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찾아서-7회 해방과 귀국 그리고 대구 정착
해방 소식에 하얼빈에서 두만강 건너
평양 적산가옥 얻어 1년남짓 피난살이
경마장 말 사료 콩비지로 식구들 연명
소학교 입학 ‘김일성 장군 노래’ 배워
1948년 4월 평양 쑥섬 남북연석회의
미군정·이승만 ‘5·10총선거’ 강행
남한단독 정부 수립즈음 38선 넘어
개성 피난민수용소에서 천연두 걸려
대구 대명동 정착 남산소학교 재입학
길거리 사과·군밤 팔아 생계 돕기도
3학년때 ‘6·25’ 미군 폭격 소리 ‘생생’
“주검행렬 보며 ‘평화병’ 더 깊어졌다”
‘승리하지 못한’ 미국 ‘한국동란’ 표현
베트남전 패배 뒤에야 ‘한국전쟁’으로
1945년 8월 15일! 하얼빈에도 해방의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자 만주에 거주하던 수많은 조선인들이 귀국길에 오르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 여덟 식구도 귀국길에 올랐다. 하얼빈에서 두만강 쪽으로 내려와 강을 건넜다. 그 시절 두만강을 왕복하는 중국 상인들의 배를 타고서 건넜다. 그 다음엔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향했다. 기차에 탑승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지붕에까지 빼곡히 올라탔다. 그런데 기차가 터널에 진입할 때 지붕에서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렸다. 기차가 터널에서 빠져나오니 이내 정적이 흘렀다. 모두 죽었기 때문이다.
평양에 도착하자 부모님은 일본인들이 살다 두고 간 적산집을 얻었다. 할머님을 포함한 여덟 식구가 평양의 피난민 수용소에서 머무는 것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숙식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던 피난민 수용소 대신 적산집을 선택했던 까닭에 끼니를 스스로 해결해야만 했다. 어머님은 품팔이를 나섰다. 아버님은 대구에 우리 가족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홀로 먼저 떠났다. 나는 형과 함께 날마다 평양 경마장에 가서 말 사료로 쓰는 콩비지를 구입했다. 하도 자주 가니까 어느날 경마장 직원이 내게 말을 몇 마리나 키우느냐고 물었다. 나는 집안 사정을 솔직하게 말하기 싫어서 두어 마리 키운다고 둘러댔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1년 넘게 콩비지만 먹고 살았다. 나는 쌀밥의 맛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았다. 땔감은 경마장의 썩은 말뚝을 캐서 충당했다. 경마장에 박힌 말뚝은 오래되면 썩지만 땅에 묻힌 부분은 썩지 않는다. 나는 형과 함께 말뚝을 삽으로 캐서 말린 다음 땔감으로 썼다.
나는 일곱 살이 되던 해인 1946년 평양소학교 1학년에 다시 입학했다. 학교에 가니 노래를 대단히 많이 가르쳤다. 그런데 그 노래는 모두 김일성을 찬양하는 노래였다. 예컨대 나는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으로 시작하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자연스럽게 부르면서 평양 거리를 거닐곤 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내 또래의 아이들은 모두 그랬다. 이런 현상은 1946년즈음 이미 북한에서 김일성의 절대적 위상이 확립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줬다. 김일성 반대파는 모두 중국으로 망명했다. 여러 정치 지도자가 치열하게 각축했던 남한과 크게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1945년 미국과 소련은 일본의 항복을 공동으로 접수하기 위해 38선을 획정했다. 미국 쪽에서 38선 획정 작업 실무를 맡았던 딘 러스크가 나와 같은 조지아대 교수로 일했던 덕분에 나는 직접 확인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소련은 미국과 달리 한반도에 대한 영토적 야심이 적었고, 북한의 신탁통치에 대해서도 소극적 태도를 보여주었다. 러스크는 만약 그때 미국이 38선 대신 원산과 평양을 잇는 선으로 획정했더라도 소련은 수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러스크는 38선 획정을 잠정적 조치로 이해했으며, 이후 이처럼 장기간 지속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러스크의 얘기로부터 추론해 보면 미국은 처음부터 한반도에 분명한 전략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다. 미국이 소련과 달리 남한에서 신탁통치를 철저하게 이행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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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11일 미군 장교 딘 러스크와 찰스 본스틸이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벽걸이 지도에 그어 놓은 한반도의 38°선. 1980년대 미국 조지아대 교수시절 러스크는 박한식 교수에게 ‘이처럼 오랜 분단선이 될 줄 미처 몰랐다’고 증언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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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한반도 분단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우선 남한에서 준비 중인 1948년의 5·10 총선거를 막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1948년 4월19일부터 24일까지 평양 대동강의 쑥섬에서 이른바 ‘쑥섬협의회’(남북연석회의)를 열었다. 남한에서 김구, 김규식 등이 참석했고, 이승만은 불참했다. 김일성은 김구와 김규식을 5·10 선거를 저지할 능력을 가진 남한의 대표자로 예상했다. 그러나 김구와 김규식은 김일성에게 자기들은 그런 능력을 가진 대표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또한 김일성은 미국과 이승만의 은밀한 커넥션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결국 쑥섬협의회는 결렬되었고, 한반도는 분단의 길을 걷게 되었다.
