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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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태칼럼
달력이 달랑 한 장 남았다. 서산에 해가 넘어가는 그림 아래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해가 서산에 지더라/ 큰 소리로 이야기하더라/ 나 진다!/ 구차히 살지 말아라.” 멋진 말이다. 엊그제 겨울 도봉산에 올랐다. 길 옆에 꽃처럼 매달린 보랏빛 열매들이며 잿빛 하늘을 떠도는 까마귀 떼들. 허겁지겁 걷느라 이걸 볼 새가 없다. 산길에 줄을 이은 사람들이 싫어 뛰다시피 산을 오른다. 쉬엄쉬엄 한 시간 원통사 길을 40분도 안 되어 올랐다. 따지고 보면 저 사람들에게는 내가 ‘소란’일 텐데 저 혼자만의 고요를 찾아 산을 뛰어다니는 ‘이기’(利己)가 구차스럽다. 하지만 현실에선 서산에 해처럼 ‘나 진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게 어렵다. 그래 가지고는 살 수가 없으니 그렇다. 사람들은 성철 스님이 해탈했다고 믿고 마더 테레사가 성녀라고 말한다. 그 이들이 밥 안 먹고 살았다면 모르되 고기는 그만두고라도 다른 생명 쌀이며 밀을 먹고 산 바에야 해탈이나 성인이란 종교가 그려낸 동화이지 싶다. 그분들은 그냥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이치를 깨달은 잘난 이들일 뿐. 퇴근길 택시 안에서 대통령의 고향 포항 도로건설지원비가 크게 늘었다는 뉴스를 들었다. 기사 양반이 목청을 높였다. 대통령이 태어난 곳은 엄연히 일본인데 왜 엉뚱하게 포항을 물고 늘어지느냐는 거였다. 보통은 할아버지가 태어나 사신 곳을 고향으로 친다는 말을 꺼내려다가 그만두었다. 서울시청 광장에서 베레모에 군복 갖춰 입고 검은 안경 쓰고 거수경례 하던 노인들 모습이 떠올랐다. 무섭다. 지금이라도 다시 전쟁이 나면 저이들은 총 없으면 몽둥이라도 들고 ‘좌익’을 처단하러 나설 게 틀림없어 보인다. 과거사위원회가 6·25 때 수많은 보도연맹원들이 재판도 없이 죽어간 사실을 밝혀냈지만 그 일은 그저 흘러간 과거가 아닌 현재, 미래 진행형이다.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입법전쟁을 선포했다. 연 20조원에 이르는 부자들 감세, 재벌의 신문·방송 진출 허용, 사이버 모욕죄 신설, 마스크 쓴 시위자에 대한 처벌, 국정원의 휴대전화 감청 허용, 수도권 규제 완화. 하나하나가 기득권층과 약자들 사이 이해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법안들이다. 2008년이 저물어 가는 지금 이 나라에서, 대통령의 고향이 일본이라고 우기는 택시기사며 군복 입은 노인들이며 일제가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주장하는 교수들과 더불어 사는 게 과연 가능하기는 한 걸까.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도시국가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서 서로를 미워하며 죽어라 싸우다 둘 다 망했다. 아테네가 추구하던 민주주의와 인간의 존엄도 같이 사라졌다.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그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사회는 두 적대진영으로 나뉘어 서로가 불신했다. 이 상황을 끝낼 수 있는 대안이 없었고, 백성들이 깨기를 두려워할 만한 서약도 없었다. 그들은 힘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신뢰를 쌓을 수 있게 하는 데 쓰는 대신 닥칠 해를 막는 데만 쏟았다.” 세상은 끊임없이 바뀐다. 국민의 생각도 변해 간다. 그런데 어느 한 시점에서의 국민의 선택을 근거로 4, 5년 동안 일방의 가치와 이익을 모든 사람에게 강요하는 현 정치구조와 선거제도는 이제 바꿀 때가 되었다. 이긴 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는 게 아니라 서로 골고루 나누어 가져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우리에게 참 평화는 없다. 이 세밑에 서산에 해 넘어가는 걸 보며 좌고 우고 진보고 보수고 “나 진다!”고 통 크게 한번 외쳐 보면 어떠리. 김형태 변호사 [한겨레 주요기사]▶ 물길정비·제방보강…“4대강 정비는 대운하 1단계” ▶성추행도 감봉 3개월인데… “일제고사 거부에 파면이라니…” ▶‘성난 지역민심에 ‘선물보따리’…‘수도권 규제완화’ 상쇄 미지수 ▶국제기자연맹 총장 “3자구성 ‘YTN 감시위’ 만들자” ▶ 연세대,비자금 덮기에 바빴다 ▶[아침햇발] 이명박 1년 / 정석구 ▶[내년 유통업계 4가지 화두] ‘쇼핑센터’, ‘동네슈퍼’, ‘가격파괴’, ‘홈메이드’ ▶[고수들의 파일]그루핑, 세로 수납, 라벨 활용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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