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0.05.10 19:58 수정 : 2010.05.10 19:58

김형태 변호사





만장봉 아래 작은 암자가 봄볕 속에 고즈넉하다. 노인이 마당을 기웃거린다. 배낭 안 라디오에서 노래가 한가로이 흐른다. ‘뒤돌아보아 주세요. 나 거기 서 있을게요.’ 멋지다. 요즈음 사랑 노래들에는 이런 애절함이 없다. ‘어디야, 응, 5분 있다 도착해.’ 애인 만나러 가면서도 끊임없이 휴대전화로 확인을 한다. 이제나저제나 언제나 오시려나. 연애의 묘미는 기다림이요 그리움인데, 휴대전화는 요즘 청춘들에게 기다림이며 그리움이 쌓일 겨를을 주지 않는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더라.’ 지금이라면 부안 기생 매창의 이런 절창은 나오기 힘들다. 님에게 전화 한 통 하면 그만인 것을.

길이며 자동차도 그렇다. 사람 사는 면적이 국토의 1.6%인데 도로는 2%나 된다. 시골이고 산골이고 수없이 도로가 뻗어 있고 자동차들은 ‘느림’의 즐거움을 잊은 채 쐑쐑 소리를 내며 달려간다. 전에는 마장동에서 백담사 용대리까지 꼬박 한나절이 걸렸다. 그 시간의 길이만큼 설악은 더 신비로웠다. 한나절을 세 시간으로 줄인들 정작 무엇이 더 나아진 걸까. 대청봉에 업무 보러 가는 게 아닐 바에야 덜컹대는 시외버스에 몸을 싣고 가는 한나절 길은 그 자체로 즐거움이요 추억거리였으니. 아름답던 용대리 길옆 개울은 4차선 확장공사로 온통 거대한 콘크리트 교각들로 덮였다. 휴가철 며칠은 꼬불꼬불 2차선 길을 따라 차들이 늘어서긴 했지만 휴갓길 빨리 가기 위해 저러는 건 자연과 후대들에 대한 횡포다. 과학기술은 우리에게 풍요와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지만 풍요와 편리함의 대가로 잃는 게 더 많다.

줄기세포를 활용해 내 몸의 늙고 병든 장기들을 주기적으로 갈아끼우면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 수 있을 테니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그 덕에 우리 세대가 적당한 때 죽어주질 않으면 이 땅은 사람들로 넘쳐날 거고, 대체 자식들은 어디에 집을 짓고 무얼 먹고 사누.

<휴먼게놈을 찾아서>라는 책에서 코엥은 이런 주장을 편다. ‘수십만명이 유전적 질병으로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데 유전자 정체를 파악해 질병을 근절하는 걸 두고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짓이라고 하지 마라.’ 고통받고 있는 개개인을 놓고 보면 참 안된 일이다. 하지만 인류라는 생명집단 전체를 놓고 볼 때는 아파서 죽는 건 자연의 이치요, 후손들로 볼 땐 ‘섭리’라 부를 만하다. 이걸 인위적으로 바꾸려 하면 반드시 사달이 나기 마련이다. 얼마 전 준공한 33㎞ 길이의 새만금 방조제가 그렇고, 군인까지 동원해서 밤낮없이 강바닥을 파내고 있는 4대강 사업이 그렇다.

비틀스의 렛 잇 비(Let it be)라는 노래가 있다. 무심결에 흥얼대지만 영어 가사의 뜻이 예사롭지 않다. ‘내가 괴로움에 빠져 있을 때 성모 마리아께서 내게 오셨지. 지혜의 말씀을 주셨어. 자연스럽게 존재하라고. 내가 캄캄한 암흑 속에 있을 때 그분은 바로 내 앞에 서 계셨어. 해 주신 지혜의 말씀, 그냥 존재하라고.’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 두어라. 님은 멀리 있어 그립고, 설악은 멀리 있어 애써 찾음이 즐겁다. 시도 때도 없이 휴대전화로 님을 불러내고, 설악을 자동차로 무서운 굉음 내며 찾아가니, 삶은 의미를 잃고 즉흥적 반사행위만 남았다.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요,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라. 하늘이 주신 그대로를 본성이라 하고, 있는 그대로를 따르는 게 도라. 중용의 한 대목이다.


청춘들에게서 휴대전화를 빼앗자. 그러면 연애시가 절로 나오리.

김형태 변호사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김형태 칼럼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