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하향평준화라는 말 자체에 문제가 있다.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는 평등의 방향으로 겨우 한 걸음 다가서는 걸 가리켜 곧장 평등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건 올바른 언어 사용법이 아니다. 공포는 정치의 주식이다.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거나 관철하기 위해 공포를 이용하는 이른바 ‘공포 마케팅’은 정치 언어의 필수다. 선의냐 악의냐를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자신의 반대 세력이 권력을 잡으면 나라가 망한다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이 정말로 그렇게 믿어서 하는 말인지 아니면 단지 권력을 잡고 싶은 욕심에서 하는 말인지를 무슨 수로 감별할 수 있겠는가. 불행 중 다행히도 정치에서의 ‘공포 마케팅’은 큰 힘을 쓰진 못한다.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처럼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엔 ‘상식’처럼 통용되면서 큰 힘을 발휘하는 ‘공포 마케팅’의 소재가 많다. 그런 소재들 중 하나가 바로 ‘하향평준화’라는 주문이다. 이는 마법의 주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널리 애용되고 있다.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다. 하향평준화는 망국의 길이라는 주장이 많다. 평소 애국자가 이렇게 많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향평준화에 단호히 반대하는 어떤 분의 정의에 따르면, 하향평준화는 “내가 못 갖는 건 너도 못 갖는 거고, 니가 갖는 걸 볼 바에야 다 망쳐버리겠다는 못된 심보”다. 좀 거친 정의이긴 하지만, 하향평준화를 이런 주장의 취지와 비슷하게 이해하는 분들이 많다. 그래서 빈부 양극화를 우려하는 진보주의자들마저 그 어떤 해법을 제시하면서 자신의 주장은 결코 하향평준화가 아니라고 강변한다. 자신의 주장이 하향평준화로 비쳤다간 여론전에서 패배하고 말 것이라는 우려 때문일 게다. 심지어 하향평준화는 좌파의 고질적인 병폐라는 주장마저 제기된다. 좌파에 대해 애정 어린 고언을 잘 하는 캐나다의 좌파 철학자 조지프 히스는 “평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하향평준화를 피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때가 많다”며 “하향평준화를 통한 평등 달성은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일갈한다. 히스가 왜 하향평준화에 대한 여론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그는 이 주장에 앞서 “좌파는 의도는 좋지만 성공할 가능성이 없거나 돕고자 하는 수혜자에게 실상 도움이 되지 않는 정책을 만들고 선전하느라 너무나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고 개탄했다. 나 역시 평소 그렇게 생각해왔기에 이 말에 내심 박수를 쳤지만, 하향평준화에 관한 주장엔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캐나다에선 히스의 두 주장이 양립 가능한지 몰라도 한국에선 그렇지 않다. 한국의 진보좌파는 하향평준화를 두려워한다. 정말 두려워하는지, 그렇게 보일까봐 두려워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반대로 상향평준화의 방향으로 가는 신기루를 좇느라 헛발질을 일삼는 경우가 많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심지어 임금 문제에서 상향평준화가 목표라고 주장하는 진보좌파 전문가도 많다. 그런 식으로 어느 세월에 노동자들 간 임금 격차 문제를 해소하느냐고 반문하면 “왜 누군가의 이익이 다른 사람의 손실이 되는 제로섬 사고를 하느냐”고 전형적인 우파 같은 말씀을 하기도 한다. 아니면 ‘노동 대 자본’의 구도를 내세워 재벌 비판으로 문제의 핵심을 비켜간다. 2016년 심삼정 정의당 의원이 법인 임직원의 ‘최고임금’이 최저임금의 30배를 넘지 않도록 하는 ‘최고임금법’ 제정안을 대표발의한 걸 보도한 기사에 달린 댓글 하나가 내 눈길을 끌었다. “벌어들이는 돈을 제한하는 건 공산주의예요.” 65 대 35로 부결되긴 했지만, 2013년 스위스가 기업 내 최고임금이 최저임금의 12배를 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법안을 국민투표에 부친 건 이 나라가 공산주의 국가라서 그랬을까? 서유럽의 여러 나라와 미국의 여러 주에서도 유사한 규제가 추진되고 있는데, 이 나라들 역시 공산주의에 물들어서일까? 하향평준화라는 말 자체에 문제가 있다. 언어와 프레임의 함정이다. 평준화는 평등처럼 애초에 실현 불가능한 목표다. 모두가 모든 면에서 완전히 평등한 세상? 나는 가능하다고 보지도 않지만, 결코 원치도 않는다. 대부분 같은 생각일 게다. 그럼에도 빈부 격차가 너무 심하니 그 차이를 좀 줄이자는 주장과 정책을 ‘공산주의’라고 비판하면 비웃을 사람들이 왜 하향평준화라는 딱지엔 쉽게 속아 넘어가는 걸까?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는 평등의 방향으로 겨우 한 걸음 다가서는 걸 가리켜 곧장 평등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건 올바른 언어 사용법이 아니다. 이 거리의 차이에 대한 입증의 책임은 앞으로 하향평준화라는 말을 쓰는 사람들이 져야 한다.
