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이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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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공지영의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이래라저래라, 착한 사람 못된 사람, 단정할 만큼우리는 그 남자 그 여자들의 사정을 알고 있는 걸까 딸아이가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요즘 아이들이 부러운 것 중의 하나는 “우리 지금부터 사귀자” 이렇게 말하고 사귀다가 “우리 지금부터 그만 만나자” 혹은 “친구 하자”라는 말로 끝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너무 오래된 전설 같지만 우리 때만 해도 몇 번 데이트를 해놓고도 이게 대체 친구인지 연애인지 알지도 못하고 나중에 그 남자가 혹은 그 여자가 “미안해, 난 너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은 없어”라고 말하는 걸 듣는 일이 많았다. 더구나 우리 때는 헤어진다 해도 명확하게 말을 하지 않고-왜냐하면 그게 사귀는 건지 아닌지 서로 모르기도 하니까 말이다-남자가 혹은 그 여자가 그를 슬슬 피할 때가 많아서-지금이야 피하는 것은 휴대전화 몇 번 걸어 보면 금방 알지만, 그때는 전화가 없는 집도 많고, 있다 해도 아침 일찍 혹은 밤늦게 할 수도 없는 형편이라-이 상황이 그가 나를 피하는 건지, 내 전화가 그를 피해 다니는 건지 헷갈리는 바람에 애만 태우면서 몇 달을 보내기도 했던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헤어지는 것도 부러워 아무튼 우리 애들은 이상하게도 내가 마감일 때만 무슨 일을 일으키는지라 나는 안 그래도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딸이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일찌감치 술이 얼큰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나 술 먹을 때는 안 그런데 아직 초저녁에 젊은 딸이 술 냄새 풍기는 것을 보자 왜 그렇게 미운지 모르겠다. (이상하게 내가 담배 피우지 않을 때 남이 담배 피우는 연기 냄새는 그렇게 싫을 수가 없고, 내가 술 안 마시는데 술 마신 사람은 너무 가관이다. 그러다가 내가 술을 마시면서 담배를 피우고 있으면 세상 사람들이 대개는 다 예쁘다. 그래서 늘 두 가지를 다 하고 있어야 좋은 사람이 되려나 보다. 흑흑) 딸: 엉엉 딸꾹, 엄마 나 너무 슬퍼. 나: 저리 가! 엄마 글 써야 돼. 그리고 몇 달 사귀지도 않고 뭐가 슬프냐? 게다가 둘이서 사이좋게 합의까지 했다면서. 딸: 엄마가 책에다가 잘 헤어지라고 썼잖아…. 엄마는 남자친구랑 헤어졌을 때 안 슬펐어? 엄만 술 안 먹었어? 나: (곰곰 생각에 잠기면서) 슬펐지. 술도 먹었고….
딸: 소설가 엄마면 이럴 때 좋은 말 해주고 달래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나: 책 읽어! 책에 다 쓰고 또 말로 하냐? 딸은 그래서 토라져 버렸다. 솔직히 원고와 딸 사이에서 방황하던 나는 딸이 더 중한지라 하는 수 없이 된장라면도 끓여서 속을 풀어주는 한편 다시 소주도 따라주면서 아부를 해야 했다. 요즘 글이 밀려서 딸의 도움 없이는 일상이 좀 힘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김에 하는 수 없이 나도 마셨다. 나: 너도 이제 성인이야. 작년에 투표도 했잖아. 그러니까 이제 그런 건 혼자 삭여. 알았지? 딸: 그런 게 어딨어? 고등학교 때 남자친구하고 헤어졌을 때는 잘 받아 주었잖아. 나: 그땐 네가 미성년이니까 그것 땜에 공부 안 하고 학교라도 안 가면 엄마 책임이니까 그랬지. 하지만 이제 안 돼. 이젠 성인이야, 그러니까 엄마 방해하지 말고 앞으론 네가 알아서 해. 소주를 먹으며 마음이 좀 풀어지던 딸은 다시 엉엉 울며 원망을 해댔다. 나는 성격을 좀 억누르며 다시 말했다. “알았다, 불쌍한 우리 딸.” 