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1.01 17:37
수정 : 2018.01.01 20:52
[곽윤섭의 사진마을]
사진이 발명되고 공표된 1839년 이후 10년 정도가 지났을 때 사람들은 이미 사진에서 치유의 기능을 확인하고 있었다. 세상을 뜬 망자(특히 아이들)를 찍는 사진이 미국과 유럽에서 크게 유행했다. 당시 디프테리아, 티푸스, 콜레라 같은 전염병이 창궐하여 수천명의 어린아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아이들의 죽음은 거의 일상적인 상황이었다. 사진을 찍는 비용이 고가였기 때문에 아이들이 살아 있을 때 사진을 찍어두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고 세상을 뜨면 마지막으로 아이를 위해 큰 비용을 지급하고 사진을 찍었던 것이다. 아이를 위해 돈을 쓴다고는 하지만 마치 잠자는 것처럼 죽어 있는 아이 사진을 보면서 사별의 아픔을 달래고 위로받는 것은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진에서 치유를 발견한다. 인물이든 꽃이든 풍경이든 사진을 찍는 과정에서, 그리고 자신들이 찍은 사진을 보면서 어떤 위안이나 기쁨이나 사색을 느끼게 된다면 그것이 곧 스스로 치유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그 과정에 생기는 치유의 기능을 자각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사진을 찍고 보는 활동에서 의도적으로 치유를 도입하거나 끌어내는 사진가들이 많다. 사진 찍기가 일상이 된 현대사회에서 사적이든 사회적이든 사진 활동에 치유를 전개하고 있는 사례들을 모았다. 사진가 고현주씨는 2009년부터 소년원과 보호관찰소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사진 강의를 했다. 매주 한 시간씩 4년간 강의를 했고 아이들이 찍은 사진으로 전시를 열었다. 현재 제주도에 머물고 있는 고씨와 전화로 인터뷰했다. 고씨는 “나와 같이 사진 공부를 했던 청소년들은 사회에서 ‘문제아’, ‘부적응자’로 불린다. 그러나 같이 공부하다 보니 문제가 없는 아이들인데 왜 문제아라고 할까? 이 친구들 사진을 보면서 미묘하게 뒤섞인 따뜻함이 축복처럼 가슴속으로 퍼졌다. 이 친구들의 사진이 내 마음의 빨간약이 아닐까 생각도 해봤다. 나도 그들에게 많이 배웠다”고 말했다.
고현주씨 소년원 청소년 사진강의
“문제가 없는데 문제아라고 낙인
사진이 마음의 빨간약
말문 열리니 스스로 희망 찾아가”
임종진씨 광주 5·18 유공자 사진치유
“끔찍한 그때 그 현장 찾아 기억 회복
사진 행위로 상처 마주하며
자기 생의 의미 인정하도록 도와”
백승휴씨 포토테라피스트로 자처
“강의 전 참석자들 얼굴 각각 찍어
화면 띄워 놓고 자기 얼굴 보며
제3자로 일대일 대화, 유체이탈 경험”
민진근씨 빨간 구두 곁에 두고 찍어
“신고 싶었으나 신을 수 없었던 꿈
용기 없어 스스로 갇힌 틀 벗고
내가 스무살이고 구두가 된 듯 몰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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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주씨가 가르친 학생 중 한 명의 사진 <나는 기다립니다>. 고씨는 “이 친구는 세워진 우산을 찍고 자신이 엄마를 기다리는 모습과 비슷한 것 같아서 찍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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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좁은 공간에서 늘 새로운 것 찾아내” 사진 교육을 하면 찍는 시간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소년원이란 공간은 교실과 정원과 운동장밖에 없었다. “뭘 찍을까 싶었는데 그 제한적인 공간에서 늘 아이들은 새로운 것을 찾아냈다”는 고씨는 시를 읽게 한 뒤 사진을 찍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카메라 작동법 정도는 이야기하고 나머지는 아이들이 찾아나섰다. 여러 기법 중에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을 스스로 발견했고 점차 실험적인 사진도 시도해 나갔다. 사진전을 하게 되었을 때도 대부분 아이들이 좋아하는 쪽으로 선택했다. 가장 궁금한 것은 사진 교육과 전시를 통해 아이들에게 생긴 변화다. 사진 교육이라고 사진 이론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고 사진을 통해서 다른 여러 가지 대화가 오갔다. 사진 수업으로 마음을 연 아이들은 자신의 아픈 상처를 조금씩 드러내고 사진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털어놨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따뜻하게 안아주면서 가까워졌다. 전시할 때 아이들이 많이 감격해했고 울기도 했다. 자신의 이름이 붙은 작품이 액자로 만들어져 걸렸으니 자존감이 높아진 것이다. “나도 할 수 있구나”라는 마음이 생기면 그다음부턴 자신들이 희망을 찾아가는 것이다. 2012년에 그 사진 강의 내용을 다룬 책 <꿈꾸는 카메라>를 펴냈다. 절판이 되었다가 2017년 5월에 같은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다. 책이 출판되고 6월에 제주시에 있는 김만덕기념관에서 고현주의 북콘서트 ‘꿈꾸는 카메라’가 열렸다. 박재동 만화가,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 김민웅 성공회대 교수가 함께 참여한 이 행사에서 고씨는 “가정과 학교 그리고 세상에서 상처를 받아 마음을 닫은 아이들이었다. 카메라가 그 닫힌 문을 열어주었다”고 말했다.