칼럼 |
[강준만 칼럼] ‘하향평준화’로 겁주는 공포 마케팅 |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하향평준화라는 말 자체에 문제가 있다.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는 평등의 방향으로 겨우 한 걸음 다가서는 걸 가리켜 곧장 평등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건 올바른 언어 사용법이 아니다. 공포는 정치의 주식이다.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거나 관철하기 위해 공포를 이용하는 이른바 ‘공포 마케팅’은 정치 언어의 필수다. 선의냐 악의냐를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자신의 반대 세력이 권력을 잡으면 나라가 망한다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이 정말로 그렇게 믿어서 하는 말인지 아니면 단지 권력을 잡고 싶은 욕심에서 하는 말인지를 무슨 수로 감별할 수 있겠는가. 불행 중 다행히도 정치에서의 ‘공포 마케팅’은 큰 힘을 쓰진 못한다.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처럼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엔 ‘상식’처럼 통용되면서 큰 힘을 발휘하는 ‘공포 마케팅’의 소재가 많다. 그런 소재들 중 하나가 바로 ‘하향평준화’라는 주문이다. 이는 마법의 주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널리 애용되고 있다.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다. 하향평준화는 망국의 길이라는 주장이 많다. 평소 애국자가 이렇게 많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향평준화에 단호히 반대하는 어떤 분의 정의에 따르면, 하향평준화는 “내가 못 갖는 건 너도 못 갖는 거고, 니가 갖는 걸 볼 바에야 다 망쳐버리겠다는 못된 심보”다. 좀 거친 정의이긴 하지만, 하향평준화를 이런 주장의 취지와 비슷하게 이해하는 분들이 많다. 그래서 빈부 양극화를 우려하는 진보주의자들마저 그 어떤 해법을 제시하면서 자신의 주장은 결코 하향평준화가 아니라고 강변한다. 자신의 주장이 하향평준화로 비쳤다간 여론전에서 패배하고 말 것이라는 우려 때문일 게다. 심지어 하향평준화는 좌파의 고질적인 병폐라는 주장마저 제기된다. 좌파에 대해 애정 어린 고언을 잘 하는 캐나다의 좌파 철학자 조지프 히스는 “평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하향평준화를 피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때가 많다”며 “하향평준화를 통한 평등 달성은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일갈한다. 히스가 왜 하향평준화에 대한 여론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그는 이 주장에 앞서 “좌파는 의도는 좋지만 성공할 가능성이 없거나 돕고자 하는 수혜자에게 실상 도움이 되지 않는 정책을 만들고 선전하느라 너무나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고 개탄했다. 나 역시 평소 그렇게 생각해왔기에 이 말에 내심 박수를 쳤지만, 하향평준화에 관한 주장엔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캐나다에선 히스의 두 주장이 양립 가능한지 몰라도 한국에선 그렇지 않다. 한국의 진보좌파는 하향평준화를 두려워한다. 정말 두려워하는지, 그렇게 보일까봐 두려워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반대로 상향평준화의 방향으로 가는 신기루를 좇느라 헛발질을 일삼는 경우가 많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심지어 임금 문제에서 상향평준화가 목표라고 주장하는 진보좌파 전문가도 많다. 그런 식으로 어느 세월에 노동자들 간 임금 격차 문제를 해소하느냐고 반문하면 “왜 누군가의 이익이 다른 사람의 손실이 되는 제로섬 사고를 하느냐”고 전형적인 우파 같은 말씀을 하기도 한다. 아니면 ‘노동 대 자본’의 구도를 내세워 재벌 비판으로 문제의 핵심을 비켜간다. 2016년 심삼정 정의당 의원이 법인 임직원의 ‘최고임금’이 최저임금의 30배를 넘지 않도록 하는 ‘최고임금법’ 제정안을 대표발의한 걸 보도한 기사에 달린 댓글 하나가 내 눈길을 끌었다. “벌어들이는 돈을 제한하는 건 공산주의예요.” 65 대 35로 부결되긴 했지만, 2013년 스위스가 기업 내 최고임금이 최저임금의 12배를 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법안을 국민투표에 부친 건 이 나라가 공산주의 국가라서 그랬을까? 서유럽의 여러 나라와 미국의 여러 주에서도 유사한 규제가 추진되고 있는데, 이 나라들 역시 공산주의에 물들어서일까? 하향평준화라는 말 자체에 문제가 있다. 언어와 프레임의 함정이다. 평준화는 평등처럼 애초에 실현 불가능한 목표다. 모두가 모든 면에서 완전히 평등한 세상? 나는 가능하다고 보지도 않지만, 결코 원치도 않는다. 대부분 같은 생각일 게다. 그럼에도 빈부 격차가 너무 심하니 그 차이를 좀 줄이자는 주장과 정책을 ‘공산주의’라고 비판하면 비웃을 사람들이 왜 하향평준화라는 딱지엔 쉽게 속아 넘어가는 걸까?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는 평등의 방향으로 겨우 한 걸음 다가서는 걸 가리켜 곧장 평등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건 올바른 언어 사용법이 아니다. 이 거리의 차이에 대한 입증의 책임은 앞으로 하향평준화라는 말을 쓰는 사람들이 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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