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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2.14 18:39 수정 : 2008.12.14 18:39

김용택의 강가에서
31 진메 마을

오백년 된 당산나무가 지켜주고
앞산이 길어 ‘긴 뫼’라 부르던…

‘오래된 미래’같던 작은공동체가
허무하게 산으로 돌아가고 있다

우리나라 마을의 생김새들을 보면 마을 뒤에 산이 있습니다. 산이 없는 지역도 마을 뒤를 돌아보면 멀리 산이 있지요. 마을이 산에 등을 기댄 모습입니다. 잘생긴 마을을 보면 뒷산은 높고 앞산은 멀리 낮습니다. 앞산이 멀리 낮아야 들이 넓고 들이 넓어야 먹을 것이 풍족해서 사람들 마음이 너그럽지요. 그러나 우리 마을은 앞산이 너무 코앞에 바짝 있고 높아 처음엔 동네일들이 잘 되다가도 나중에 유야무야 용두사미가 된답니다. 뒷심이 약하고 무르다는 말입니다. 마을에 논과 밭을 만들 만한 공간이 적어 깊은 골짜기에 논을 만들고 비탈진 산을 파서 밭을 만들었지요. 어느 마을이든 마을 옆이나 앞으로는 강이 있거나 시냇물이 있거나 아니면 작은 도랑물이라도 흐르지요. 산이 있어 골짜기가 있고 골짜기가 있으면 물이 모여 흐르기 마련이어서 산에서 물이 흘러내려 그렇게 도랑과 시내와 강을 만들지요.

앞산과 뒷산 사이가 좁아 진메 마을은 답답해 보입니다. 좁은 계곡 사이로 강물이 흘러 답답한 숨통을 멀리 터주고 있기 망정이지 안 그러면 정말 숨 막혀 못 살 것 같습니다.

마을이 생길 만한 곳이 아닌데 마을이 생긴 것을 보면 무엇인가 다급한 상황 속에서 마을이 형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섬진강 상류지역의 마을들이 우리 동네와 비슷한 옹색한 지형에 만들어졌는데, 모두 임진왜란 때 피난을 다니다가 정착한 마을들이랍니다. 산속의 마을들이 대개 집성촌이지요. 우리 덕치면도 마을마다 성씨들이 각기 다른데 어떤 마을은 박 씨가 많고 어떤 마을은 전 씨가 많고 어떤 마을은 양 씨, 조 씨 이런 식입니다. 우리 동네는 양 씨, 문 씨, 김 씨로 구성되어 있지요.

동네 어른들의 말에 의하면 우리 마을이 생긴 것이 한 500년쯤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임진왜란 때가 분명합니다. 피난지였지요. 섬진강 강 마을에는 마을마다 큰 느티나무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제일 큰 느티나무가 한 500년쯤 된 게 많습니다. 그 마을의 나이와 비슷하지요. 우리 동네에도 마을 뒤에 큰 당산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한 500년쯤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마을을 만들어 곳곳의 이름들을 지었습니다. 큰골, 작은골, 홍두께 날 망, 우골, 평 밭, 삼밭골, 무당 밭골, 절굴, 달바위, 두루바위, 벼락바위, 자라바위, 노딧거리, 쏘가리 방죽, 다슬기 방죽 등 동네 곳곳의 생김새를 따라 이름을 붙였지요. 어느 마을을 가든 대개 비슷비슷한 동네 지명들이 많지요. 사람들의 생각들이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을 이름은 앞산이 길어서 ‘긴 뫼’입니다. 사람들이 긴 뫼 발음하다 보니 진메가 되었고, 일제 때 행정구역을 정리할 때 마을 이름이 긴 장, 뫼 산, 마을 리, 장산리가 되었습니다. 마을이 번성할 때는 가구 수가 38가구까지 불어났지요. 집 앞이 작은 논과 밭이고 강물이기 때문에 마을이 커지려면 뒷산을 타고 올라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마을이 번성할 때는 뒷산을 허물어 집들을 지었지요. 윤환이네 동환이 아저씨네 아롱이 아저씨네 집들이 한때 뒷산으로 올라가던 집들이었습니다. 지금은 다 산이 되어버려 그 흔적도 찾기 힘듭니다. 비가 묻어오는 우골이라는 골짜기에도 사람들이 살았지요. 창호지를 만드는 공장이 그곳에 몇 집 있었거든요. 마을이 융성할 땐 동네에 팽팽한 기운이 넘치고 활기찼지요. 헐벗고 가난하게 살았지만 그들의 나라는 ‘사람들’의 나라였습니다.


