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10.25 18:48
수정 : 2015.10.25 18:48
“서면 백산이요, 앉으면 죽산이라.” 1894년 5월1일 전북 부안 백산에 1만1천여명의 동학농민군이 집결했을 때, 농민군이 모두 서면 흰옷 때문에 산이 하얗게 보이고, 앉으면 죽창이 머리 위로 덮여 죽산을 이룬 듯이 보였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동학농민군의 주요 무기였던 죽창이 그로부터 120여년이 지난 오늘날 “죽창 앞에선 모두가 평등하다”는 슬로건으로 되살아났다. ‘지옥 같은 한국’을 고발하는 헬조선닷컴의 메인 페이지에 등장하는 이 슬로건은 일자리 때문에 고통받는 청년들에게 적잖은 공감을 얻고 있다.
반면 일부 기성세대의 반응은 싸늘하다. “일자리가 없어 길거리를 헤매는 젊은이들의 심정이 오죽할까 싶지만 ‘죽창’ 소리에는 가슴에 일던 애틋함까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 “제3세계 국민이 들으면 ‘배부른 소리’라고 코웃음을 칠 황당무계한 헬조선 선동에 휘둘릴 일은 아니다”, “징징대지 마라. 죽을 만큼 아프다면서 밥만 잘 먹더라”, “차라리 죽지 그래”, “북한 가라” 등과 같은 질책과 비아냥이 쏟아진다.
이런 질책과 비아냥의 선의를 이해 못할 바는 아니나, 헬조선과 죽창이라는 단어로 대변되는 청년들의 고통에 대한 진단이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헬조선과 죽창의 파생어로 나온 ‘금수저와 흙수저’라는 비유가 잘 말해주듯이, 문제의 핵심은 ‘공정’이다. 따라서 기성세대가 굶주리던 시절의 경험이나 굶주리는 나라들과 비교해서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고 윽박지르는 건 번지수를 잘못 찾아도 한참 잘못 찾은 것이다.
우리 인간은 공정 감각이 유난히 발달한 동물이다. 그래서 굶주려도 같이 굶주리면 웃으면서 인내할 수 있지만, 배불러도 불공정한 차별을 당하면 분노하며 변화의 가능성이 없으면 절망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돼지가 되라고 말할 뜻이 없다면, “죽창 앞에선 모두가 평등하다”는 슬로건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에 눈을 돌리는 것이 옳다. 동학농민군이 염원했던 ‘신분 차별 없는 세상’이 오늘날엔 실현되지 않았느냐고 반론할 정도로 순진한 사람이 아니라면, ‘죽창’보다는 ‘평등’에 주목하는 것이 올바른 독법이다.
죽창이라는 단어가 섬뜩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비정규직 노동자가 850만명, 최저임금 미만을 받는 노동자가 230만명, 청년 실업자가 100만명에 이르며, 변화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현실이 더욱 섬뜩한 게 아닐까. 더더욱 섬뜩한 건 그건 각자의 능력에 따른 정당한 차별이므로 각자 알아서 노력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믿는 발상이다. 세상은 약육강식의 원칙이 지배하는 정글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많다는 데에 전율을 느껴야 옳지 않겠는가 말이다.
‘위에서 아래로’, ‘서울에서 지방으로’, ‘대기업에서 중소기업으로’ 떨어지는 국물에 의존하는 낙수효과 모델은 반세기 넘게 한국 사회를 지배해왔지만, 고성장 시대의 종언으로 인해 이제 그 수명을 다했다. 그 모델은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불공정 서열주의의 주범이었지만, “개천에서 용 난다”는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인 국민은 그런 서열주의를 감내해왔다. 나와 내 가족이 좀 더 높은 서열에 오르면 된다는 각자도생의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가진 자들의 탐욕보다 더 무서운 건 선량한 보통사람들이 내면화시킨 그런 삶의 방식이다. 죽창은 ‘저항’보다는 ‘자기파괴적’ 모습에 가깝다고 보는 해석은 바로 이런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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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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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세대는 언 발에 오줌 누는 식으로 대응하고 있지만, 청년들은 우리가 어떤 미래로 나아가야 할지 그 답을 알고 있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박성원 박사가 20~34살 청년층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많이 나온 답은 ‘붕괴, 새로운 시작’이었다. 청년들은 서열사회의 붕괴와 공정사회의 시작을 원한다. 극소수의 용보다는 대다수의 개천 미꾸라지들을 위한 세상을 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방향 전환을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기존 모델에 대한 기대와 지지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헬조선과 죽창을 외치게 만드는 온상은 바로 그런 각자도생 욕망이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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