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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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동네를 헤매 다니던 고양이들이 언제부턴가 보이질 않는다. 녀석들은 마당 한구석 상추며 쑥갓 심은 한 평 남짓한 밭을 파헤치고 똥을 싸곤 했다. 이게 싫은 노모는 죽은 철쭉 가지들을 마치 지뢰처럼 밭에 심어 놓았다. 어느 봄엔 계단 밑에 새끼 서너 마리를 낳아 품기도 했다. 사람들에게 쫓기며 골목 쓰레기통을 뒤져 겨우겨우 살아가는 그 어려운 삶을 왜 다시 새끼들에게 물려주려는 겐가. 또 어느 햇살 바른 아침엔 마당가에 앉아 모이를 쪼던 참새를 덮쳐 잡아먹었다. 참새가 불쌍해 신발짝을 집어 던져 보지만 저 고양이도 먹고살아야 하는 거다. 고양이 수명이 십년을 넘는데 길고양이들은 고작 이삼년 만에 삶을 마친단다. 아마도 우리 동네 길고양이들도 이 살벌한 세상에서 더는 살아가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다 사라졌다. 엊그제 직장 삼년차인 딸아이가 이랬다. “아니, 아버지, 누가 날 낳아 달랬나요?” 제 친구들은 골목 길고양이처럼 텔레마케터, 학원 선생과 같은 비정규직을 전전하는 터다. 그래도 너는 안정된 큰 회사에 다니는데 왜 어려움을 못 참고 징징대느냐고 나무란 끝에 나온 딸의 대답이 그랬다. 돌아보면 내 삶인들 쉽지는 않았는데 어찌 우리 집 계단 아래 고양이처럼 무정한 이 세상 헤매 다니라고 자식을 낳았노. 말문이 막혔다. 사실 부모가 자식들에게 무한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거다. 마당에 날아든 참새가 풀씨를 먹어 한목숨 이어가듯 고양이는 저 참새를 먹어야 산다. 일체개고(一體皆苦), 모든 것이 ‘고’다. 열역학 제2법칙은 바로 이 ‘고’에 대한 물리학의 설명이다. 우주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쪽으로 간다, 즉 모든 게 무질서 쪽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생명은 질서 상태이고 무질서, 곧 죽음으로 가지 않기 위해서는 외부에서 에너지를 얻어야 한다. 쌀이고 밀이고 고기고 간에 모두 남의 목숨인데 내가 살기 위해 남의 목숨을 취해야 하니 존재 자체가 ‘고’다. 하지만 인간은 식물이며 동물을 먹으면서도 이것들이 인간의 먹이가 되기 위해 존재하는 양 당연히 여긴다. 한술 더 떠서 남의 목숨을 먹어야 사는 터에 감히 ‘성인’이며 ‘해탈’ 같은 초월을 꿈꾸기도 한다. 그저 뭇 생명에 미안해하면서 조용히 살아야 할 것을… 또 사람들은 자신이 강이며 산이며 들의 주인인 양 마구 파헤쳐 골프장 짓고 운하 파고 온통 콘크리트 도배를 해댄다. 이는 에너지를 들여 자연의 질서를 무질서로 바꾸는 것이니 이런 어리석음이 따로 없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하니’, 제 목숨 유지 이상으로 다른 목숨을 취하지 않는다. 사람이 자연을 벗어나 욕심으로 넘치지만 그나마 자기성찰 능력 때문에 겨우 고양이나 참새 같은 자연을 뒤따라갈 수 있을까 말까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노래하기보단 그저 우리가 꽃만큼이라도 될 수 있을까 물을 일이다. 이명박 정부의 유일한 목표는 돈이고. 그에 도달하는 길은 오직 경쟁뿐이다. 누구누구 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돈을 유일한 가치로 떠받드니 당분간은 이 정권의 앞날에 거칠 게 없어 보인다. 하지만 돈은 나만의 욕구충족을 위해 다른 것들을 희생시킨다. 이 세상에 ‘고’를 더하지 않으려면, ‘더불어 삶’이나 ‘자연’ 같은 가치들을 되살리고, 제도적으로 경쟁을 억누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회사에 다니는 내 딸도, 비정규직 딸 친구들도 모두 돈과 경쟁 때문에 운다. 그저 돈밖에 모르는 우리 모두가 바로 그 돈 때문에 한번 크게 당해야 이 아수라판이 요동칠 수 있으려나. 어느 날엔가 그런 날이 벼락치듯 우리 앞에 열리긴 열리리라. 김형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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