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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1.27 18:00 수정 : 2019.01.28 09:40

우리는 여전히 ‘미꾸라지도 잘 살 수 있는 사회’보다는 ‘용을 지향하는 사회’에 집착한다.
‘모든 노동자의 대기업 노동자화’와 ‘모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라는 목표를 진보적인 것으로 간주하면서 언제 실현될지도 모를 기약 없는 목표에 매달린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삼십년에 삼백년을 산 사람은 어떻게 자기 자신일 수 있을까>. 20여년 전에 출간된 김진경의 책 제목이다. 한국의 놀라운 ‘압축성장’의 명암을 실감나게 표현해준 명언이다. 김진경은 “한국은 60년대 이래 30년 동안에 서구의 300년을 압축해 따라갔다”며 “무서운 속도의 서구 흉내내기 속에서 자신을 돌아본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았고 필요한 일로도 간주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성장은 압축할 수 있지만 성숙은 압축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성장한 만큼 성숙할 수 없었기에 빚어지는 온갖 사회적 문제는 ‘압축성장의 복수’라고 해도 좋겠다. 이 복수의 구체적 사례를 다룬 두 권의 중요한 책이 2013년에 출간됐다. 박철수의 <아파트: 공적 냉소와 사적 정열이 지배하는 사회>와 박인석의 <아파트 한국사회: 단지 공화국에 갇힌 도시와 일상>이다. 나는 이 책들이 ‘압축성장의 복수’를 입증한 동시에 지금도 살아 있는 한국 사회의 작동 방식을 폭로한 탁월한 사회과학서라고 생각한다.

언론은 자주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집단 이기주의와 사회적 약자 차별을 보도하고, 우리는 그런 보도에 혀를 끌끌 찬다. 하지만 “왜 그들이 그렇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은 던지지 않는다. 두 저자는 그 이유를 ‘아파트 단지’ 정책에서 찾는다. 역대 정부들은 매년 초 “올해는 몇만채의 아파트를 공급하겠다”는 발표를 해왔으며, 최근의 3기 신도시 정책 역시 그 방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이런 정책에 대해 박철수는 이렇게 묻는다.

“그런데 정말 정부가 공급한 것인가요? 실제로는 주공이나 아파트 건설업체들이 아파트를 ‘분양’하는 것이었고, 정부는 마치 자신들이 공공주택을 공급하는 것처럼 표현했습니다. 건설업체에 아파트 안에 공원, 놀이터 등 부대 복리시설을 만들게 정해놓으면 복지공간을 정부 돈을 들이지 않고 공급하는 셈이니 정부로선 손 안 대고 코 푸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겁니다.”

이 모든 시설은 아파트 단지 입주자들의 부담이었다. 당연히 주민들은 높은 담을 두르고 타인의 출입을 막았다. 아파트 단지는 철저하게 폐쇄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박인석은 “아파트 단지 담장은 소중한 내 사유재산을 남들이 무단으로 사용하여 내 생활을 교란시키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 나온 안전장치”인데 “이것을 이기주의라고 탓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 탓해야 할 것은 도시 환경과 사회 체제라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역대 정부들이 해온 ‘손 안 대고 코 푸는 것’의 사회적 비용을 뒤늦게 치르고 있다. 역대 정부들은 눈에 보이는 업적을 군사작전 하듯이 속전속결로 해치워 보여주기 위해 공동체 의식, 시민들 간의 신뢰와 협력, 나눔과 돌봄의 문화 등과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자본, 아니 국가의 가장 근본적인 무형 인프라를 희생시키는 일을 해온 셈이다. 가해자가 감춰지는 이런 부정적 결과는 애초에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른바 ‘알고리즘 독재’라는 말을 실감나게 만든다. 주택공급이 시급했던 점을 고려하더라도 속전속결이라는 사회적 알고리즘이 낳은 결과는 참담하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압축성장 전성기의 알고리즘 슬로건이었다. 자식을 용으로 만들기 위한 부모들의 무서울 정도로 헌신적인 교육열은 오늘의 한국을 만든 힘이었다. 그러나 고성장 시대가 끝나면서 이 알고리즘의 각자도생 원리는 용이 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고통과 모욕을 강요하면서 빈부 양극화와 ‘지방 소멸’을 가속화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압축성장의 복수’는 선의일망정 압축성장 시대를 산 사람들의 몸에 각인된 알고리즘에 의해서 계속 이루어지는 비극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미꾸라지도 잘 살 수 있는 사회’보다는 ‘용을 지향하는 사회’에 집착한다. ‘모든 노동자의 대기업 노동자화’와 ‘모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라는 목표를 진보적인 것으로 간주하면서 언제 실현될지도 모를 기약 없는 목표에 매달린다.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박종성 <경향신문> 논설위원이 잘 지적했듯이, 정규직 진입은 ‘사활의 문제’가 되고, “정규직의 성안으로 들어가면 문을 닫아버리고 자신만 살겠다”고 혈안이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런 상황에서 분신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차별에 한이 맺힌 비정규직 노동자는 “우리도 정규직 드나드는 정문 앞에서 데모 한번 하고 싶다”고 절규한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진보는 ‘의자 뺏기 게임’과 ‘희망 고문’으로 전락해가고 있다. 이마저 ‘압축성장의 복수’로 여겨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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