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8.07.29 20:30 수정 : 2018.07.29 22:15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이제 우리는 추상적으로만 시민참여를 예찬하는 하나 마나 한 말을 그만하고, 다양한 대중 참여를 위한 넛지 방안을 고민할 때가 되었다. 나는 그런 방안 중 하나로 ‘글쓰기’를 제안하고 싶다. “페미니즘이 민주주의를 완성한다”는 구호에 빗대 말하자면, “글쓰기가 민주주의를 완성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전주시민 모두가 펜을 쥐고 글을 쓰는 ‘문학도시 전주’를 만들기 위해 ‘제1회 전주시민문학제 작품 공모전’을 한다. 분야는 운문과 산문, 그림일기(초1~3학년 대상) 등 3개며, 주제는 전주 천년의 역사와 문화 또는 전주팔경과 전주 신(新)팔경, 아름다운 전통문화도시 전주 한옥마을 등 전주에 관한 이야기여야 한다. 3개 부문에 걸쳐 시상금이 1000만원에 달한다.”

최근 <전북일보>에 실린 짤막한 기사다. 내가 사는 전주시 홍보를 위해 소개한 게 아니니 오해 없길 바란다.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이 작은 홍보 기사에 주목한 건 최근 일어난 ‘통학차량 질식사’ 사건 때문이다. 이 비극적인 사건에 충격을 받은 많은 사람이 ‘슬리핑 차일드 체크’ 제도 도입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 제도는 통학차량 맨 뒷자리에 버튼을 설치해 운전자가 시동을 끄기 전 반드시 버튼을 누르도록 하는 것이다.

‘슬리핑 차일드 체크’는 일종의 ‘넛지’(Nudge)다. 넛지는 ‘타인의 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개입’이다. 현금인출기가 처음 나왔을 땐 돈을 찾은 뒤에 카드를 그대로 꽂아두고 가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카드를 먼저 뽑아야만 현금을 꺼낼 수 있게 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는데, 이게 바로 넛지다.

우리는 일상적 삶에서 “조심해라, 주의해라, 신경써라”라는 말을 수없이 듣고 살면서도 그걸 자주 어기는 이상한 동물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인지적 구두쇠’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우리 인간은 인지적으로 많은 자원을 소비하면서 어떤 생각을 깊게 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성향이 있다는 뜻이다. 고정관념이나 편견이야말로 인지적 구두쇠 행위의 대표적인 예다.

넛지의 적용은 우리 생활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지만, 묘하게도 정치 분야만큼은 넛지를 한사코 거부한다. 시민의 참여가 민주주의의 성패를 결정한다는 말은 지겨울 정도로 떠들어대면서도 시민의 참여를 유도하는 개입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참여를 방해하는 개입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전체 인구의 1%도 되지 않는 정열적인 참여자들이 시민 참여를 대표하는 참여의 왜곡 현상이 일어난다.

지방자치의 경우엔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모든 미디어가 뉴스 가치와 흥미성을 앞세워 중앙 정치엔 과잉 관심을 보이는 반면, 지역 정치는 무시한다. 지역 정치와 행정을 다루는 작은 미디어들이 있지만, 이들은 그런 시장논리에 밀려 고사 상태에 놓여 있다. 지난 6·13 지방선거 때 “지방선거에 지방이 없다”거나 “공약 읽은 유권자 1%, 무관심에 지방선거가 죽어가고 있다”는 개탄이 터져 나왔지만, 이는 지방자치 시행 이래로 매번 반복되는 현상이다.

이제 우리는 추상적으로만 시민참여를 예찬하는 하나 마나 한 말을 그만하고, 다양한 대중 참여를 위한 넛지 방안을 고민할 때가 되었다. 나는 그런 방안 중 하나로 ‘글쓰기’를 제안하고 싶다. 때마침 전국에 걸쳐 시민들 사이에서 다양한 유형의 ‘글쓰기 모임’이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크게 환영할 만한 현상이다.

영국에서 산업혁명 초기에 지배계급은 노동자들에게 ‘읽기’만 가르치고 ‘쓰기’는 가르치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그 이유는 간단했다. 노동자는 지시사항을 이해하면 되지, 자신의 생각을 밝히거나 발전시키는 건 위험하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이 민주주의를 완성한다”는 구호에 빗대 말하자면, “글쓰기가 민주주의를 완성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전주시는 ‘전주시민문학제 작품 공모전’을 하고 있지만, 가칭 ‘전주시민 옴부즈맨 작품 공모전’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시민들은 글을 쓰기 위해서라도 전주시의 행정에 관심을 갖게 돼 있다. 글쓰기가 곧 참여가 되는 것이다. 지방자치단체들이 그런 관심을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지만, 꼭 그들이 주최자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

기업들이 사회공헌활동의 일환으로 나설 수도 있고, 각급 학교들이 교육활동으로 추진할 수도 있다. 다 죽어가는 지역 언론이 콘텐츠 확보 수단으로 활용할 수도 있고, 소규모 글쓰기 모임들이 스스로 지역사랑 실천의 차원에서 해볼 수도 있다. 정치에 대한 사랑이 너무도 뜨거워 악플 달기에 열정을 보이는 분들도 작은 글쓰기 모임을 만들어 이런 글쓰기 넛지에 관심을 보인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강준만 칼럼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