마을은 스스로 작은 공화국이었습니다. 법이 없어도 그들 스스로 살아온 전통과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와 일상생활의 경우를 따져 사람들이 모여 살면 일어나는 작고 큰 인간사들을 잘 정리하고 농사지으면서 생겨나는 크고 작은 갈등들을 풀고 다듬어 마을의 평화를 유지시켰지요. 내가 기억하건대 우리 마을에서 마을 사람들끼리 법을 들이댄 ‘사건’을 나는 보지 못했습니다. 오래된 마을들만이 가질 수 있는 나름대로의 규제와 자율로 마을은 인간 본래의 선과 악을 조절하며 오래오래 지속되어 왔지요. 그 속에서 사람들은 같이 먹고 같이 놀고 같이 일하는 농촌 공동체 문화를 자연스럽게 가꾸었습니다. 작은 마을의 아름다운 공동운명체는 그렇게 오래 다듬어지고 오래 지속되었지요.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오래된 미래’란 바로 이런 마을을 두고 한 말일 것입니다.

잘 알다시피, 산업화는 바로 농촌 인구의 도시 집중으로 이어졌고 마을은 순식간에 비어 갔습니다. 자본이 들어오면서 사람들은 빠져나갔습니다. 수천 수백 년 동안 지속되어온 마을들이 순식간에 붕괴되었지요.

생각해 보면 불과 50여 년 전 일입니다. 농민정책은 농민들을 깊고 캄캄한 수렁 속으로 몰아넣었지요. 집이 비어 가고 논밭이 묵어 갔습니다. 한때 초등학교 학생 수가 30명에 육박했던 우리 마을은 지금 모두 15가구 30명 내외가 삽니다. 한수 형님네 세 식구, 당숙모, 종길이 아제네 두 식구, 우리 어머니, 만조 형님네 내외, 동환이 아저씨네 세 식구, 재구네 어머니, 종만이 어른 내외, 태환이 형수씨, 담배 집 할머니, 종호 어머니, 재호네 다섯 식구, 송세완 아저씨네 두 식구, 성민이네 두 식구, 이장네 두 식구 이게 우리 마을의 인구입니다. 나머지 집들은 풀들이 자라거나 채소가 자라는 빈 집터거나 서까래가 부러지고 기둥이 주저앉고, 흙벽이 무너진 빈집들입니다. 멀쩡하던 산골의 집들이 허물어지고, 반듯하게 가꾸어지던 논과 밭이 산이 되어버리는 모습들을 보며 나는 살았습니다.

김용택의 강가에서
우리 동네에서 가장 높은 집은 윤환이네 집이었습니다. 윤환이는 내 동창이지요. 우리 동네에서 가장 늦게 이사를 간 친굽니다. 정말 전통적으로 농사를 짓던 농부였습니다. 그가 베어 놓은 논두렁 위로 솟은 벼는 정말 멋들어졌습니다. 그가 바제기 가득 풀을 베어 짊어지고 아침 안개 속을 느릿느릿 걸어오는 모습은 오래된 우리 농부의 모습이었지요. 느리고 더디고 오래 기다릴 줄 아는 농부의 표정과 말씨와 행동이 몸에 밴 정다운 농부였습니다. 그 친구가 이사를 가고 집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그 집을 허물어버렸습니다. 그 집터는 지금 밭이 되었습니다. 윤환이네 집 옆에 조금 낮은 곳에 순창할머니 집이 있지요. 단정한 3칸 집입니다. 순창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빈집이 되었습니다. 그 빈집은 높은 곳에 있어서 동네 앞을 지나다니면 부엌을 드나들던 흰 저고리 검정 치마를 입은 영자 누님의 모습이 또렷이 보였지요.

올여름 나는 동네 앞 강변길을 어슬렁거리고 있었습니다. 동네를 바라보다가 순창할머니 집에 눈길이 갔습니다. 아이구매! 나는 그만 기겁을 하고 말았습니다. 방문과 부엌문이 떨어져 나가고 서까래가 부러지고 벽이 허물어져 가는 순창할머니의 시커먼 집 지붕 너머로 칡넝쿨이 넘어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칡넝쿨은 부엌 쪽과 작은방 쪽, 두 줄기였습니다.

무서웠습니다. 세상에 사람이 살았던 집 지붕 너머로 검푸른 칡넝쿨이 지붕을 타고 넘어오다니, 나는 등골이 오싹하는 한기를 느꼈지요. 정말 무서웠어요. 나는 집으로 달려가 아내와 어머니에게 순창할매 집 지붕 위로 칡넝쿨이 넘어온다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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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김용택의 ‘강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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