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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8.29 23:15 수정 : 2017.08.30 10:46

임재천이 촬영한 부산 서구 남부민동 부산공동어시장. 2016년 9월.

SNS로 후원 받아 사진찍는 임재천씨

임재천이 촬영한 부산 서구 남부민동 부산공동어시장. 2016년 9월.

3년째 제주 강원 부산 차례대로

한 달에 열흘씩 아홉 달

하루 평균 20km씩 발로 찍었다

3번째인 부산이 고비

올 것이 왔나, 허리 디스크가 터졌다

이전 5번의 교통사고 후유증 탓도

14살 때 <내셔널지오그래픽> 보고

사진에 빠지기 시작했다

‘사진학 강의’ 읽고 또 읽어 너덜너덜

사진에 도움될 것 같아 문창과로

졸업 뒤엔 기자도 하고 사업도 하다

쫄딱 망해 빚만 잔뜩 져

우여곡절 끝에 다시 사진을 하다가

페북으로 출판사 사장과 인연

책 내면서 페북 예약판매로 ‘영감’

기업이나 기관에 손 벌리지 않고

일반 사진애호가 후원 받기로

페북 올리니 50명 5천만원 금세

3년 전인 2014년 3월에 ‘한국의 발견 50+1’ 프로젝트를 성공시켜 제주도를 찍고 전시하고 책을 냈던 임재천은 그 뒤 2015년 강원도를 거쳐 2016년엔 세번째로 부산 편에 착수하여 올해 4월에 촬영을 마쳤다. 후원자 50명과 사진가 임재천 1인의 협업이란 의미에서 ‘50+1’이라 부르는 이 프로젝트는 한국 사진계에 전에 없던 새로운 바람을 몰고 왔으며 전시할 사진 선택을 전문기획자가 아닌 일반인에게 맡기는 방식 또한 실험적이어서 사진전의 품질에 대한 우려가 있었으나 제주 편과 강원 편의 전시 모두 만족스러웠다는 것이 안팎의 평가다. 현재 부산 편의 사진전시와 사진집 제작을 준비하고 있는 임재천씨를 그가 살고 있는 춘천에서 만나 그간의 이야기를 들었다.

술에 찌들어 살다 선배 채찍에 번쩍

임씨는 “세번째가 고비인 모양이다. 삼세판. 고개도 두개 넘고 난 세번째가 힘들고 운동도 3일째가 힘들다고 하지 않는가”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임씨는 지난 4월 부산 작업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무렵 허리 디스크가 말썽을 부려 주저앉고 말았다. 한달에 열흘씩 아홉달 90일간 하루 평균 20㎞씩 걷는 강행군을 했다. 하지만 디스크 5번이 터지고 4번이 터지기 직전까지 간 것은 강행군 때문만은 아니라고 한다. 임씨는 그동안 크고 작은 교통사고만 다섯차례 겪었다고 했다. 그중 몇번은 말 그대로 죽을 뻔한 중상이었다. 그때 허리도 다쳤는데 그게 누적되었다가 올해 터진 모양이라고 했다.

임씨는 “올해 3월에도 부산에 열흘 동안 있었는데 유난히 날씨가 흐리고 해서 사진을 제대로 못 찍었다. 춘천으로 돌아갔다가 다음달에 다시 내려와야 했는데 꽃이 질 것 같기도 하고 날씨를 장담할 수 없어 열흘을 그냥 이어서 촬영하기로 했다. 그러다가 탈이 단단히 났다. 움직일 수 없이 아파서 촬영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가장 먼저 50명의 후원자에게 모두 전화를 걸어 촬영 중단에 대해 사과를 했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임씨의 건강이 얼른 회복되길 빌었다고 한다.

임씨는 14살 때 한 미국인이 건네준 월간지 <내셔널지오그래픽>을 보고 사진에 빠지기 시작했다. 혼자 사진을 배웠는데 바버라 런던의 <사진학 강의>라는 책을 5권 샀다. 손에서 놓질 않고 달달 외우다 보니 네 권은 다 닳아 너덜너덜해져버렸고 한 권은 기념으로 가지고 있다. 더 이상 사진을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대학 전공을 문예창작으로 선택했다. 고등학교 때 시 동호회 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감정이입이란 측면에서 문학이 사진에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임 작가는 “당시 서울예전 문창과 경쟁률이 180 대 1이었고 같이 입학한 친구들은 목숨을 걸고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려고 입학했는데 나는 목적이 달랐으니 이런 이야기를 입 밖에도 꺼내지 못했다. 나이 50이 넘었으니 이제는 말할 수 있다”며 껄껄 웃었다.

