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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7.24 18:58 수정 : 2016.07.24 19:13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공적 영역에선 위선이 필요악인 경우가 많다. 17세기 프랑스 작가인 라 로슈푸코가 갈파했듯이, “위선은 악덕이 미덕에 바치는 공물이다.” 개인적 차원에서 저질러지는 위선일지라도 그 위선은 전체 사회가 지켜야 할 도덕적 규범을 강조하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우리가 위선자를 비판하는 이유도 언행일치가 안 된다는 것일 뿐, 그 위선의 메시지 자체를 비판하는 건 아니잖은가.

문명사회일수록 광신보다는 위선이 발달하게 돼 있다. 그런데 문제는 위선이 사회적 매너리즘이나 관행으로 굳어져 오래 지속될 경우 위선의 그런 사회적 효용이 수명을 다하고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위선에 대한 철학적 문제인 동시에 당장 우리 발등에 떨어진 사회적 문제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극심한 차별을 저지르는 사람일지라도 공개적인 자리에선 차별에 반대한다는 말을 한다. 우리는 그것이 문명인다운 예의라고 생각한다. 그런 예의의 제도화가 낳은 결과는 무엇인가? 공적 영역에선 차별에 반대하는 아름다운 언어들이 난무하지만, 온갖 영역에서 차별은 교묘하고 악랄하게 기승을 부리고 있다. 누구나 인정할 게다. 그럼에도 우리는 공개적으론 계속 위선을 떨어야 한다는 상식을 무슨 진리인 양 믿고 있다.

우리가 진정 차별에 반대한다면, 사회적 공인들이 겉으로 내뱉는 말에만 주목할 게 아니라 결과를 봐야 한다. 우리는 어떤 지도자나 고위 공직자가 입으로는 차별에 반대한다고 해놓고 실제로는 자신의 책임하에 있는 조직이 엄청난 차별을 저지르는 것에 분노하지 않는다. “원래, 그런 것 아냐?”라는 식으로 가볍게 넘어간다. 반면 어떤 지도자나 책임자가 차별을 정당화하는 발언을 조금이라도 하면 벌떼같이 들고일어난다. 이거 좀 우습지 않은가? 좀 더 일찍 개입했어야 했던 게 아닌가?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미국 대선에서의 ‘트럼프 현상’은 그런 ‘위선의 게임’의 전복 또는 종언을 의미한다. 처음엔 ‘웃음거리’로 간주되다가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까지 등극한 도널드 트럼프는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모든 종류의 위선에 맹폭격을 가하는 전사로 활약하면서 그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간 기성 언론매체는 문명의 이름으로 이런 전사들을 초전박살하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워왔다. 보수 언론일지라도 전체 공동체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문명적 양식과 상식은 지키는 걸 보도와 논평의 전제로 해왔다. 설사 그것이 위선일지라도 말이다. 그런데 인터넷과 에스엔에스가 주요 정보원이자 사회적 논의의 마당이 되면서 그 방어벽이 해체되고 말았다. 사석에서나 은밀하게 나눌 수 있었던 ‘모욕과 차별의 언어’가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의 확산으로 인해 공공영역의 입주권을 따내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 현상을 비판하고 개탄하기는 쉽다. ‘히틀러’ ‘나치’ ‘파시즘’ 따위의 단어들을 동원해 딱지 붙이기를 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그게 전부라면 그건 ‘트럼프 현상’을 잘못 이해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키워주는 결과를 초래하기 십상이다. 트럼프의 지지자들은 트럼프의 ‘막말’을 일종의 협상카드로 생각하는 반면, 트럼프 반대자들은 트럼프의 막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그 어떤 끔찍한 재앙을 떠올리는 경향이 있다. 재미있지 않은가? 일반적으로 정치인의 말은 액면 그대로 믿는 경우가 거의 없으면서 왜 트럼프의 말은 그대로 받아들이는 걸까?

왜 그럴까? 트럼프를 과대평가하는 걸까, 아니면 과소평가하는 걸까? 나쁜 쪽으론 과대평가하고, 좋은 쪽으론 과소평가한다고 보는 게 옳겠다. 우리는 혐오할 만한 인간이 나타나면 어떻게 해서건 그 인간을 깎아내리는 쪽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게 바로 ‘트럼프 현상’을 키운 자양분이기도 하다.

미국인의 3분의 2는 미국 경제가 부자들을 위해 조작됐다고 여긴다. 10명 중 7명이 엘리트 정치인은 보통사람의 삶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정치의 죽음’을 의미한다. 한국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트럼프가 정치를 죽인 게 아니다. 그는 이미 이루어진 ‘정치의 죽음’이라는 잿더미에서 태어난 것일 뿐이다. 우리에게도 닥친 ‘정치의 죽음’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위선의 종언은 인간 세계에서 실현 불가능한 목표지만, 그 방향으로 애는 써야 한다. ‘트럼프 현상’을 미국에만 머무르게 하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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