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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11.15 21:23 수정 : 2009.11.15 21:23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이 대통령 ‘세종시 수정’ 왜 밀어붙이나”(<한겨레> 11월6일치 1면) 머리기사가 제기한 질문이다. 이 기사는 이한구 한나라당 의원이 기자들에게 한 말을 소개하는 걸로 시작하고 있다. “대체 무슨 목적으로 저러는지 도저히 모르겠다.” 그렇다. 정말 궁금하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그간 이 대통령이 직간접적으로 밝힌 ‘세종시 수정’의 이유와 목적은 오직 한 가지다.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한 애국충정이다. 그런데 세종시 원안 추진을 여러 차례 약속했을 땐 그 사업의 심각한 문제점을 몰랐던 걸까? 가볍게 약속한 것도 아니고 ‘혼신의 노력’으로 ‘반드시’ 해내겠다고 한 약속이 아닌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사람들을 겨냥해 ‘그런 걱정 안 해도’ 된다고까지 다짐하지 않았던가.

아무래도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다. 1994년 어느 대기업이 내보낸 다음과 같은 광고 문안에 그 답이 있는 건 아닐까. “엘리샤 그레이, 그레이엄 벨보다 한 시간 늦게 전화 발명에 성공/ 하지만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

어떤 일에서건 ‘최초’ 또는 ‘원조’가 되는 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정치 지도자의 경우엔 그것이 바로 자신의 존재 근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이 새 시대를 여는 원조로 기록되고 싶어 하는 지도자들의 야망 경쟁은 한국 정치의 익숙한 모습이다.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라는 딱지가 그런 야망을 웅변해준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때 그 어떤 딱지도 내세우지 않기로 했었다. 그래서 잘하는 일이라고 박수를 치는 사람들이 많았다.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라는 딱지는 나름의 근거들이 있긴 하지만, 그건 국민이 알아서 평가할 몫이지 정부 스스로 내세우고 뻐길 일은 아니잖은가. 실제로 세 정부가 공통적으로 보인 독선과 오만엔 그런 ‘원조 콤플렉스’가 적잖이 작용했다고 보는 게 옳으리라.

그런데 곧 박수를 칠 일은 아니라는 게 드러났다. 이명박 정부는 건국 60돌인 2008년을 ‘선진화 원년’으로 선포하는 것으로 치고 나왔다. ‘선진화 원년’이라니, 그 이전엔 선진화 시도가 없었단 말인가. 이런 ‘원조 콤플렉스’의 관점에서 보자면 ‘세종시 수정’은 쉽게 이해가 가는 일이다. 속된 말로, 세종시 사업은 남는 장사가 아니다. 아무런 생색도 낼 수 없고, 남이 먹은 밥상을 설거지하는 꼴이다. 거기 쓸 돈이 있으면 ‘원조’를 주장할 수 있는 ‘4대강 사업’에 쓰는 게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된 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세종시’를 ‘이명박시’로 바꿔 원안대로 추진하는 게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원조 콤플렉스’와 무관한 일부 지식인들은 왜 성명을 발표하고 기자회견을 해가면서까지 세종시 사업을 적극 반대하고 나서는가? 이들의 주장을 잘 뜯어보기 바란다. 시종일관 ‘효율’을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 자체는 논리적이지만, 이들은 현 ‘서울 1극 체제’의 비효율에 대해선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이들은 무지하거나 아니면 여전히 ‘1극 집적의 효율’을 신봉하는 ‘사회진화론적 국가주의자’들이다.

박정희 시절의 개발독재는 찬반 논란의 소지나 있지만, 이들은 세상이 크게 달라진 오늘에도 그때의 발전 모델에 중독돼 있다. 이들이 세종시 원안 추진을 주장한 박근혜를 ‘포퓰리스트’ 운운하며 비난하는 건 그들이 박근혜의 진화 속도를 전혀 따르지 못하고 있다는 걸 스스로 폭로할 뿐이다. 언어 감각마저 퇴화된 걸까? 정치인이 국민에게 한 약속을 지키는 게 포퓰리즘이라니, 이렇게까지 말을 타락시켜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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