대학을 졸업한 임씨는 자동차 관련 잡지사와 음악 관련 잡지사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뜻한 바 있어서 오페라 <아이다> 시디 세트 판매사업을 하다가 석달 만에 쫄딱 망했다. “이건 아니다” 싶어 고개 들어보니 1억원의 빚만 남았다. 갚을 길이 없어 날마다 “술 처먹고 다니다가” 어느 날 밤 집 대문 앞에서 채권자였던 선배에게 귓방망이를 한 대 얻어맞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후 5년에 걸쳐 간신히 빚을 다 갚을 수 있었다.

지금 3년째 하고 있는 ‘한국의 발견’은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되었을까. 사업을 말아먹었던 임씨는 1999년에 다시 사진을 시작하면서 아시아나 기내지 사진을 맡게 되면서 한창기 선생의 <한국의 발견> 시리즈가 문득 떠올랐다.

임씨는 “한국의 발견을 다시 해보자 싶어 20억짜리 기획서를 써서 기업과 정부 부처에 보냈는데 다 퇴짜를 맞았다. 내가 생각해도 당시 ‘듣보잡’이었던 임재천이 먹힐 리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래서 이름을 알리기 위해 임씨는 이를 악물고 2000년부터 10년 동안 한국을 찍어 출판사를 찾아갔으나 여전히 곤란하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어쩌다가 2010년부터 2012년까지 서천 국립생태원 건립 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도큐멘트 작업을 맡아 일했다. 3년간 번 돈으로 빚을 갚으니 수중에 140만원이 남았다. “사진은 아니다”라고 생각하면서 이런저런 궁리를 하던 차에 아는 선배가 페이스북을 한다기에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도 달고 그랬다. 사실 임씨도 2010년에 페북 계정을 열었던 적이 있었는데 “이게 뭐…. 정신이 산만하여” 5시간 만에 닫았던 이력이 있다.

“니가 무슨 조용필이냐?” 핀잔만

다시 계정을 살린 임씨는 사진을 한장씩 한장씩 페이스북에 올렸다. 88올림픽 때 어느 신문사에서 외국 사진기자를 위한 가이드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 기자가 선물로 준 코닥크롬 10롤로 찍었던 사진들이다. 그랬는데 눈빛 출판사 사장이란 사람이 페친 신청을 하더니 일주일 후에 보자고 해서 만났다. 눈빛에서 책 내는 것이 꿈이라고 했더니 조만간 눈빛 문고판을 할 테니 기다리라고 했다. “선심 쓰는 거냐?”고 물었더니 “그랬다면 내가 벌써 망했을 것”이라고 이규상 사장이 말했다. 그해 9월인가 슬라이드 4천장에서 646컷을 골라 보내줬는데 문고판은 나중에 하고 300쪽짜리 눈빛 총서를 하자고 했다. 승격이 된 셈이라 기뻤는데 거기에 더해 다음날 총서 말고 제대로 된 사진집 내자고 다시 제의를 했다.

욕심이 생겨서 페이스북을 통한 예약판매를 한번 해볼까 싶어 이 사장에게 말했더니 “니가 무슨 조용필이냐?”라고 핀잔을 주면서 “사진집은 잘 안 팔린다. 예약판매 걸었다가 몇권 안 되면 정작 책이 나왔을 때 더 안 된다”고 만류했다. 오기가 생겨 임씨는 페이스북에 “제가 사진집을 내면 구입하실 분 손 들어보세요”라는 글을 올렸다. 사겠다는 의향을 세어보니 220권이나 되었다. 다시 눈빛 출판사에 같은 제의를 했더니 편집장이 편을 들어줬다. 대성공이었고 ‘한국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임재천이 촬영한 부산 중구 대청동 남성여고. 임재천은 “이곳에서 부산의 옛 모습과 현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보인다”고 말한다. 2017년 3월.
층층이, 켜켜이, 틈틈이 빡빡한 부산

