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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2.21 17:38 수정 : 2017.02.21 20:19

맞은편 포철 공장·굴뚝 배경으로
조용했던 마을의 변화 ‘왁자지껄’

누군 지폐 문양 팬티 입고 놀고
누군 양손에 깃발 들고 굿하고
누군 맨손체조하고 누군 좌선하고…

사진마다에도 에피소드가 있지만
앞뒤 이어 사진집 전체를 보고
유추하고 보완해야 큰 그림 나타나

할아버지 얘기와 읽은 문학작품 등
수십년 삶에 오롯이 녹아
순간순간 영감 떠올라 셔터 눌러

알레고리로 본 안성용의 <포항 송도>

1990년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포항 송도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사진가 안성용(51)이 2월 초 사진집 <포항 송도>를 펴냈다. 모든 사진에 사람이 들어 있고 절반 이상의 사진에 송도해수욕장 건너편 포스코(포항제철)의 공장과 굴뚝이 배경으로 보인다. 사진집은 조용했던 송도의 삶이 포항제철이 들어선 이후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왁자지껄하게 들려주고 있다.

안성용의 <포항 송도>는 사진마다 독자적인 에피소드가 들어 있는 특이한 구성을 띠고 있다. 그 구성을 분석하기 위해 알레고리(우화)란 개념을 도입한다. 안성용의 사진에서 뭘 연상하느냐는 독자적인 관객의 몫이다. 다만 반드시 사진에 들어 있는 것을 기본으로 삼아 읽기를 시작해야 한다. 아무리 해석의 자유가 있다 하더라도 없는 것을 상상하는 건 자유를 넘어선 행위다.

한 장으로 끝내려면 엉뚱한 길로

안성용의 작품 ‘바닷가에서 굿하기’(안성용은 작품에 개별적인 제목을 달지 않았다. 따라서 분석을 위해 임의로 제목을 붙였다)를 보면 포항제철이 보이는 바닷가에서 남자가 양손에 천을 붙잡고 춤추듯, 어떤 의식을 행하듯 걸어가고 여자가 생선을 한 마리 붙잡고 소원을 빌며 따라가고 있다. 또 다른 사진 ‘만원짜리 지폐 문양의 팬티 입고 눈 가리고 아웅 하기’에서 주인공 외에 오른쪽에 엎드린 아이가 보이고 뒤로 편하게 자리잡고 바람을 쐬는 여인들이 보인다. 역시 복합적이고 시대적인 독해를 위한 알레고리적 소재다. ‘해변의 스님’을 보자. 운동화와 밀짚모자를 벗어놓고 자리를 깔고 앉아 있다. 불공을 드리거나 책을 보거나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이다. 앵글 탓에 스님의 손은 사진에 드러나진 않지만 그가 앉아 있는 것은 눈에 보이는 사실이니 그런 추측을 할 수 있다. ‘안개 낀 바닷가에서 맨손체조하기’도 유사하다. 사진 속 남녀의 동작이 서로 다른데 몸뻬를 입은 여인은 피티체조하는 군인처럼 절도 있는 모습이라, 이들이 맨손체조를 하겠거니 상상하는 것이다. ‘벌거벗은 석상을 따라 만세 부르기’는 딱 만세 삼창 장면이다. 청바지, 청치마를 입은 두 여성이 “포항 만세, 포철 만세, 근대화 만세”를 외치지 않았을까?

‘바닷가에서 굿하기’ <포항 송도> 사진집 93쪽
‘해변의 스님’ <포항 송도> 사진집 39쪽
’만세 부르기’ <포항 송도> 사진집 21쪽

‘눈 가리고 아웅하기’ <포항 송도> 사진집 25쪽
<포항 송도>에 실린 사진들의 절반 이상에서 포항제철이 배경으로 드러난다. 공장 건물 자체가 상징물이고, 사진 속 건물도 그저 상징으로 쓰인다. 고민할 일도 없이 보이는 그대로다. 한적한 포항에 개발의 표상인 포철이 건설되었다. 주민들에게 포철이 어떻게 다가가는지를 보여주는 것은 굿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행위는 상징이 아닌 알레고리다. 건물이나 구조물, 조형물만 찍은 것은 상징만 찍는 것이어서 확장성이 없다. 무엇보다 시각적으로 읽어낼 근거가 부족하다. 하지만 안성용의 작품들 대부분엔 사람이 들어 있고 그들은 뭔가를 하고 있는데 그 행위는 그 사람의 것이다.

