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9.12.27 22:14 수정 : 2009.12.27 22:14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지난 23일 대통령 자문기구인 사회통합위원회가 발족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발족식에서 “서로 신념과 의견, 가치가 달라도 적대감 없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모델을 찾아야 한다”고 했는데, 정말이지 그런 모델을 찾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나는 사회통합이 어려운 정도를 넘어서 아예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비관론에 동의하지 않거나 인상을 찌푸릴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 이유를 들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스스로 사회통합을 망치는 일을 하면서도 사회통합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모순을 줄이는 데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국은 근대화의 후발주자로서 ‘일극 집중도’와 ‘해외의존도’가 매우 높은 조건에서 치열한 내부경쟁으로 경제적 성공을 이룬 나라다. 살인적인 ‘입시전쟁’과 ‘영어전쟁’이 그 어떤 처방을 해도 약화되지 않는 건 그것들이 한국 사회의 구조와 작동방식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극렬한 경쟁에 치를 떨면서도 경쟁만이 한국의 살 길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다. 한국의 진보세력이 정치적으로 정당한 몫을 누리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경쟁에 적대적이거나 비우호적이기 때문이다. 경쟁을 넘어서려는 진보 이념은 아름답긴 하지만, 그것이 한국의 나아갈 길은 아니라고 보는 게 다수 민심임을 어찌 부정할 수 있으랴.

냉엄한 국제사회에서 살아남고 번영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하더라도 안에선 다른 행동양식을 취할 수 있지 않을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부분은 전체와 비슷한 구조로 되풀이되는 구조를 갖는다”는 ‘프랙털 법칙’ 때문이다. 지방이 서울패권주의를 비난하면서도 각 지역에선 가장 큰 도시가 서울과 똑같은 패권주의를 행사하는 것도 바로 그런 법칙 때문이 아니겠는가.

경쟁과 통합은 양립하기 어렵다. 경쟁이 연고주의나 패거리주의 같은 전근대적 관행을 근거로 삼을 때 통합은 아예 불가능해진다. 패거리를 중심으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투쟁을 곧잘 이념투쟁이나 지역투쟁으로 착각하지만, 그 실체는 이익투쟁이다. 서로 비슷한 것 같지만, 원인과 결과를 혼동해선 안 된다. 원인은 ‘이익’이고 ‘이념·지역’은 결과일 뿐이다.

정권이 바뀌면 기존 이익·이권 구도가 뒤집어진다. 모든 지방자치단체는 물론 각종 공적기관에서도 우두머리의 교체에 따라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한국인들이 정치에 침을 뱉으면서도 늘 정치에 목숨을 거는 삶을 사는 이유다. 그 누구도 자신이 이익투쟁을 한다고 말하진 않는다. 이익은 늘 이념과 명분으로 포장된다. 그 포장을 중심으로 해법을 찾아봐야 답이 나올 리 없다.

결국 이익 배분의 공정화·투명화가 해법인 셈인데, 이걸 가로막는 게 껍데기일 뿐인 이념과 명분이다. 코드가 맞는 사람들끼리 일을 해야 잘할 수 있다는 이유로 같은 패거리의 ‘승자독식주의’가 당당하게 저질러진다. 권력을 가진 자와 같은 학교를 나왔거나 같은 교회에 다니거나 같은 모임에서 몇번 만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이들이 탐을 내는 공직을 하나씩 꿰차는 일이 벌어진다. 그래 놓고선 ‘통합’을 하자고 외침으로써 그런 ‘뜯어먹기 잔치판’에서 소외된 이들의 분노에 불을 지른다.


공직은 봉사인데 너무 냉소적으로 보는 게 아닌가? 보수·진보의 구분도 없이 모두 싸잡아 이익투쟁의 전사로 간주해도 되는가? 이렇게 화를 내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화내라고 쓴 글이다. 이념·명분보다 이익·이권이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기본 동력이라는 걸 전제해야 사회통합에 한 걸음이나마 다가설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강준만 칼럼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