부산에서 뭘 발견했는지 물었다. 임씨는 “지난달에 150장을 후원자들에게 보냈고 이들이 50장을 골랐다. 후원자들은 한결같이 ‘부산이 이렇게나 빡빡한 곳이었나?’라고 놀라더라.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지나 현재 부산의 모습을 갖춘 배경엔 자갈치가 빠질 수 없다. 산복도로가 형성된 계기도 자갈치시장이다. 6·25 이후 뭘 벌어먹으려는 사람들이 모두 자갈치로 몰려들었고 마을도 자갈치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걸어서 시장으로 올 수 있으려면 가까운 곳에 살아야 하니 근처 산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부산은 절반이 산이다. 아미동 비석마을을 봐라. 오죽하면 무덤을 파헤쳐서 비석을 기단석으로 해서 집을 지었겠나? 자갈치가 가까워서 차츰 아미, 남포동, 중앙동, 영주동, 우암동으로 이어진다. 그러니 빡빡할 수밖에 없다. 영주동에 가면 산으로 올라가는 계단 길을 가운데 두고 현관 입구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 부산은 층층이, 켜켜이, 틈틈이 뭐가 들어서 있어 빈틈이 없다. 사람과 건물, 시장이 빡빡하다. 춘천 인구가 27만인데 부산은 450만이고 산복도로에만 100만명이 산다. 내가 예전에 춘천 망대길 골목이 한국에서 가장 좁다고 했는데 수정한다. 부산이 더 좁다. 비교가 안 된다. 한 명이 간신히 지나가는 정도가 아니라 옆으로 비켜서 지나가야 할 정도”라고 말했다.

임씨는 “그렇게 빡빡한 삶을 사는데도 또 신기한 것은 부산 사람들이다. 뭘 발견했냐고? 부산이 전국에서 물가가 가장 싸다는 것을 알았다. 남포동, 광복동은 번화한 곳인데 거기에 아직 막걸리 한 통에 2천원 하고 안주 안 시켜도 김치 포함 안줏거리 3가지가 나오는 선술집이 있다. 칼국수 3천원. 이렇게 싸면 월세가 얼마일까? 오래된 집주인이 건물을 팔지 않고 세입자를 내보내지 않으니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 상부상조한다. 거슬러 올라가면 6·25전쟁으로 이어진다. 이게 부산 정신이다. 센텀? 부산 사람들은 센텀시라고 부르더라”고 덧붙였다.

“부산서 사진하는 사람들 부끄러울 것

임씨는 본인이 찍는 사진에 대한 자신감이 확고하다. “부산에서 사진 하는 사람들이 내 사진을 보면 많이 부끄러울 것이다. 좀 화가 나더라. 이렇게 부산에서 찍어야 할 곳이 많고, 기록으로 남겨야 할 것도 많은데…. 부산은 공동어시장만 1년 찍어도 어마어마한 사진들이 나온다. 그런데 나는 부산의 공동어시장과 산복도로 마을을 찍은 사진을 못 봤다. 솔직히 말해서 귀찮은 거다. 안 간 거다. 사람들과 힘들게 부대끼고 먼 거리 걷고 욕먹고 이런 게 싫은 거다. 물론 나는 욕먹은 적이 단 한번도 없다. 특별한 노하우는 따로 없다. ‘나는 당신들의 모습을 착취하러 온 것이 아니다. 난 당신들 존중하니까 와 있는 거다’라는 태도가 중요하다. 어떤 사람이 나를 쳐다보는데 내가 대놓고 그를 찍으면 그 사람을 욕보이는 것이다. 나를 보고 있으면 가서 인사하고 말을 건넨다. 공동어시장 같은 경우엔 회사이기 때문에 총무과 가서 명함 주고 ‘1년 동안 촬영했으면 좋겠다’고 허락을 받았다. 허락받고 시장에 카메라를 들고 가면 내 카메라 보고 ‘당신 허가받고 찍느냐’고 묻는다. 딱 한번이다. ‘그렇다’고 하고 나면 나에게 뭐라는 사람이 없다. 늘 촬영에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사진에 찍힌 사람이 누구라도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여지가 있다면 사진을 공개하지 않는다. 누가 오해할 수 있다. 가난하지 않고 힘들게 산 사람도 아닌데 단지 옷에 뭐 묻었다고 해서 ‘힘든 삶을 살고 있다’는 그런 소리 듣게 하는 것이 싫다”고 말했다.