우리 가족은 1948년 녹음이 무성한 여름철을 택해서 38선을 넘었다. 38선에는 미군이 보초를 서고 있었는데, 녹음이 무성해야만 몸을 숨기기가 쉬웠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보초가 왕복하는 시간을 치밀하게 계산했다. 우리는 눈 앞에서 보초가 사라지자마자 38선을 넘는 전략을 세웠다. 거동이 불편한 할머님까지 모시고 사력을 다해 달렸다.
우리는 38선을 넘어 개성의 피난민 수용소로 갔다. 그때 개성은 38선 이남에 위치해서 남쪽에 속했다. 훗날 한국전쟁 휴전선이 개성 밑으로 그어지면서 북쪽에 속하게 됐다. 개성 피난민 수용소에서 두어 달 동안 머물렀다. 그곳의 위생 상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천연두에 걸렸다. 몸이 몹시 가려웠는데, 긁으면 ‘곰보’가 된다고 그래서 긁지도 못했다. 비가 오는 날 발가벗고서 고개를 들고 처량하게 비를 맞았던 기억이 난다. 비를 맞으면 가려움증이 좀 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콧잔등에는 그 때 생긴 곰보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뒤 대구에 내려와서는 대명동에 정착했다. 아버지가 마련해둔 방 한 칸짜리 셋집에서 여덟 식구가 살았다. 나는 1948년 대구 남산초등학교 1학년에 또다시 입학했다. 아홉 살 때였다. 학교에서 공부가 끝나면 길거리에 나가서 사과도 팔고 군밤도 팔았다. 그처럼 어려운 생활을 하는 와중에 할머님께서 치매에 걸리셨다. 할머님을 간병할 수 있는 방을 마련하기 위해 수창동으로 이사를 해서 방 두 칸짜리 집을 얻었다. 그런데 대명동에서 수창동까지 가는 거리는 대단히 멀었다. 그래서 나는 수창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고 싶었다. 그러나 남산초등학교의 반대로 전학을 할 수 없었다. 나처럼 총명하고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학교의 명예를 위해 놓아줄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나는 할 수 없이 성인용 중고 자전거를 구입했다. 책가방은 자전거 뒤에 싣고, 한 손은 자전거 핸들을 잡고, 다른 한 손의 겨드랑이로 자전거 안장을 감싸고, 한쪽 발을 자전거 옆구리로 집어넣어 자전거 페달을 밞았다. 몸이 무척 약했던 내가 그 먼 길을 성인용 자전거로 통학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지각도 참 많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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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식 교수 가족은 1948년 여름 38선을 몰래 넘어와 개성의 피난민수용소에서 두어달 머물렸다. 해방 이후 개성에는 북한·만주·동중국 일대에서 38선을 넘어온 귀환동포들을 위한 임시 거처가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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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초등학교 5학년 때로 기억한다. 그때는 한 반에 나이 차이가 많은 아이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그 중에 나이 많은 깡패 두목이 하나 있었다. 그 녀석은 항시 점심 시간에 친구들의 도시락 뚜껑을 강제로 열게 해서는 맛있는 반찬을 모두 집어가 버렸다. 내 도시락의 삶은 계란도 집어간 적이 있었다. 또 겨울에 도시락을 난로에 올려놓고 따뜻하게 데울 때면 언제나 새치기해서 자기 것을 맨 아래에 끼워 넣었다. 나는 그 녀석이 너무도 얄미웠다. 그러나 내가 워낙 약골이라 정면으로 싸울 수도 없었다. 우리 반에서 누구도 그 녀석에게 대들지를 못했다. 나는 머리를 굴렸다. 며칠동안 학교 수업이 끝나면 그 녀석의 뒤를 밟으면서 동선을 파악했다. 그 녀석이 친구들과 헤어져서 혼자 남는 지점도 파악했다. 하루는 야구 방망이를 들고서 그 지점 근처에서 매복했다. 마침내 그 녀석이 내 앞을 지나갈 때 야구 방망이로 그 녀석의 뒤통수를 힘껏 후려쳤다. 그 녀석이 퍽하고 쓰러졌다. 나는 그 녀석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집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날 밤 잠을 한숨도 못 잤다. 그 녀석이 혹시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 학교에 가보니 그 녀석이 와 있지 않은가! 더욱이 그 녀석의 친구들과 어제 뒤통수 맞은 일을 얘기하면서 깔깔대고 웃고 있지 않은가! 나는 그 녀석의 그 모습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 이후 나는 그 녀석에게 아주 잘해 주었다. 나의 삶은 계란도 자주 주고, 내가 아끼던 카메라까지 주기도 했다. 그러자 힘이 센 그 녀석은 약골인 나를 지켜주었다. 우리는 아주 친한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나의 마음 한구석에는 늘 그 녀석에 대한 미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졸업반이 되었을 때, 나는 그 녀석 뒤통수를 후려친 사건을 고백했다. 하지만 그 녀석은 나의 말을 믿지 않았다. 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그럴 리가 없다고 우겼다. 히죽히죽 웃으면서 계속 우겨댔다. 나도 깔깔거리면서 웃었다. 야구 방망이 사건은 그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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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식은 1948년 대구 남산초등학교에 다시 1학년으로 입학해 1954년 졸업했다. 