내 말에 딸은 뜻밖에도 엉뚱한 대답을 했다. “내가 뭐가 불쌍해? 조 모씨가 불쌍하지. 그 애들하고.” 그래서 나는 써야 할 원고는 제쳐두고 뜻밖에도 남의 가정사를 가지고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논의를 하게 되었다. 딸도 제 일은 잊고 남의 일에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약간 슬픔을 잊은 것 같았다.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쓰자면, 나도 딸과 같은 의견이다. 왜냐하면 나도 그 생각을 한번 해보았는데, 만에 하나 조 모라는 사람이 최 모씨가 남겨둔 빚을 -왜냐하면 채무도 일단 상속이 되므로 - 다 안고 아이들은 외할머니가 키우시오 하고 이야기를 했다면 우리가 이렇게 흥분할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던 것이다. 내가 아는 어떤 이는 비행기 사고로 일가가 다 죽었는데 당시 그 부인과 별거를 하던 사위가 그 어마어마한 상속을 다 받게 되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싶지만, 이런 일들이야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다. 나의 욕망은 상대방의 거짓말에 손바닥을 마주친다 우리가 술자리에서 혹은 밥상머리에서 남의 가정사를 두고 이러쿵저러쿵할 수도 있지만, 그들에게 가서 이래라저래라, 넌 좋은 사람 넌 나쁜 사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걸 판단하는 그들은 대체 누구여야 하는가 말이다. 솔직히 클린턴이 르윈스키와 바람을 피운 일로 의회가 특별검사를 채용한 것을 가지고 유럽 언론에서 비웃던 일도 떠올랐다. 나 역시 그건 힐러리가 흥분할 몫이지 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일 누가 경제를 잘 이끌어가고 민주화를 진전시키면서 바람을 피우는 대통령을 뽑을래, 아니면 경제정책도 제대로 못 펴고 이상한 관료들은 계속 등용하고 감싸면서 아내에게 잘하고 절대 한눈팔지 않는 대통령을 뽑을래? 물으면 그건 당연히 전자가 아닐까 말이다. (어디까지나 이건 바람의 일이다. 성 상납이 아니라 말이다.) 언젠가 외국에 갔을 때 그곳 교민들이 한 유명 인사를 비난하면서 이곳에 와서 여러 유부녀를 농락하고 다시 한국으로 가버렸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을 때에도 내가 물었다. 나: 그 사람이 그 여자들을 협박해서 관계를 가졌나 보죠? 아니면 납치를? 교민: (화들짝 놀라며) 아니 그런 건 아니죠. 나: 그럼 혼인을 하겠다고 거짓말을 했나 보죠? 교민: (곰곰 생각해 보며) 그런 뉘앙스로 꼬시지 않았겠어요? 나: 하지만 그들도 유부녀들이라면서요? 어떻게 결혼을 또 해요? 그 사람도 유부남인데. 교민: 그래도 여러 여자를 울렸으니 그 사람이 나빠요. 그 남자가 여러 여자를 그랬다면 그건 나쁘다. 단, 거기까지다. 내가 그 피해 당사자라고 해도 곰곰 생각해 보면 거짓말은 내 탐욕을 먹고 산다. 내 경우 생각해 보면 언제나 나의 욕망이 상대의 거짓말에 손바닥을 마주친 기억이 나니까 말이다. 내 딸아이를 예뻐하는 내 남자친구들을 만나 딸아이가 남자친구와 헤어졌다는 말을 전하자, 요즘 그 애가 연애하느라고 바쁘다는 말을 전할 때와는 사뭇 다른 표정들이다. 나는 그때 사실 약간 충격을 받았는데 딸아이를 아는 남자친구들이 모두 싱글벙글거렸던 것이다. 그러고는 하는 말이 이랬다. 남자친구 1: 그러지 말고 이 남자 저 남자 많이 만나 보라고 해. 나: (약간 망설이며) 그래야지. 연애도 많이 해보고. 그러다가 좋은 사람 있으면 사귀고. 남자친구 2: 그건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아. 그러니 우선은 너무 정해놓지 말고 이 남자 저 남자…. 나: 애가 벌써 스물이 넘었는데 친구도 아니고 뭘 이 남자 저 남자야? 남자친구 3: 그래도 너무 정하면 안 돼. 나: 너희들은 아내를 몇 살에 만났는데? 남자들 : (일순 침묵)
공지영의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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