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8.09.03 18:00 수정 : 2018.09.03 21:16

[곽윤섭의 사진마을] 한국혼혈인 26년 찍은 이재갑씨

이재갑 <빌린 박씨>, 92년10월 서울 장안동. 박근식 회원이 한국혼혈인회 사무실 앞에서 장난스런 표정하고 하고 있다.
“어릴 때 흰 우유를 많이 마셨다. 왜냐고? 흑인 혼혈이라 흰 우유를 많이 마시면 피부가 하얗게 되는 줄 알았다.” 가수 박일준씨가 1992년 8월께 한 텔레비전 토크쇼에 나와 우스개 삼아 말했다. 본인도 웃고 함께 출연한 사람들과 방청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그런데 그는 웃을 수가 없었다. 사진가 이재갑(52)씨가 처음 혼혈인에 관심을 가지게 된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해냈다.

한국혼혈인회와 26년 동안 이어진 인연의 결과로 오는 11일부터 서울 종로구 청운동 류가헌에서 ‘빌린 박씨’ 사진전을 열고 같은 이름의 사진집도 전시 개막에 맞춰 <눈빛>출판사에서 나온다. 이씨는 “‘대한민국에 혼혈인이 있었다’ 이 한 마디를 작은 목비에라도 새겨서 2009년에 돌아가신 박근식 형님 영전에 바치고 싶은 것이 이번 전시의 취지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빌린 박씨’는 박근식씨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6·25전쟁 직후 태어난 근식씨는 한국의 관습이라면 아버지 성을 따라야 하지만 대신에 어머니의 밀양 박씨를 성으로 삼았다. 아버지는 ‘미군이었다’라는 풍문으로만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씨는 “나는 밀양 박씨가 아니라 빌린 박씨”라며 씁쓸하게 웃던 박근식씨를 지금도 되새긴다. 개인적인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전화와 이메일로 이씨와 수차례 인터뷰를 했다.

‘무대 뒤는 인생의 축소판’ 깨달아

이씨는 이렇게 말했다. “89년 12월에 군에서 제대하고 먹고살 길이 막막했는데 지인의 소개로 연극 공연이나 리허설을 촬영하게 되었다. 하다 보니 좋은 연극사진은 리허설에서 다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본 공연은 객석에서 망원렌즈로 찍어 거리감이 생기는데 리허설은 내가 무대에 올라갈 수 있고 무대 뒤에도 갈 수 있기 때문에 연기자들의 민낯과 속말까지 보고 듣게 되니 그들의 인생을 제대로 담아낼 수 있었다.” 이렇게 찍은 사진으로 91년 4월에 <무대 뒤쪽의 차가운 풍경>이란 제목으로 대구 동아백화점에 있는 동아갤러리에서 전시를 했다.

“무대 뒤는 인생의 축소판이랄까? 극중에서 왕이었는데 무대 뒤에서 보니 연극배우 초년생으로 극단 막내다. 뭐 그런 식으로 연극을 하는 사람은 무대와 일상을 잘 구분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되면 폐인이 될 수도 있겠더라. 삶을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물음을 나에게 던진 개인적 의미의 사진 작업이었고 내면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중요한 작업이었다. 그 전시를 마치고 나서 잠깐 슬럼프에 빠져있던 시기에 텔레비전에서 박일준을 본 거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씨는 곧장 혼혈인을 찾아 나섰다. 주소만 보고 당시 서울대 근처에 있었던 펄벅재단을 찾아갔다. 소설 <대지>로 퓰리처상과 노벨상을 받은 미국의 소설가 펄벅이 1960년대 초에 글을 쓰기 위해 한국에 왔다가 한국 혼혈아동의 실태에 충격을 받고 1964년에 펄벅재단을 만들게 된다. 펄벅재단에서 한국혼혈인회(한국혼혈인협회와 섞어서 썼다)를 알려주었다. 그래서 장안동에 있는 혼혈인회에 찾아갔는데 당시 회장이 가수 윤수일씨였고 부회장 박근식씨 외에 다른 회원들도 있었다. 그동안 촬영한 사진과 앞으로 어떻게 혼혈인들을 촬영할 것인가에 대한 30분짜리 발표계획서를 준비해 5분 정도 설명하고 있는데 윤수일씨가 “내일부터 촬영하는 것으로 하자”라고 잘라 말했다. 나중에 친해지고 난 다음에 물어보니 “진정성이 보여서 허락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가수 박일준씨가 TV에서 말했다
“흰 우유 많이 먹으면 피부 하얗게…”

