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퍼키스. 안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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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키스 사진집 ‘바다로 떠나는…’
필립 퍼키스의 새 사진집 <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In a Box Upon the Sea)가 도서출판 ‘안목’에서 나왔다. 필립 퍼키스는 사진가이며 사진교육자다. 그는 사진에 대해 조금이라도 공부를 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봐야 할 책 목록에서 첫번째로 꼽히는, 불후의 명저 <사진강의노트> 저자이며 최근 사진집으로는 <인간의 슬픔>이 있다. 필립 퍼키스의 사진집을 본다는 것은 마음으로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해하려고 들지 말고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를 사서 포장을 뜯고 안에 들어 있는 글은 천천히 보겠다고 마음먹고 사진을 한 장씩 넘겨본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 조용히 덮어놓는다. 문을 열고 나가서 바람을 쐬고 온 다음, 스스로 물어보라. “이 중에서 가장 잘 기억이 나는 사진은 무엇이었는가?” 사진 강의를 하면서 <인간가족>이나 <윤미네 집>, <골목 안 풍경 30년>, <결정적 순간>(HCB), <미국인들>(로버트 프랭크) 등을 보여준다. 이런 유명 사진집 외에도 아마추어들이 찍은 사진들도 보여주고 내가 찍은 사진도 간혹 포함시킨다. 대체로 제목 정도는 이야기해주고 그 외 아무 말도 없이 사진만 1~2초 간격으로 넘긴다. 한장 한장에 설명을 달아서 보여주는 것은 나중의 일이다. 처음엔 그냥 사진만 보여준다. 화면에서 사진을 모두 내리고 불을 켠 다음 사진을 본 사람들에게 묻는다. 이 중에 가장 기억나는 사진은 무엇이었는가? 이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은 무엇이었는가? 이 두가지 질문을 섞어서 혹은 둘 다 물어보기도 한다. 대답을 잘하지 못한다.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너무 짧게 넘어간 탓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답을 한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의 사진 이해 수준이 드러난다. 한번 더 보자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번엔 좀 길게 3초 정도 간격으로 사진을 넘긴다. 뭘 물어볼 것이라는 것이 예정되어 있으므로 이번엔 다들 뭔가 잡아채기 위해 집중한다. 그리고 마찬가지 과정을 밟아보면 곧잘 답을 낸다. 그러나 두번째 감상 뒤에는 ‘영혼이 없는 답변’이 나오기도 한다. 본인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본인의 지식 수준에서 긁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당대 최고 사진 선생의 강의 노트연도·장소·제목·설명 없이 사진만
글과 사진 결합이 대세인 오늘날
한 장 한 장 보면 가슴이 떨리고
사진의 길이 훤히 열리는 듯하다 필립 퍼키스의 <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는 57장의 사진이 실려 있는데 연도와 장소 표시도 없다. 당연히 사진 설명이나 사진 제목도 없다. 다만 사이사이에 퍼키스가 직접 쓴 글이 10여 꼭지 들어 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심지어 한국인에게 영어라도) 글에 의지하고 싶은 본능이 나타난다. 사진만 하나둘 넘기다가 견딜 수 없는 조급함과 조갈증에 시달리게 된다. 이윽고 글이 몇 줄 나오는 쪽을 만나면 반갑기 짝이 없다. 글로 된 책을 길게 읽기 싫어하는 증상이 완전히 해소되기나 한 것처럼 집착하면서 글을 읽는다. 그런데 이런 배신감이라니…. 아무런 설명 없는 사진과 다를 바가 없다. 10여 꼭지 들어 있는 글은 그래서 사진과 다를 바가 없다. 다시 말하자면 이 책 <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엔 제목 외에 아무런 설명이 없이 오로지 사진만 보고 판단해야 한다. 글과 사진의 결합이 대세로 자리잡은 이 시점에 퍼키스의 <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를 들고 있노라니 반가운 게 아니라 몹시도 힘이 든다.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해하려고 하니까 힘이 든 것이다. 그럼 어떻게 봐야 하는가? 느낌으로 간직하여야 하는데 읽고 분석하려고 했으니 곤란한 것이다. 명색이 사진집과 사진 전시 소개를 주 업무로 하는 기자인 나로서도 수시로 ‘글쟁이의 함정’에 빠지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글을 읽고 이해하듯 사진을 읽고 이해하면 안 되는 것이다. 책의 제목이 유력한, 그리고 거의 유일한 힌트다. 퍼키스가 직접 인용해와 책의 앞장에 써놓은 두개의 인용구 중에 첫 인용구가 다음의 문장이다. 찰스 올슨의 막시무스 시편에서 따왔다고 밝히고 있다. “I set out now in a box upon the sea” 그리고 책을 만든 사람이 이 문장에서 아랫줄 ‘in a box upon the sea’를 제목으로 삼았다. 한글로는 ‘바다로 떠나는 상자 안에서’라고 했는데 이렇게 번역하려면 윗줄 ‘I set out now’도 포함해야 뜻이 통한다. “나는 이제 상자를 타고 바다로 출발하려 하네”쯤 되겠다. 사진들을 넘기기 시작했다. 눈밭의 나무, 식당, 시장, 연회장, 유람선, 낙타, 리모델링을 위해 비계가 세워진 건물, 미술관, 비 오는 바깥 풍경, 비 오는 날의 시골 도로, 파도와 전깃줄, 기찻길이 차례로 한 장씩 등장한다. 그리고 첫번째 글이 등장한다. 비유하자면 이 책 자체가 하나의 항해로 생각된다. 어려운 길을 시작했다. 사진으로 풀어나가는 것 자체가 모험이고 이 사진들을 따라가는 것도 모험이다. 자칫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힐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 거대한 향유고래가 저 앞에 있을 수도 있다. 이 항해를 끝까지 마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퍼키스는 사진집을 만들었으므로 그의 항해는 단락이 되었으나 사진집을 완성하는 것은 독자인데 우리 독자들의 항해는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여행이 시작되었다. 의지를 가지고 출발했든지, 타의에 의해 떠밀려 나갔든지 이제 길을 떠났다. 그리스 로마 시대 때 여행은 주로 항해로 묘사되니 제목도 그렇고 여기도 그렇다. 모험이 시작될 것이다. 불길하다. 극적이다. 고립되어 있다. 공허하다. 분리되어 있다. 유리되어 있다. ‘자, 바다다’라고 말하면서 1부가 끝이 났다. 2부의 시작은 글로 된 사진으로 문을 열었다. 시장 상인의 성찬이다. 글을 읽고 사진이 떠오르는 것과 사진을 보고 장면이 떠오르는 이 묘한 느낌이 퍼키스의 내공이다. 필립 퍼키스의 신작 사진집 <바다로 떠나는 상자 안에서>는 역작이다. 내가 아는 당대 최고의 사진선생이 자신의 사진 강의에 걸맞은 작품을 내놓았는데 한장 한장 보면서 손이 떨리고 가슴이 뛰고 사진의 길이 훤하게 열리는 듯하다. 출판사에서는 “소량이고 제작비가 많이 들어서 할인율 높은 서점에 공급하지 않고 안목 사이트에서만 팔기로 했다”고 밝혔다. 누리집(www.anmoc.com)에서 구입할 수 있다. 문의 전화 (031)718-2567. 곽윤섭 선임기자 kwak1027@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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