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식량위기 농업을 다시 본다
카자흐, 밀에 관세부과 ‘수출억제’ 시작
타이·인도 등도 가세 ‘카르텔’ 조짐마저
카자흐스탄의 수도 아스타나에서 시작된 ‘나비의 날갯짓’은 하룻만에 지구 반대편에 거센 태풍으로 몰아쳤다. 지난 2월25일 흐메트 잔 예시모프 카자흐 농림부장관은 “3월1일부터 카자흐산 수출 밀에 (추가)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했다. 하루 뒤, 세계 곡물 거래의 중심인 미국 시카고상품거래소(CBOT)에서 밀 가격은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이날 5월 인도분 밀 1부셸(27.2㎏)의 선물 가격은 전날 대비 8%포인트(90센트) 오른 12.145달러를 기록했다. 세계 3~4위의 밀 수출국인 카자흐의 관세 수출 ‘억제’는 공급 부족에 대한 국제 곡물시장의 우려를 낳으면서 수십억 명의 주식인 밀 가격의 폭등으로 번졌다.
카자흐의 밀 수출 중단은 오는 9월1일까지 지속된다. 전세계 농작물 주요 수출국들이 세계 곡물시장의 수요 공급 불균형과 가격 폭등 속에서 자국의 안정적 식량 공급을 위해 곳간에 빗장을 걸고 나섰다.
연 1천만t의 밀을 수출하면서 카자흐와 순위를 다투던 러시아는 지난해 12월 밀 수출 관세를 한 번에 네 배나 올렸다. 사실상 바깥으로 나가는 문을 걸어 잠근 것이다. 세계 8번째로 많은 밀을 수출하는 우크라이나는 연초부터 지난 달까지 밀 수출량을 120만t으로 한정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최근 “세계 곡물가격 상승은 여러 나라들이 새로운 수출 장벽을 만들도록 부추기고 있다”며, 이를 ‘신내셔널리즘’의 한 현상으로 설명했다.
타이에 이어 세계 2위의 쌀 수출국 인도는 지난해 10월 가장 비싼 품종인 바스마티를 제외한 쌀 수출을 처음으로 금지했다. 이어, 중국·베트남·인도네시아 등 10여 나라들이 뒤를 따랐다. 가장 최근으로는 지난달 12일, 아프리카 서안의 라이베리아가 곡물수출 중단 국가 대열에 합류했다.
|
카자흐스탄 딸디꼬르간의 밀가루 공장에서 지난 5월7일 한 직원이 밀가루 포대를 옮기고 있다. 딸디꼬르간/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
‘곡물 내셔널리즘’은 어느덧 단일 국가 경계를 넘어 곡물 수출국끼리 ‘카르텔’의 형태로 나타날 기미마저 보이고 있다. 사막 순다라웻 타이 총리는 지난 4월30일 “(쌀 수출) 가격을 정하기 위해 타이·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미얀마(버마)를 포함하는 쌀 수출국들의 카르텔 결성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연간 950만t의 쌀을 수출하는 세계 1위의 쌀 수출국 타이를 비롯해 ‘메콩강 5국’의 카르텔 결성 시도는 ‘오렉’(OREC)으로 불렸다. 석유 생산·가격 통제기구인 석유수출국기구(오렉)의 영문 약자 ‘OPEC’ 가운데 ‘Petroleum’(석유)의 머릿글자 P를, ‘Rice’(쌀)의 머릿글자 R로 바꾼 조합이다.
타이산 수출용 쌀은 연 초 t당 512달러이던 게, 4월30일 공급 불안이 겹치면서 998달러를 기록했다. 타이에서 가장 많은 쌀을 수입하는 필리핀의 여당 대표 프란시스 판길리난은 “인도주의적인 정신을 갖고 한 번 더 생각해 보라”며 “오렉은 빈곤과 기아를 심화시킬 것”이라고 비난했다. 카르텔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가 커지자, 쌀 수출국들은 1주일 만에 오렉 출범을 포기했다. 하지만 언제고 다시 불붙을 가능성이 사라진 건 아니다.
곡물 수출국들이 문을 걸어잠그면서 내거는 이유는 자국의 물가 안정이다. 하지만 한편에선 공급량을 조절해 더 높은 가격에 팔려 한다는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분명한 건 지구촌 곳곳에서 하루 1달러 미만의 수입으로 생활하는 11억명의 빈곤층에게 밀값과 쌀값 급등은 거대한 재난이다.