연극 무대 뒤 민낯 찍어 전시하고
슬럼프 빠져 있다가 정신이 번쩍

무작정 혼혈인회 찾아 촬영 요청
회장인 윤수일씨 단박에 승낙

전국 미군 주둔지 따라 다니며
실태 조사하고 행사 사진 기록

사진전 ‘빌린 박씨’주인공 박근식씨
자살 기도까지 하면서 실태 호소

협회 이끌다 ‘나는 한국인이다’ 유언
‘한국에 혼혈인 있었다’ 목비 세우고파

미군의 겁탈 범죄, 보상 호소문

한편 당시 모델에이전시에서 외국인을 배우로 쓰려면 절차가 복잡했는데 혼혈인회 회원들은 한국인이니 자주 배우활동을 하곤 했고 그 과정에 쓸 프로필 사진이 필요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이렇게 하여 이재갑씨와 혼혈인회와의 인연이 시작돼 협회 사람들을 따라 대한민국 내 미군이 주둔했던 모든 곳을 따라다녔다. 그동안 전국에 흩어져 있는 혼혈인들의 실태조사와 크고 작은 행사를 찍어왔고 대단히 많은 사연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중에 가장 자주 만났고 친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자주 사진을 찍었던 사람 중의 한 명이 이번 사진전 ‘빌린 박씨’의 주인공 박근식씨다.

1970년 초여름 혼혈 청년 박근식씨는 “대한민국에 혼혈인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부산에서 서울행 완행열차를 타고 양복 안주머니에 ‘대통령에게 보내는 친필 진정서’를 넣어두고 수면제 수십 알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다.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져 있던 그를 외국인 선교사가 발견했다. 전국 신문지면을 통해 그의 이름이 오르내리면서 혼혈인 처우개선을 위한 여론이 조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땅의 혼혈인은 대부분 6·25전쟁 이후 한국에 주둔한 미군이나 미국인과 한국인 여성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이다.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피부색, 외모의 차이 뿐만 아니라 출생 상에 개입된 윤리적 잣대 때문에 ‘순수혈통 단일민족’이라는 봉건적이며 보수적인 가치관이 뿌리깊은 한국 사회에서 평생 편견과 빈곤에 갇혀 살아왔다. 박근식씨는 윤수일씨 다음으로 혼혈인회 회장직을 맡아 헌신적으로 일했다.

2005년 혼혈인회 박근식 회장은 대통령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통해 혼혈 1세대 어머님의 보상문제를 언급하며 “대다수 혼혈인들은 기지촌 여성의 자녀가 아니라, 미군과 유엔군이 나약한 아녀자들을 강압적으로 겁탈하고 강간한 범죄행위로 인해 태어난 것임을 아는 국민은 다 아는 사실임에도 국가는 유독 혼혈인 문제를 왜곡시키고 축소하는데 정성을 쏟으면서 해외입양정책을 추진하고, 미국 등으로 이주시키는 일에 거국적인 심혈을 기울인 부끄러운 역사를 써내려 왔던 것”이라고 말했다.

2004년 동강특별사진전 다큐멘트 전시장에서 이재갑 작가.

‘평생 함께, 사진 기록’ 약속 지켜

이재갑씨는 이렇게 기억했다. “2009년 박씨가 세상을 뜨기 3주 전에 병원으로 찾아갔는데 ‘나는 한국인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복수가 차올라 그걸 빼는 시술을 하는 장면을 찍으려고 했더니 ‘그 사진 안 찍으면 안 되나?’라고 하셨다. 그래서 내가 ‘형님을 찍는 것이 아니라 혼혈인의 역사를 기록하는 중입니다’라고 했더니 고개를 돌리더라. 그때 맞은편 창문에 카메라를 든 내 그림자가 비쳐서 보이는데 나도 울었다. 사진가로서의 욕심이란 생각도 들고 해서 억장이 무너졌다. 잠시 후 형님은 나를 보고 ‘혼혈인의 역사를 남겨줘’라고 했다.”

이씨가 26년 전에 처음에 혼혈인들을 촬영할 때 한 약속이 3가지 있다. 이씨는 그동안 2개는 지켰다고 했다. 첫번째는 평생 형님들과의 인연을 이어나간다는 것이며 처음 시작할 때의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형님들의 역사를 사진으로 남긴다는 것이었다. 처음에 혼혈인들이 이씨에게 보인 반응은 “잠깐 찍고 말더라, 한 번 하고 나면 다시 안 오더라”였다. 해마다 6월이 되면 방송국에서 신문사에서 와서 잠깐 찍곤 그뿐이었으니 이씨 당신도 그러지 않겠느냐는 의구심이 있었을 것이다. 이씨는 그래서 나온 약속을 지켰다. 세 번째는 스스로에게 한 약속이다. 이번 사진전을 한 수익금으로 ‘대한민국에 혼혈인이 있었다’라는 작은 목비를 만드는 것이다.

글/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사진/이재갑 작가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곽윤섭의 사진마을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