“함께한 시간 궤적 깊고 커 더 감동” 달팽이 사진골방과 사진치유기관 ‘공감 아이’의 대표인 임종진씨는 2013년 가을부터 2년 동안 매주 광주를 오가며 사진치유 프로그램 1기 과정을 열었고 뒤이어 2015년 9월부터 2017년 7월까지 사진치유 프로그램 2기를 진행했다.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사진을 배웠으며 그 사진으로 전시를 하고 책도 내게 된 1기 9명과 2기 7명은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모두 5·18민주화운동의 피해자이며 유공자다. 2기 7명의 사진은 2016년에 서울에서 치유사진전으로 공개되었고 2017년 11월에 <오월광주 치유사진집―기억의 회복2>로 묶여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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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광주 치유사진집―기억의 회복2’에 실린 사진. 사진치유 프로그램 2기 7명이 광주시에 있는 옛 국군통합병원에서 자리를 함께했다. 7명 중 일부는 5·18 당시 이곳에 강제구금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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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505보안대 고문실. 이곳에서 고문을 받았던 이성전씨가 찍은 사진이다. 이씨의 육성이다. “저게 뭐이냐믄 나를 의자에 앉혀 묶어놓고 몇시간씩 벽을 보게 하고 고문하던 그 자리요. 암튼 밤낮으로 맞고 터지고 그라니께 그때는 차라리 빨리 총살이라도 시켜줬으면 싶을 정도였어. 그란디 안 죽고 살아남았으니께 이렇게 다시 와서 오월광주를 기록하는 산증인이 될 수도 있네요이. 계속 몇번씩 오니까 처음보단 훨씬 편안해지기도 혔고 내가 몸이 불편혀서 맘대로 찍덜 못하니까 오히려 그게 아쉽더만. 여그를 제대로 보여줘야 하는디. 역사 보전을 혀야 허니께 사진 찍을 욕심으로 자꾸 들어갔는디 그러다봉께 나도 흥분이 조금씩 가라앉드만. 인자 나 고문하던 디도 잘 살펴보게 되었응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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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1기의 무덤을 묵념하고 딱 한 차례씩만 찍어 그 이미지들을 한꺼번에 모아 하나의 이미지로 만든 곽희성씨의 사진, 1980년 공수부대원에게 붙잡혀 심하게 구타당했던 그 현장을 36년 만에 처음 가봤다는 박갑수씨의 사진, 당시 자취하던 집에서 계엄군에게 붙들려 끌려가던 골목길을 찍은 서정열씨의 사진, 도청에서 손발이 뒤로 묶인 채 가슴으로 기어서 피칠갑이 된 계단의 현장을 찍은 양동남씨의 사진, 11년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퇴원해 “고맙고 미안한” 두 아들을 찍은 이무헌씨의 사진, 지속적으로 고문을 당했던 505보안대를 찍은 이성전씨의 사진, 현재 5·18 관련 사적지를 관리하는 일을 하면서 구타당하거나 고문당하는 조각상을 찍은 이행용씨의 사진 등이 책에 포함되어 있다. 임씨는 “대면의 도구인 ‘사진 행위’를 통해 자신에게 내재된 상처의 기억들과 마주하면서 스스로 자기 생이 지닌 의미를 인정하도록 조력하는 역할을 했다. 이 사진집에 실린 모든 치유와 회복의 형상들을 보면서 더욱 가슴 찡한 감동을 얻는 이유는 아마도 함께한 시간들의 궤적이 너무 깊고도 크게 내 기억에 담겨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탈북청소년·요양원 찾아가 봉사 지난해 12월29일 홍대 앞 카페에서 만난 백승휴씨는 포토테라피스트로 자처한다. 백씨는 탈북청소년 사진 교육도 했고 제자들과 포토테라피 봉사단을 꾸려 두 달에 한 번꼴로 요양원이나 데이케어센터에서 봉사활동도 하고 있다. 처음 포토테라피의 가능성을 찾은 것은 수필 공부를 할 때라고 했다. 백씨는 “백화점 문화센터에 수필을 배우러 갔는데 동료 수강생 대부분이 중년여성들이었다. 