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5.31 21:48
수정 : 2009.05.31 21:48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
인류 역사상 가장 부유한 75인의 명단엔 19세기 중반에 태어난 미국인이 14명이나 들어 있다. 우리도 이름을 잘 아는 존 데이비슨 록펠러, 앤드루 카네기, 존 피어폰트 모건 등 14명 모두 1830년대에 출생했다. 왜 그럴까? 1860년대와 1870년대에 미국 경제가 역사상 가장 큰 변화를 겪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시기에 철도가 건설되기 시작했고 월스트리트가 태어났으며, 전통적인 경제를 지배하던 규칙이 무너지고 새로운 규칙이 만들어졌다. 만약 누군가가 1840년대 후반에 태어났다면 그는 이 시기의 이점을 누리기엔 너무 어리고, 반대로 1820년대에 태어났다면 너무 나이가 많다.
개인컴퓨터 혁명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해는 1975년이다. 이 혁명의 수혜자가 되려면 1950년대 중반에 태어나 이십대 초반에 이른 사람이 가장 이상적이다. 실제로 미국 정보통신 혁명을 이끈 거물들은 거의 대부분 그 시기에 태어났다.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에릭 슈밋 등은 1955년생이며 다른 거물들도 1953년에서 1956년 사이에 태어났다.
미국 저널리스트 맬컴 글래드웰이 쓴 <아웃라이어>에 나오는 이야기다. 각 분야에서 큰 성공을 거둔 이들은 탁월한 재능이 아니라 그들이 누린 특별한 기회 때문에 성공했다는 게 글래드웰의 논지다. 당연한 이야기인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우리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다.
특별한 기회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세대론의 가치를 부각시킨다. 과거 한국 정치권에 4·19 세대와 6·3 세대가 많았던 건 4·19 혁명과 6·3 사태라고 하는 역사적 기회 때문이다. 386 세대는 5·18 광주민주항쟁의 자식들이다. 이제 우리는 ‘88만원 세대’가 당면한 고통스러운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
한국처럼 이념과 정치가 과잉인 사회에서는 세대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정권이다. 한국은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에 따라 바다가 갈라지듯 편이 갈라져 정부 관련 일에 대한 접근 기회가 완전히 박탈당하거나 무한정 풍성해지는 사회다. 그런 접근 기회는 보통사람들이나 비판을 업으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무용지물이지만, 정부의 힘을 필요로 하는 공적 사업을 벌여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겐 절대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물론 공적 사업에 대한 열망이 출세욕일 수도 있지만, 그 둘 사이의 경계가 명확한 건 아니다.
사람에 따라선 공적 사업에 자신의 모든 걸 걸기도 한다. 그걸 ‘메시아 콤플렉스’라 부르건 그 무엇이라 부르건, 우리 사회의 진보는 그런 사람들의 덕을 꽤 보았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60대 중반의 사람에게 5년이라는 세월은 결코 짧지 않다. 적어도 심리적으로 자신의 모든 걸 걸어온 열망과 꿈이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다는 강박을 갖게 하기엔 충분하다.
정권 비판에 늘 접근 기회가 박탈당한 것에 분노하는 사람들의 원한과 저주가 끼어드는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 보수 인사들이 발산한 원한과 저주를 기억하시는가? 그들의 처지만 놓고 본다면, 그들이 ‘잃어버린 10년’을 외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지금 이명박 정권이 형편없이 망가지고 있는 건 그 세월에 대한 복수욕을 앞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의 ‘황석영 변절’ 논란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겪으면서 해본 생각이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편가르기’와 그에 따른 ‘승자독식주의’는 한국 정치가 필요 이상으로 살벌한 이전투구로 전락하는 주요 이유가 아닌가. 현 정권 사람들이 복수욕과 탐욕의 수렁에서 탈출해 진정으로 국민 화합을 이루는 길이 무엇인지 고뇌하길 바란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