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5.08.23 18:39 수정 : 2015.08.23 18:39

미국의 컴퓨터공학자 로트피 자데는 1965년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전통적인 2진법 논리의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 ‘퍼지 논리’(fuzzy logic)를 개발했다. 퍼지는 ‘애매모호한’이란 뜻인데, 어찌 애매모호한 논리가 가능하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한 과학계는 퍼지 논리를 맹비난하면서 탄압했다. 대학에서 퍼지를 연구하는 사람은 교수가 될 수 없었고, 정부 기관들은 퍼지 연구에 연구비를 한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박해가 오히려 퍼지 연구를 더 튼튼하게 만들었으며, 결국 세상을 바꿔 놓았다. 바트 코스코는 <퍼지식 사고(Fuzzy Thinking)>(1993)란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라는 주장에 새로운 힘을 주었다. 퍼지 논리와 이것을 사용하는 기계는 ‘회색이 좋다’ 그리고 ‘모든 것은 정도의 문제이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우리는 흑과 백의 옛날을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그리워하겠지만, 그들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그리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문사회과학 분야에까지 파급된 퍼지식 사고는 흑백 이분법을 거부하고 회색을 찬양한다. ‘진보’나 ‘보수’의 구분도 흐릿하다고 본다. 진보적인 사람에게도 보수적인 면이 있고 보수적인 사람에게도 진보적인 면이 있다. 어떤 점에서 진보라 하더라도 ‘100% 진보’는 존재하지 않는다. ‘0.9 진보’에서 ‘0.1 진보’에 이르기까지 진보의 속성을 비교적 많이 갖고 있거나 적게 갖고 있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정치는 여전히 퍼지식 사고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대표적인 분야이다. 흑과 백의 옛날을 그리워하는 정도를 넘어서 현재는 물론 미래도 선명한 흑백의 세계일 뿐이라는 자세를 취한다. ‘0.5 진보’나 ‘0.5 보수’에 불과한 집단들마저 ‘정체성’과 ‘선명성’을 아름다운 단어로 여기는 반면, ‘타협’과 ‘절충’을 더러운 단어로 여긴다. 비난받을 만한 ‘야합’이 전혀 없는 건 아니겠지만, 타협을 무조건 야합으로 보려는 충동이 충만하다.

왜 그럴까? 타협이 있을 수 없었던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 시절의 유산인가? 그러나 그 시절에 존재했던 자기희생은 사라지고 없다. 이익 중심으로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한국과 같은 초강력 중앙집중체제에선 다수결에 의한 승자독식을 기반으로 삼는 정치의 속성이 최악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익 배분이 ‘죽느냐 사느냐’라는 이분법에 의해 이뤄지는 곳에서 타협은 하지 않을수록 좋은 것이 되고 만다.

이런 이치를 미국의 사회운동가 사울 알린스키는 이렇게 설명한다. “문제가 극단적으로 나누어져야만 사람들은 행동할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100% 천사의 편에 있으며 그 반대는 100% 악마의 편에 있다고 확신할 때 행동할 것이다. 조직가는 문제들이 이 정도로 양극화되기 전까지는 어떠한 행동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간 한국 정치에서 여야가 첨예하게 맞서 싸웠던 주요 이슈들을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다. 어떤 이슈건 싸우는 양쪽의 정당성 비율은 ‘6 대 4’이거나 ‘7 대 3’ 정도였건만, 양쪽 모두 지지자들의 동원을 위해 ‘10 대 0’의 싸움처럼 선명한 편가르기를 시도하지 않았던가. 즉, 싸움을 시작할 때부터 아예 타협의 가능성을 원천 배제하는 식의 전선을 형성하는 게 버릇이 됐다는 것이다.

그러니 알린스키의 이런 충고가 먹혀들 리 만무하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회는 끊이지 않는 갈등 그 자체이며, 갈등은 간헐적으로 타협에 의해서만 멈추게 된다. 타협이 전혀 없는 사회는 전체주의 사회이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회를 하나의 단어로 정의해야 한다면, 그 단어는 ‘타협’일 것이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타협을 아름다운 단어로 여기기 위해서는 승자독식 체제를 바꿔야 하겠지만, 그걸 바꾸는 일 역시 타협을 필요로 한다. 즉, 타협이 더러운 단어로 전락하게 된 이유를 깨닫고 타협에 대한 생각을 바꾸려는 노력도 필요하다는 뜻이다. “타협은 아름답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강준만 칼럼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