사진은 일제강점기인 1935년 설립 초기의 학교 전경이다. 지금은 오른쪽 강당(남산관) 건물만 남아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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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초등학교 시절을 회고할 때 가장 잊을 수 없는 사건은 물론 한국전쟁이다. 대구에서 초등학교 3학년 때 전쟁을 맞이했다. 만주에서 국공내전을 목격하면서 몸서리를 쳤던 나에게 해방 뒤 귀국길은 전쟁이 없는 안식처를 찾아 나선 길이기도 했다. 그러나 고향에서 나를 기다린 것은 미국 전투기의 무자비한 폭격으로 상징되는 한국전쟁이었다. 눈에 띄는 모든 것을 무차별 살상했던 미군의 폭탄은 국공내전에서 사용했던 원시적 무기와는 차원이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폭격소리에 놀란 소가 길가에서 이리저리 날뛰던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빗발치는 미국 전투기의 폭격에 사람들이 이리저리 도망 다니다가 무참하게 고꾸라지는 모습, 주검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모습, 가족들이 주검을 부둥켜안고 절규하는 모습… 어린 눈에 반복적으로 각인된 그런 모습은 나로 하여금 결심하게 만들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전쟁을 방지하는 일에 헌신하겠노라고! 나의 온 몸에 전염된 ‘평화병’을 결코 치료하지 않겠노라고!
미군은 공군전략을 중심으로 전쟁을 수행했기 때문에 희생자 규모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미국의 전쟁 역사에서 최초로 승리하지 못한 전쟁이었다. 미국은 그런 사실을 은폐하고 싶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한국전쟁’(Korean War)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한국 내부의 동란’(Korean Conflict)이란 말을 사용했다. 미국은 베트남전쟁 패배 이후에야 한국전쟁이란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거의 모든 연구자들은 한국전쟁의 발발 기원이나 원인을 연구한다. 그들은 대체로 미국 의회의 도서관 등을 방문해서 다량의 사료를 복사해간다. 그런 다음 그 사료를 읽고 해석해서 ‘목침’처럼 두꺼운 한국전쟁 연구서를 펴낸다. 책의 두께는 대체로 연구자의 학문적 성취도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수많은 사료를 인용하면서 저술한 두꺼운 책이 학술상을 받는 사례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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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초등학교 3학년 때 한국전쟁을 겪은 박한식은 미군 전투기의 폭격소리와 무차별 살상의 충격 속에서 자신의 ‘평화병’이 깊어졌다고 말한다. 사진은 1950년 7월 미 해군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전투기들이 북한의 열차를 공격하는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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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그런 식으로 저술된 책을 수없이 읽으면서도 한국전쟁의 발발 기원이나 원인을 발견한 적이 없다.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사회과학적 인과율에 따라서 한국전쟁의 발발을 ‘설명’(explanation)해야만 한다. 그러나 내가 접한 수많은 한국전쟁 연구서는 방대한 사료를 이렇게 저렇게 조합해서 한국전쟁 발발을 ‘서술’(description)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단언컨대 서술을 통해서는 원인을 확정할 수 없다. 그들이 사용한 사료를 다른 연구자가 사용한다면 다른 방식으로 해석해서 다른 결론을 도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윌리엄 드레이가 “100여년에 걸친 막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남북전쟁 원인에 대한 논쟁이 아직까지 종식되지 않았다”고 평가했고, 또 냉전이 종식되었지만 냉전의 기원에 대한 논쟁은 아직까지 끝나지 않은 까닭은 모두 연구자의 ‘조잡한’ 연구방법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처럼 조잡하게 규명한 원인을 북한에 전가해서 북한을 단죄하고, 남한에 전가해서 남한을 단죄하며, 소련이나 미국에 전가해서 소련이나 미국을 단죄하는 행태를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남북 간의 증오심과 적개심을 끝없이 유발하는 원천을 제공하고 있다.
우리가 한국전쟁에서 진정 배워야 할 것은 우리 모두가 한국전쟁이 물려준 질곡에서 지금껏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전쟁이 남겨준 분단, 남북 간의 극단적 적대감, 북한을 핑계로 끝없이 악화되는 남남갈등, 그리고 그런 분단문화에 우리의 의식과 영혼이 부지불식간 세뇌됨으로써 아직껏 충분히 해명하지 못한 한국전쟁 민간인 대량학살 문제, 충분히 해결하지 못한 이산가족 문제, 충분히 해원하지 못한 빨갱이 연좌제 문제 등등을 직시하고, 분석하고, 해체하는 작업에 우리 모두의 학문적 역량을 기울여야만 할 것이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구술정리 박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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