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5.25 18:50
수정 : 2014.05.25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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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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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쟁이로서 꼭 피해야 할 일 중의 하나가 예전에 썼던 글을 재탕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지난 노무현 정부 때부터 공개적인 지면을 통해 서너번 제기했던 주장을 또 한번 하려고 한다. 공영방송의 세월호 참사 관련 보도로 인한 사회적 갈등의 엄중함 때문이다. 독자들의 너그러운 이해를 바라 마지않는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방송의 공정성 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28년째 계속되고 있다. 그 어느 한 해도 거른 적이 없었다. 방송 노동자들이 도대체 무슨 죄를 졌는가? 이들은 늘 불공정 보도에 대한 비난의 화살을 온몸으로 맞아야 했고, 그런 치욕을 견디다 못해 공정 보도를 외치며 일일이 세기조차 힘들 정도로 수많은 파업을 했다. 많은 노조원들이 구속되거나 해고되기도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로 인해 고통받는 방송 노동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우리는 그간 방송을 정권의 전리품으로 간주하면서 기필코 우리 편이 방송을 장악해야 한다는 식의 편 가르기 싸움을 해왔다. 처음 10년(노태우·김영삼 정부) 개혁·진보 세력은 방송노조의 공정성 확보 투쟁에 뜨거운 지지를 보냈다. 다음 10년(김대중·노무현 정부)은 모든 게 뒤집어졌다. 그간 공정성을 생명처럼 여기던 지식인들은 나를 포함하여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공정성 문제에 대해 입을 닫았다. 자기들이 원하는 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 시절 공정성은 보수파의 신앙이 되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선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다시 역할 교대가 이루어져, 보수파가 침묵하는 가운데 공정성은 개혁·진보파의 신앙이 되었다. 도대체 공정성이란 무엇인가? 그건 당파성인가? 내 맘에 들면 모른 척하고 내 맘에 안 들면 문제 삼아야 하는 그런 것인가? 우리는 언제까지 공정성을 둘러싼 이 지루한 정략 게임을 계속할 것인가?
이런 식의 양비론이 개혁·진보 세력에게 부당한 점이 있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땐 이러지 않았다”는 말에 타당한 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런 자세론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동일한 시스템을 고수했다는 것이 중요하지, 단지 그 동일 시스템의 운영에서 차별성이 있었다는 항변으로 누굴 설득할 수 있겠는가? 우리 편의 투쟁 의지와 반대편의 항전 의지만 키워줄 뿐이다.
이제 국민적 성찰과 합의하에 시스템, 즉 공영방송 사장 선임 방식을 바꿀 때가 되었다. 선진국들의 사례는 들먹일 필요조차 없다. 자신을 고위 공직에 앉혀준 권력자에게 맹목적인 충성으로 보답을 하려는 관행은 문화의 문제이지 제도나 입법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문화마저 넘어설 수 있는 파격적인 대안이 필요하다.
사실상 대통령의 통제하에 놓인 방송을 시민사회에 돌려주자. 가칭 ‘방송의회’를 구성하자. 공영방송사 사장에 대한 인사권을 방송의회에 넘겨주자. 행여 돈 걱정 할 필요는 없다. 방송의회를 구성하는 방송의원은 완전 무보수 명예직이다. 방송의원들은 공영방송사 사장을 선출하는 투표권만 행사하면 된다.
방송의원 규모는 사회 각계를 대표하고 외부 압력과 로비를 거의 무의미한 수준으로 만들 수 있게끔 수천명으로 하자. 선출은 완전 자유경쟁 공모제로 하자. 후보자들은 수천명의 방송의원 앞에서 자신의 비전과 소견을 역설해 본격적인 검증을 받도록 하자.
이 방식에도 문제가 없을 리 없지만, 방송의회 제도는 한국 시민사회의 수준을 반영할 것이다. 그 수준이 낮아 문제가 되는 건 감수하자. 지금 우리가 현 시스템에 대해 분노하는 건 그것이 한국 사회 전반의 수준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고 보기 때문이 아닌가. 방송을 정치권의 대리전쟁터로 만드는 건 우리 모두의 자학이다. 다른 정부 유관기관들도 이런 인사 방식을 원용하자. 이런 식으로 우리 사회의 중립적 영역을 넓혀가지 않는 한 한국은 내부 당파 싸움에 국민적 역량을 소진시켜 주저앉고 말 것이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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