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언론은 온갖 정치사회적 갈등을 다룰 때조차 흥미성과 자극성을 앞세움으로써 갈등을 오히려 증폭시켰다. 거칠게 말하자면, 논란과 갈등을 키워 팔아먹는 ‘논란 저널리즘’ 또는 ‘갈등 저널리즘’의 수렁에 빠진 것이다. 뉴스를 지배하는 흥미성의 개념을 재정의해볼 것을 제안한다. “어떻게 살인 사건이 신문에 뉴스로 보도될 수 있단 말인가!” 1830년대 미국 신문들이 새로 등장한 ‘페니신문’이 살인 사건을 뉴스로 다루는 것에 분노하면서 외친 말이다. 살인을 비롯한 범죄는 뉴스가 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이 지배하던 시절이었으니 기존 신문들이 경악할 만도 했다. 당시 신문 한 부의 가격은 6페니(센트)였는데 1페니로 가격 파괴를 단행해서 ‘페니신문’으로 불린 새로운 경쟁자들은 기존 신문들이 엘리트 계급을 대상으로 정기구독제를 실시한 것과는 달리 일반 대중을 새로운 독자층으로 삼으면서 가두판매제를 실시했다. 가두판매제에선 신문이 어떤 식으로건 행인들의 시선을 끌어야 팔릴 수 있었기 때문에, 페니신문들은 뉴스 가치와 보도 방식에서 흥미성과 자극성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기존 신문들은 이들의 보도 내용과 방식을 ‘센세이셔널리즘’이라고 비난하면서 ‘도덕 전쟁’을 선포하고 나섰다. 페니신문 발행인들을 부도덕한 인간으로 매도하면서 몸부림쳤지만, 역사는 페니신문의 손을 들어주었다. 오늘날의 저널리즘은 페니신문에 비해 한결 점잖아졌지만, 흥미성과 자극성을 중시한다는 점에선 페니신문의 후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페니신문이 300년간 지속돼온 뉴스의 개념을 혁명적으로 바꾼 지 200년이 가까워 오지만, 뉴스는 여전히 페니신문의 기본 틀을 고수하고 있다. “개가 사람을 물면 뉴스가 아니지만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다”라는 말로 대변되는 특이성과 흥미성이 뉴스의 본질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뉴스관은 언론이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을 수 있는 최고의 무기였기에 민주주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언론은 대중의 관심을 등에 업고 권력의 횡포와 일탈에 용감하게 대적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사회의 온갖 문제를 들춰내고 고발하는 역할도 잘 수행했다. 문제는 민주화 이후 불거지기 시작했다. 언론은 신념과 용기만으로 대처하기 어려워진 온갖 정치사회적 갈등마저 이전 방식으로 다뤘다. 흥미성과 자극성을 앞세움으로써 그런 갈등을 오히려 증폭시켰다. 거칠게 말하자면, 논란과 갈등을 키워 팔아먹는 ‘논란 저널리즘’ 또는 ‘갈등 저널리즘’의 수렁에 빠진 것이다. 많은 언론인과 학자들이 “뉴스, 이대론 안 된다”며 새로운 저널리즘 모델을 제시하고 나선 건 당연한 일이다. 그간 그런 모델들이 적잖이 제시되었지만, 모두 다 흥미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시장의 독재’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1830년대의 저널리즘은 새로운 시장의 발견으로 ‘혁명’이 가능했지만, 오늘날엔 작은 틈새 시장들만 존재할 뿐 또 한 번의 혁명을 뒷받침해줄 큰 시장이 없는 것이다. 언론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의제를 선별해 제시하는 ‘의제 설정’ 기능을 수행하고 있지만, 그 의제의 해결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새로운 큰 사건이 터지면 의제는 순식간에 바뀌기 때문에 지속성도 없다. 세상의 흐름과 변화에 따라 그때그때 대중이 흥미를 느낄 만한 의제들에 집중하다가 흥미성의 ‘단물’이 빠졌다 싶으면 또 다른 의제들로 바람처럼 옮겨간다. 사회 전 분야에 걸쳐 갈등과 싸움은 그치질 않으니, 뉴스의 자원은 무궁무진한 셈이다. 언론은 5년 임기의 정권이 근시안적 정책을 편다고 비판하지만, 그러는 언론은 ‘하루살이’는 아니었는지 돌아볼 일이다. 서울의 부동산 가격 폭등은 어떤가? 이는 지난해 10월 마강래가 <지방도시 살생부>라는 책에서 경고한 ‘지방 소멸’의 문제와 무관한가? 지방 소멸이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서울의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이 아닌가? 언론은 그 책의 출간 때 잠깐 소개하고 넘어간 것 외에 지난 1년간 ‘지방 소멸’이라는 의제를 얼마나 다뤘는가? 언론을 비판하려는 게 아니다. ‘시장의 독재’에 신음하는 언론에 안타까움을 느끼면서 뉴스를 지배하는 흥미성의 개념을 재정의해보자는 제안을 하려는 것이다. 흥미성은 습관의 문제이므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다만 이건 오랜 시간이 필요한 ‘장구한 혁명’이다. 손석희는 하나의 주요 의제를 꾸준히 제기하는 ‘의제 유지’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실천한 바 있는데, 이게 하나의 탈출구가 될 수 있다.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하되, 끈질긴 지속성이 중요하다. 우선 지방 소멸이라는 국가적 재앙을 제1의 의제로 다룰 것을 제안한다.