곡물 수출국들이 잇따라 문턱을 높이자, 국제기구들의 우려와 경고의 목소리 또한 높아졌다. 현재 우루과이라운드(UR) 협정에 따라 원칙적으로 곡물 수입을 막지 못하도록 한 것처럼, 곡물 수출장벽 또한 세울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마저 나오고 있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은 세계식량 정상회의 개막연설에서 일부 식량 수출국의 수출 금지 조처와 관련해 “시장을 왜곡하고 가격을 더욱 상승시킬 뿐”이라고 밝혔다.
알마티/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
도슴베코브 프느슈바이 도슴베코비치(사진)
|
“내수 부족해 밀수출 통제”
카자흐 알마티주 농업담당 부지사
세계 곳곳에 연 1천만t 안팎의 밀을 수출하는 카자흐스탄이 지난 4월부터 오는 9월까지 수출을 잠정 중단했다. 식량 위기를 겪는 나라들이 돈을 들고 줄을 서도, 밀 한 톨 살 수 없게 됐다. 올 초 카자흐산 밀 가격은 지난 1년 사이 두 배 이상 오른 t당 400달러에 거래된다.
세계에서 9번째로 큰 카자흐스탄에서 농업은 국내총생산(GDP)의 10% 이상(한국의 경우 3.5%), 고용에서는 전체의 20% 이상을 차지할 만큼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카자흐 알마티주 농업담당 부지사인 도슴베코브 프느슈바이 도슴베코비치(사진)는 <한겨레>에 “올해 (수출 허용기간 동안) 밀 수출량은 최소 800만~1500만t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카자흐는 왜 밀 수출을 중단했을까? 도슴베코비치는 밀 수출 중단과 관련해 “지난 1년 사이 국내 빵 가격은 50%, 밀가루 가격은 갑절로 뛰었다”며 “지나친 수출로 내수용 밀이 부족해져 식량 가격이 상승했다는 판단에 따라 수출 통제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하지만 자국의 밀 제분 생산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라며 밀가루 수출은 허용했다.
카자흐는 지난해 아제르바이잔에 88만6천t의 밀을 수출한 것을 비롯해, 45개국에 밀을 수출했다. 올 들어서 방글라데시와 탄자니아가 카자흐의 새로운 밀 수입국으로 이름을 올렸다.
딸디꼬르간/ 류이근 기자
“수입 의존하다 발등 찍혀” 자급정책 선회 세계1위 쌀수입국 필리핀은
|
필리핀 로스바뇨스 국제미작연구소 안 쌀 경작지에서 지난달 3일 노동자들이 표본으로 사용될 모를 심고 있다. 로스바뇨스/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
지난 5월2일 마카파갈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은 수도 마닐라에서 차로 2시간 떨어진 국제미작연구소(IRRI)를 방문했다. 대통령의 ‘이례적’인 이날 방문은 필리핀의 다급한 식량 사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세계 1위의 쌀 수입국 필리핀은 국제 쌀 가격 급등으로 9천만명의 인구 가운데 약 35%가 고통받고 있다. 불과 몇 달 사이 쌀 수입 가격은 3배 가까이 뛴 t당 1천달러까지 치솟았다. 올해 270만t의 쌀을 수입해야 하는 필리핀은 1년 사이 수십배가 불어난 10억 달러를 쌀 수입 및 판매 보조금에 지출해야 할 형편이다.
마침내 아로요 대통령이 국제미작연구소를 방문해, 연구소와 필리핀 정부간 쌀 생산량 증대를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한 것은 2010년까지 쌀 자급률 100%를 달성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의 일환이다. 아로요는 비료 지원·관계수로·농업 교육·농민 대출·기초 투자 등 쌀 자급화 정책에 모두 8억6천만 달러를 투자할 계획이다. 필리핀도 한때 쌀 수출국이었다. 페르디난드 에드랄린 마르코스 대통령 시절인 1977~1983년 쌀을 100% 자급하고 남는 20만~30만t을 해외로 수출했다. 하지만 1994년 이후 쌀 수입국으로 굳어지면서 지금까지 한 해 많게는 217만t을 수입했다. 최근 주곡인 쌀 자급률은 90% 안팎이다. 쌀 자급화 정책을 설계한 레오카디오 세바스티안 필리핀 쌀 연구소장은 <한겨레>에 “마르코스 대통령 이후 국제 쌀 가격이 아주 낮아졌다”며 “쌀을 수입하는 게 필리핀에서 생산하는 것보다 싸다보니, 타이와 베트남에 쌀을 의존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필리핀에서는 빠르게 산업화, 도시화하면서 해마다 9천ha의 농지가 사라졌다.
세바스티안은 타이와 베트남에 쌀을 의존해 오던 필리핀이 자급 정책으로 선회한 배경을 아주 짧게 말했다. “쌀을 수입에 의존하는 건 너무도 위험했다.”
로스바뇨스/ 류이근 기자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