서 ‘큰 그림’을 그리는 ‘넛지 행정’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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