포철이 들어서고 이곳 주민의 삶에 어떤 변화가 왔는지를 한 장의 사진으로 다 알 수는 없다. <포항 송도>의 사진들마다 이야기는 들어 있지만 그림과 달리 사진은 한 장으로 끝을 내지 못한다. 그걸 한 장으로 끝내려는 욕심, 한 장으로 끝낼 수 있다는 착각이 많은 사진가를 엉뚱한 길로 인도한다. 반면 <포항 송도>는 사진집 전체를 봐야 이야기를 읽고 해석할 수 있다. 여러 사진을 앞뒤의 인과관계에 따라 연상하면서 읽어나가고 앞 사진과 뒤 사진을 합하여 유추하고 보완하여야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기억 되짚어 보니 영화 속 그림이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 과정에서 어떤 영감 같은 것이 갑자기 떠올라 셔터를 누른다고 할 때, 그 영감의 실체는 무엇일까? 맥락 없이 갑자기 신의 계시를 받아 셔터를 누르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영감의 대부분은 개인의 경험 같은 직접 접촉이나 독서, 음악, 그림, 영화 같은 간접적 영향에서 비롯된다. 책을 읽다가 머리에 떠오르며 연상이 된 장면, 화가들의 그림을 봤던 기억, 영화의 한 장면 등이 뇌 속에 잠재되어 있다가 비슷한(때로는 엉뚱하게도 전혀 다른) 상황이 현실에서 눈앞에 번쩍하고 등장할 때 셔터를 누르게 된다.

지난달 21일 눈이 내린 토요일, 요세프 쿠델카의 사진전 <집시>를 한번 더 보기 위해 송파구 방이동 한미사진미술관에 다녀왔다. 이 미술관의 20층 휴게실은 전망이 좋다. 올림픽공원 야외스케이트장에서 얼음을 지치는 사람들이 보여 불현듯 셔터를 눌렀다. 왜 셔터를 눌렀는지 기억을 더듬다 보니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영화 <멜랑콜리아>에서 본 어떤 이미지가 연상되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네덜란드 화가 대 피터르 브뤼헐(1525~1569년)이 그린 <눈 속의 사냥꾼>이었다.

대 피터르 브뤼헐 <눈 속의 사냥꾼>
<눈 속의 사냥꾼> 부분

한미사진미술관 20층에서 찍은 ‘올림픽 공원 스케이트장’ 곽윤섭
내가 찍은 올림픽공원 스케이트장의 사람들과 브뤼헐의 <눈 속의 사냥꾼> 오른쪽 중간 부분을 비교해보자. <눈 속의 사냥꾼>은 월력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미술사가들에 따르면 브뤼헐이 12개월을 모두 그렸다고도 하고 격월로 6개월만 그렸다고도 하는데 현재 전해지는 것은 5개이며 <눈 속의 사냥꾼>은 12월~1월에 해당한다. 당시 소빙기였던 북유럽의 맹추위와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작품 속 얼음판 위에는 컬링, 스케이팅, 팽이치기, 썰매 타기 등의 겨울 놀이가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얼음 위 놀이의 도상학적 증거로도 유용할 정도다.

왜, 뭘 찍었는지 묻는 건 부질없어

1월과 2월 수차례 안성용 작가를 만나 <포항 송도>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작가에게 모든 사진에 대해 일일이 “왜, 무엇을 찍었는지” 물어보는 것은 부질없다. 대신 그의 성장 과정이나 작품 형성에 영감을 줬을 만한 것을 질문했다. 안성용은 어려서부터 고등학교 2학년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로부터 숱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컸다고 했다. 그가 읽은 여러 문학작품 중에서도 김명인의 시 ‘너와집 한 채’의 한 구절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에서 영감을 받아 김사인이 새로 쓴 시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했다. 이 밖에도 수십년 인생에서 그가 접촉한 것들이 종합되어 안성용만의 알레고리를 형성해냈고, 20년 넘게 포항 송도를 촬영하여 그 결과물이 사진집 <포항 송도>로 나오게 된 것이다.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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