사진을 찍어주었더니 자신들의 얼굴사진을 보며 대단히 좋아하더라. 그렇게 한 6개월이 지나니 놀랍게도 그들이 예뻐지더라. 이게 바로 포토테라피가 아닐까?”라는 깨달음이 왔다고 했다. 그는 35살에 대학원에서 사진을 전공했다. 졸업논문이 <중년여성의 포트레이트 사진촬영이 그들의 웰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였다. 그는 통섭을 해야 한다고 판단하여 이번엔 메이크업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백씨는 “메이크업을 연구한다는 것은 얼굴에 뭘 칠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메이크업이 주는 영향에 대한 연구, 여성이 외모를 바꾸기 위한 욕구는 어디서 오는가, 어디까지가 화장이고 시술이고 성형인가, 화장은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이런 것들을 연구했다. 거기엔 미용실 원장들같이 센 사람들이 왔는데 다섯 학기를 당당히 잘 버티고 수료한 상태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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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휴씨와 ‘포토테라피 봉사단’의 봉사활동. 2016년 4월 까리따스수녀회 데이케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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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중년여성들의 가면무도회. 백승휴씨는 “파티는 색다른 놀이이며, 중년여성들에게 자신이 충분히 아름답다는 걸 인식시키는 과정이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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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씨는 포토테라피를 사업에 접목시켜 3년 전부터 기업체와 기관 등을 대상으로 찾아가는 ‘포토플레이’를 운영하고 있다. 백씨는 한 은행에서 연 ‘우수고객 초청 포토아카데미’를 예로 들었다. 참석자들이 강연장에 하나둘 나타나면 바로 세팅된 곳으로 모시고 와서 사진부터 찍는다. 30명을 모두 찍고 나면 파일을 팀원에게 넘기고 강연을 시작한다. 20분 정도 지나면 좀 전에 찍은 인물 사진을 하나씩 스크린에 띄우고 당사자에게 말을 건넨다. 3인칭을 쓰라고 권유하면서 ‘그는 어떠한가?’라고 묻는다. 당사자가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그는 수줍다’고 말하는 순간 유체이탈이 일어나는 경험을 하면서 빠져든다. 다시 묻는다. ‘왜 그는 수줍은가?’ 이제 스멀스멀 자기 내면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머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지?’라고 하면서도 이야길 곧잘 한다. 중요한 것은 타산지석이다. 다른 참가자들이 모두 이 대화를 듣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30명과의 일대일 토크가 끝나고 나면 그사이에 인화해둔 30명의 얼굴 사진이 전시된 곳으로 이동하여 관람한다. 진지하다. 어떤 명화 감상보다 더. 스크린에서 본 사진과 인화된 사진은 천지 차이다. 자기 사진을 보고 다른 사진으로 이동하면 뒤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야 이 사람 예쁘다.’ 거기서 험담하는 사람 없다. 다른 긍정적인 멘트를 하는 프레임이 짜여 있다. ‘내가 부정적으로 말하면 분명히 다른 사람도 부정적으로 할 거야’라고 다들 생각한다. “끝나고 나면 다들 액자에 든 자기 사진을 선물로 받아서 돌아가는데 만족도가 대단히 높다. 거기에 참석하는 우수고객들은 평균잔액이 30억이 넘는 사람들이라서 어떤 선물, 어떤 강의, 어떤 음악회에 쉽게 만족을 느끼지 않는데 자신의 사진에 푹 빠져들면서 치유도 되는 경험을 한다”고 백씨는 설명했다.