부산에서 찍은 사진 중에서 특별히 기억이 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즉각 답이 돌아왔다. “부산에서 1년에 두번 하늘의 색깔이 바뀌는데 불꽃축제 때와 대보름에 달집을 태울 때다. 아마 내 사진을 보면 부산에서 사진 찍는 사람들은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 들 것이다. 그 사람들은 한번도 그런 사진을 찍어보지 않았을 것이니까. 나는 불꽃축제에서 불꽃을 본 적이 몇번 없다. 불꽃이 터질 때 불꽃 자체가 궁금하지 않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빛에 물든 모습이 궁금했다. 이기대에서 찍었는데 지역민이 더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관광객은 광안리 간다. 삼각대 설치하고 3.7초인가 노출을 줬는데 대단히 인상적인 사진이 나왔다. 바람이 불어 풀은 흔들리는데 불꽃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후원자 50명 중에서 꼭 이 사진을 골라주길 기대했는데 다행히 포함되었다.”

임씨는 현재 열심히 재활운동을 하면서 디스크 치료에 힘쓰고 있다. 올해 9월 부산 편 전시가 끝나면 곧바로 2018년 전라도 편을 위한 후원금 모금 예약을 받기 시작한다. 재활이 예정대로 된다면 2018년 4월부터 전라도를 발견할 것이다.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한국의 발견 50+1’프로젝트란...

후원자 50명이 전시 사진 직접 골라

전시 뒤 후원자에게 증정…후원금 절반은 생활비로

50명의 후원자에게 각 100만원씩 받아 1년간 한곳의 도나 시를 구석구석 사진으로 찍는 ‘한국의 발견 50+1’ 프로젝트는 한국 사진계에서 하나의 경이로운 사건이었다. 제목 ‘한국의 발견’은 <뿌리 깊은 나무>를 만들었던 한창기 선생의 기획으로 한국을 11개 시·도로 나눠 인문학적으로 접근해 이 땅과 이 땅의 사람들을 글과 사진으로 엮어낸 명저 <한국의 발견>에서 임재천씨가 따온 것이다.

사회관계망을 통해 후원금을 모을 생각은 임재천의 사진집 <한국의 재발견>이 성공한 데서 비롯됐다. 2000년부터 10년 동안 임재천씨는 혼자 걸어다니면서 한국의 구석구석을 뒤지면서 찍었고 2013년에 <한국의 재발견>으로 책이 나왔다. 이때 페이스북에서 예약판매를 시도했는데 2013년 10월23일에 시작해 11월20일에 마감할 때까지 450권이 팔렸고 그날부터 8일 뒤에 1쇄 1천권이 다 나가서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자신이 생긴 임씨는 기관이나 기업에 손을 벌리지 않고 일반 사진애호가들의 후원을 받아 ‘한국의 발견 2’를 하기로 했다. 이듬해인 2014년에 역시 페이스북을 통해 후원금을 받기 시작했는데 당시 불과 8일 만에 5천만원을 모을 수 있었고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50명의 후원자는 사진전시에 걸릴 50장을 한장씩 고를 권리가 있으며 전시가 끝나고 나면 본인이 고른 사진 작품(액자 포함)을 16인치×20인치 크기로 증정받게 된다. 후원금은 작가의 활동을 돕기 위한 돈이기도 하며 동시에 사진작품 구입비이기도 한 것이다. 사진가들은 늘 경제적으로 고민하고 있다. 그 때문에 투잡을 하거나 기관이나 기업의 후원을 받을 궁리를 늘 해야 하는데 임재천씨는 비록 여유있는 액수는 아니지만 마음 놓고 사진만 찍을 수 있는 활로를 개척해낸 것이다. 사진가도 가장이니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 그래서 임재천씨는 후원금 5천만원 중에서 절반은 생활비로 쓰고 1500만원은 촬영 경비로, 1천만원은 전시를 위한 인화와 액자 비용으로 쓴다고 밝혔다. 막상 3년 해보니 촬영 경비로 잡아둔 1500만원은 늘 모자라서 실제로는 살림이 많이 빠듯하다고 한다.

곽윤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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