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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8.03 21:09 수정 : 2009.08.03 21:09

김형태 변호사

마당 감나무에서 참매미가 여름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고 맴맴맴 울어댄다. 조금 있으면 찌이익 하고 말매미가 울 차례다. 쓰름쓰름 쓰르라미가 울면 여름은 또 스러져 갈 테지. 40여년 전 쓰르라미가 울 때쯤이면 개학을 앞둔 아이들은 ‘방학생활’ 책 맨 앞 ‘날씨와 한 일’ 칸을 한꺼번에 메우느라 허덕였다. ‘그저께 비가 왔나, 일주일 전에는 어땠지?’ 집 식구들에게 지나간 날씨를 묻다가 대충대충 적어 넣어서 앞집 애는 ‘비’, 뒷집 애는 ‘맑음’이었다. 한 달 반을 정신없이 놀다 보면 개학 때는 정말 책가방이 낯설고 한편 반가웠다.

요즘 아이들은 참 불쌍하다. 일제고사 준비로 초등학교 아이들까지 방학 때 학교 가고 학원 다닌다. 그 아이들이 뒷날 기억하는 여름방학은 밋밋하기 짝이 없겠다. 이게 다 ‘자본주의’ 때문이다. 옛날 우리 학교에서 제일 부자인 간장공장 집 아이나 다른 친구들이나 거기서 거기였다. 아직 자본축적이 크지 않아서 돈의 힘이 그렇게 세지가 않았으니, 우리들은 방학 내내 산수책을 잊고 살 수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밤 10시 넘어까지 공부하는 학생들이 있다는 담임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경이로움을 느꼈다. 대다수 반 친구들은 밤 9시 넘어서까지 깨어 있어 본 적이 없으니, “뭐? 밤 10시?”였다. 그래도 즐겁게 지냈던 건 자본이 아직 힘을 못 쓰던 시절이어서다. 70년대 중반 대학에 갔어도 개인의 앞날보다는 ‘국가와 민족’이 앞섰다. 잔머리 회전이 빠른 법대생들이야 고시에 매달렸지만 옆집 사회학과는 20명 입학에 10여명 졸업, 국사학과, 철학과가 어슷비슷했다. ‘민중’을 위해 데모에 나섰다가 다 잘렸다.

지금 대학생들이 그럴 수 없는 건 자본의 힘이 엄청나게 커져서다. 자본은 유치원 때부터 아이들을 철저하게 관리한다. 영어 잘하고 전공 지식도 풍부해야 자본의 축적을 위해 노동자 구실을 잘할 수 있을 테니 그렇다. 한 개인으로 보면 대여섯 살부터 영어회화 배우고 방학 때도 보충수업 받고 학원 가고, 요즈음 말로 ‘스펙’을 충실히 해야 겨우 취직해서 가정 꾸리고 먹고살 수 있다. 다른 길이 없다. 한가한 시절을 지내온 과거 세대가 요즘 아이들이며 대학생들을 이기적이라거나 보수적이라고 비난할 일은 아니다. 자본은 잠재 노동자인 대학생 숫자도 몇 배로 불려놓고, 기업이나 시장이 시키는 대로 충실하게 일하는 인간형을 교육의 목표로 삼는다. ‘돈’에 반기를 들고 공공의 이익을 이야기하거나, 자율적이고 창의적으로 일하거나, 괴짜 짓을 하는 개인은 도저히 용납하지 않는다. 마르크스가 말한 대로 노동의 소외다. 대기업 입사 3년차인 딸은 입사 무렵 빨갛고 통통하던 볼이 홀쭉해져 광대뼈가 보일 지경이고 얼굴에 환하게 피던 웃음과 생기가 사라졌다. 아직도 취직을 못 하거나 보습학원 강사, 텔레마케터 같은 비정규직을 전전하는 친구들을 생각하면 그만둘 수도 없다. 상대적으로 월급이 많다 한들 하는 일이 창의적이지도 자율적이지도 않으니 노동을 통한 자아실현이 안 되는 점에서 무직이나 차이가 없다. 돈은 돈벌이가 최대 목표여서 노동하는 인간의 자아실현은 관심거리가 아니다. 그리고 그런 노동자를 키워내는 비용을 기업이나 국가가 아닌 개개의 가정이 부담하고 있다는 건 더 큰 문제다. 모든 가정이 모든 수입을 쏟아 부어 자본에 순응하는 노동자를 키워내는 데 여념이 없다. 제 돈 들여 남의 배 불리기다.

그래도 변증법의 수레바퀴는 오늘도 굴러가고 있으니 자본은 자본 제 스스로의 모순에 의해 무너질 게다. 그러면 산수책과 담쌓고 지내는 즐거운 여름방학이 다시 아이들을 맞이하겠지.

김형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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