딸 “엄마라는 액자에서 걸어나와” 산과 길과 한강변 등에 빨간 구두를 내려놓고 찍은 사진들로 사진집을 만든 민진근씨의 사진전 ‘소울(疏鬱)여행’이 6일부터 12일까지 서울 성동구 왕십리광장로에 있는 갤러리허브에서 열린다. 소울은 ‘답답한 마음을 풀어헤침’이란 뜻을 가진 낱말이다. 같은 이름의 사진집은 도서출판 아지트에서 나왔다. 민진근 작가의 첫 개인전과 사진집이다. 지난 26일 한겨레신문사에서 민씨를 만났다. 2014년에 그룹전을 앞두고 무엇을 찍을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는데, 다들 풍경을 찾아다녔지만 그에겐 풍경이 와닿지 않았고 즐겁지도 않았다. 생각 끝에 자신의 속을 찍기로 했다. 민씨는 “속이란 것은 내가 편한 것이다. 종교가 불교라서 절에 가면 맘이 편하다. 산도 편하다. 내가 어렸을 때 추억하던 곳에 가면 좋았다. 그냥 찍어서는 내가 편안함을 느끼지 못할 것 같았다. 사진 속에 내가 그곳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빨간 구두가 등장했다. 빨간 구두란 것은 내가 신고 싶었으나 신을 수 없었던 물건이다. 나의 꿈이었다. 용기가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예쁘고 화려하고 섹시한 것을 오히려 거부하고 살아왔다. 다른 사람이 날 어떻게 볼까? 내가 스스로 갇힌 틀이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신발장을 열었는데 딸의 빨간 구두가 딱 있었다. 구두도 부러웠고 딸도 부러웠다. 사회적으로 여자가 너무 나서거나 잘되면 남자 앞길을 망친다는 그런 보수적인 관념 속에 살아왔던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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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진근씨의 사진집 <소울여행> 79쪽. 민씨는 “빨간 구두와의 여행은 마음 가면을 쓰고 있는 나를 만나게 하고, 그런 나를 알아차리게 하는 역할을 했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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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씨는 딸아이의 구두를 들고 나가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너무 좋았고 몰입이 되었다고 한다. “빨간 구두가 내가 된 것 같고 내가 스무 살이 된 것 같고 내가 구두가 되었다. 빨간 구두를 신고 꿈을 꾸는 것 같다”고 했다. 민씨는 빨간 구두를 ‘얘’라고 불렀다. “얘에다 나를 투사시켜서 찍다 보니 사진이란 게 참 자신을 돌보는 게 많다 싶었다. 그때 많이 아팠는데 검사를 해도 병원에선 스트레스와 과로라고 하고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2014년에 딸아이가 영국으로 유학을 가고 아들은 군대를 가게 되었다. 아들도 걱정이 되었지만 딸은 먼 나라로 가니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뛰어갈 수도 없고…, 너무너무 불안하더라. 잘 있을까? 애들이 없으면 내 맘대로 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게 아니더라”고 말했다. 민씨에게 빨간 구두가 치유의 도구이자 대상이 된 것이다. 촬영 첫해에는 구두에 제대로 초점도 못 맞추고 숨기거나 일부만 나오게 했다. 사진집의 33쪽 사진에서 빨간 구두가 넘어진 채 포개져 있는데 그때부터 사진이 달라졌다고 했다. 똑바로밖에 못 놨던 구두를 넘어뜨려도 괜찮았다. 나 자신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구두를 삐딱하게 놓으면서 ‘조금 삐딱하게 살아도 되는구나’ 싶었다. 민씨는 2014년의 그룹전에 빨간 구두 사진 몇장을 걸었다. 빨간 구두에 공감하는 관객들의 연령층이 다양했다고 한다. 사진을 보면서 한 남성 관객이 직장에서 자기 꿈을 이루지 못하고 매여 사는 답답함을 토로했다고 한다. 요즘도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날엔 꼭 빨간 구두를 가방에 넣고 다닌다. 민씨는 “이번 전시가 끝나고 나면 다른 작업을 할 생각이다. 빨강은 가져가고 구두는 내려놓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엄마의 빨간 구두 사진을 본 딸 윤다솜씨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녀(엄마)가 처음 내 구두를 몰래 들고 나갔을 때를 기억한다. 워낙 내 물건에 대한 소유욕이나 결벽이 없어서 별로 개의치 않았다. 사실은 그녀가 빨간 구두를 손에 쥔 이유를 난 처음부터 알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유롭고 싶어했다. 아이러니하게, 나는 그녀를 자유롭게 만들고 싶었지만 동시에 날개를 꺾는 이였다. 내가 유일하게 줄 수 있는 건 신다 처박아둔 빨간 구두였다. 대단하다. 마흔이 넘어서 새로운 것에 도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빨간 구두를 신고 엄마라는 액자 속에서 걸어 나왔기에. 나는 그녀가 빨간 구두를 신은 채 새로운 여행길에 오르길 바란다.”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사진 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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