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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5.03 18:41 수정 : 2015.05.03 18:41

“문제는 눈높이라고, 눈높이. 사람들이 자기 주제 파악을 못하고 너도나도 좋은 직장, 좋은 보수만 찾는 게 바로 문제라고. 중소기업이나 지방에 한번 가봐. 공장에서 일할 사람을 못 구해 난리인데, 뭐 일자리가 없다고? 죽을까 봐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다고? 웃기는 소리 하지 마.”

김태형이 2010년에 출간한 <불안증폭사회>에서 “우리는 사람에 대한 놀라운 무지를 드러내는 이런 발언들을 주변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다”며 소개한 말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눈높이를 낮추라는 주문은 주변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서 정부 취업 대책의 골간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학생 취업률로 서열을 결정당하는 전국의 대학에서 줄기차게 외쳐지고 있는 구호다.

인터넷에서 ‘눈높이’를 검색해보면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게 ‘국민 눈높이’이며, 이는 정부와 정치권을 비판할 때에 꼭 등장하는 신성한 근거다. 국민 눈높이는 절대적으로 존중받아야 할 지표이건만, 왜 구직자들의 눈높이는 끊임없이 하향을 요구당하는 걸까? 어차피 눈높이가 너무 높아서 생기는 문제의 책임은 온전히 그 눈을 가진 사람이 질 텐데, 왜 온 사회가 나서서 남의 눈 걱정을 해주는 걸까?

그런 눈 걱정을 많이 해주는 신문 중의 하나인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해 “대졸자들이 취업 눈높이를 더 낮추고 스스로 다양한 취업 루트를 찾아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대학 졸업장이 취업에 아무 쓸모 없는 휴지 조각이 되는 시대를 맞게 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그렇게 말하는 선의는 이해하겠지만, 아무리 봐도 사회 전체를 생각하면서 진단과 처방을 내놓아야 할 언론이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정상근의 <나는 이 세상에 없는 청춘이다>(2011)라는 책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세간의 상식’에 답을 하는 자세를 가져보는 게 어떨까?

“야 웃기지 마, 일단 좋은 기업을 들어가야 해. 솔직히 한 달 100만원 주는 직장이랑, 250만원 주는 직장이랑 얼마나 차이가 나는 줄 알아? 시작부터 좋은 데 가지 않으면 넌 평생 그 바닥에서 썩는다. 거기서 빠져나오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몰라서 그래, 네가.”

이 상식의 핵심은 ‘임금 격차’와 더불어 ‘발전 가능성’ 또는 ‘희망’에 있다. 어느 취업준비생은 “대기업만 고집하지 말고 눈높이를 낮추라는 어른들의 얘기는 ‘폭력’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눈높이를 낮추지 않는 것은 바로 그런 ‘폭력’에 대한 저항은 아닐까?

생각해보자. 한국 대기업의 중소기업 착취는 널리 알려진 비밀이다. 그게 바로 대기업 경쟁력의 근원이기도 하다. 최근 <조선일보>도 잘 지적했듯이,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삼성전자 경쟁력의 핵심 요소 중 하나도 협력업체를 치밀하게 쥐어짜는 갑질이다. 한국의 입장에서 삼성전자는 ‘개천에서 난 용’인데, 그 용 하나 키우자고 개천의 수많은 미꾸라지들이 희생을 당하고 있는 셈이다.

정부는 대기업의 중소기업 착취에 대해 그러지 말라고 말리는 시늉은 하지만 사실상 방관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가끔 공정거래위원회가 대기업의 불공정거래에 과징금 처분을 내리는 게 고작이다. 회사가 휘청할 정도로 과징금 액수가 높으면 대기업들도 착취 관행을 바꾸려는 시도를 해볼 텐데, 착취로 인해 얻는 게 훨씬 많으니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오히려 대기업과 거래하는 걸 영광으로 알라는 식이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국민도 정부의 그런 직무유기와 무능에 무관심하다. 그저 대기업을 밥벌이의 터전으로 삼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을 뿐이다. 우리는 모두 용이 되려고만 할 뿐 개천의 미꾸라지들은 죽든 살든 내팽개쳐 두는 집단적 습속을 갖고 있다. 사실상 전국민적 합의하에 ‘미꾸라지 죽이기’가 일어나는 현실에서 눈높이를 낮추라는 말이 폭력으로 여겨지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아무리 낮은 곳에서라도 해볼 수 있다는 희망은 공정에서 생겨난다. 공정하지 않은 세상에선 한번 매겨진 서열이 평생 간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줘야 한다. 우리 인간은 배불러도 공정하지 않으면 분노하지만, 배고파도 공정하면 인내할 수 있다. 다시 문제는 공정이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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