칼럼 |
[강준만 칼럼] 새로운 ‘뉴스 혁명’을 위하여 |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언론은 온갖 정치사회적 갈등을 다룰 때조차 흥미성과 자극성을 앞세움으로써 갈등을 오히려 증폭시켰다. 거칠게 말하자면, 논란과 갈등을 키워 팔아먹는 ‘논란 저널리즘’ 또는 ‘갈등 저널리즘’의 수렁에 빠진 것이다. 뉴스를 지배하는 흥미성의 개념을 재정의해볼 것을 제안한다. “어떻게 살인 사건이 신문에 뉴스로 보도될 수 있단 말인가!” 1830년대 미국 신문들이 새로 등장한 ‘페니신문’이 살인 사건을 뉴스로 다루는 것에 분노하면서 외친 말이다. 살인을 비롯한 범죄는 뉴스가 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이 지배하던 시절이었으니 기존 신문들이 경악할 만도 했다. 당시 신문 한 부의 가격은 6페니(센트)였는데 1페니로 가격 파괴를 단행해서 ‘페니신문’으로 불린 새로운 경쟁자들은 기존 신문들이 엘리트 계급을 대상으로 정기구독제를 실시한 것과는 달리 일반 대중을 새로운 독자층으로 삼으면서 가두판매제를 실시했다. 가두판매제에선 신문이 어떤 식으로건 행인들의 시선을 끌어야 팔릴 수 있었기 때문에, 페니신문들은 뉴스 가치와 보도 방식에서 흥미성과 자극성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기존 신문들은 이들의 보도 내용과 방식을 ‘센세이셔널리즘’이라고 비난하면서 ‘도덕 전쟁’을 선포하고 나섰다. 페니신문 발행인들을 부도덕한 인간으로 매도하면서 몸부림쳤지만, 역사는 페니신문의 손을 들어주었다. 오늘날의 저널리즘은 페니신문에 비해 한결 점잖아졌지만, 흥미성과 자극성을 중시한다는 점에선 페니신문의 후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페니신문이 300년간 지속돼온 뉴스의 개념을 혁명적으로 바꾼 지 200년이 가까워 오지만, 뉴스는 여전히 페니신문의 기본 틀을 고수하고 있다. “개가 사람을 물면 뉴스가 아니지만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다”라는 말로 대변되는 특이성과 흥미성이 뉴스의 본질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뉴스관은 언론이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을 수 있는 최고의 무기였기에 민주주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언론은 대중의 관심을 등에 업고 권력의 횡포와 일탈에 용감하게 대적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사회의 온갖 문제를 들춰내고 고발하는 역할도 잘 수행했다. 문제는 민주화 이후 불거지기 시작했다. 언론은 신념과 용기만으로 대처하기 어려워진 온갖 정치사회적 갈등마저 이전 방식으로 다뤘다. 흥미성과 자극성을 앞세움으로써 그런 갈등을 오히려 증폭시켰다. 거칠게 말하자면, 논란과 갈등을 키워 팔아먹는 ‘논란 저널리즘’ 또는 ‘갈등 저널리즘’의 수렁에 빠진 것이다. 많은 언론인과 학자들이 “뉴스, 이대론 안 된다”며 새로운 저널리즘 모델을 제시하고 나선 건 당연한 일이다. 그간 그런 모델들이 적잖이 제시되었지만, 모두 다 흥미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시장의 독재’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1830년대의 저널리즘은 새로운 시장의 발견으로 ‘혁명’이 가능했지만, 오늘날엔 작은 틈새 시장들만 존재할 뿐 또 한 번의 혁명을 뒷받침해줄 큰 시장이 없는 것이다. 언론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의제를 선별해 제시하는 ‘의제 설정’ 기능을 수행하고 있지만, 그 의제의 해결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새로운 큰 사건이 터지면 의제는 순식간에 바뀌기 때문에 지속성도 없다. 세상의 흐름과 변화에 따라 그때그때 대중이 흥미를 느낄 만한 의제들에 집중하다가 흥미성의 ‘단물’이 빠졌다 싶으면 또 다른 의제들로 바람처럼 옮겨간다. 사회 전 분야에 걸쳐 갈등과 싸움은 그치질 않으니, 뉴스의 자원은 무궁무진한 셈이다. 언론은 5년 임기의 정권이 근시안적 정책을 편다고 비판하지만, 그러는 언론은 ‘하루살이’는 아니었는지 돌아볼 일이다. 서울의 부동산 가격 폭등은 어떤가? 이는 지난해 10월 마강래가 <지방도시 살생부>라는 책에서 경고한 ‘지방 소멸’의 문제와 무관한가? 지방 소멸이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서울의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이 아닌가? 언론은 그 책의 출간 때 잠깐 소개하고 넘어간 것 외에 지난 1년간 ‘지방 소멸’이라는 의제를 얼마나 다뤘는가? 언론을 비판하려는 게 아니다. ‘시장의 독재’에 신음하는 언론에 안타까움을 느끼면서 뉴스를 지배하는 흥미성의 개념을 재정의해보자는 제안을 하려는 것이다. 흥미성은 습관의 문제이므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다만 이건 오랜 시간이 필요한 ‘장구한 혁명’이다. 손석희는 하나의 주요 의제를 꾸준히 제기하는 ‘의제 유지’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실천한 바 있는데, 이게 하나의 탈출구가 될 수 있다.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하되, 끈질긴 지속성이 중요하다. 우선 지방 소멸이라는 국가적 재앙을 제1의 의제로 다룰 것을 제안한다.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