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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1.03 10:52 수정 : 2008.11.03 11:07

서울의 강수량 변화(1777~2007)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환경통신] 근시안적 ‘물 안보’

‘장영실 측우기’ 덕 상세 관측…1884~1910 대가뭄

1966년 기점, 계획 세워…장기간 기록 토대 삼아야

“한양으로 거지떼가 몰려들었다. 폭도로 돌변한 백성들 때문에 밤중엔 돌아다니기가 위험했다.…모내기를 하지 못한 모는 못자리에서 말라 죽어갔다. 먹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이 전국적으로 발생했다.”

 앵거스 해밀턴이란 영국인이 1901년 극심한 가뭄이 든 조선을 여행하면서 본 광경이다. 당시 조선의 이례적인 장기 가뭄을 분석하기 위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기상관측소 통신원이 제물포에 파견됐는데, 그 해 6~8월 한창 비가 와야 할 여름철 강수량이 104㎜에 그쳤다.

 1884~1910년 사이 한반도에는 사상 유례가 없는 혹독한 가뭄이 몰아쳤다. 그 27년 동안의 연평균 강수량은 874㎜였다. 1901년엔 374㎜밖에 오지 않았다. 대조적으로 1971~2000년 사이 30년 동안 서울의 연평균 강수량은 1344㎜였다.

 

 러시아 기상관측소 통신원까지 파견…1901년엔 374㎜만

 

 그러나 이 큰 가뭄 기록은 국가 차원의 물 수급 계획을 짤 때는 ‘없었던’ 일이 된다. 국가 수자원장기종합계획은 1967~1968년 가뭄을 최악의 사태로, 2001년부터는 1966년 이후 최대 가뭄을 기준으로 그런 상황에서도 물 부족이 없도록 수급계획을 잡는다.

 기후변화로 가뭄과 홍수 등 이상기상이 빈발하면서 좀 더 장기간의 강수기록을 토대로 수자원 관리를 해야 물 안보를 확보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와 눈길을 끈다.


 김승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수자원프런티어사업단 단장은 “지난 40년 동안 심각한 물 부족을 겪지 않은 것은 운 좋게 비가 많이 내려줬기 때문”이라며 “1900년을 전후한 극심한 가뭄이 당장에라도 닥친다면 극심한 물 부족 고통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전남북, 경남 지방 등 남부 지방에 가뭄이 이어진 21일 오후 바닥을 드러낸 전북 장수군 장계면 금덕저수지. 장수/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우리나라가 본격적으로 수자원 계획을 세운 것은 1970년대로 목표는 1967~1968년과 같은 가뭄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가장 최근의 큰 가뭄이 목표가 된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러나 이후 매 10년마다 짜는 수자원장기계획에서도 이 때의 가뭄이 기준으로 굳어졌다. 1967년의 가뭄은 영·호남 지방에선 심각했지만 한강유역엔 평년의 80% 정도 비가 왔다. 따라서 2001년부터는 전국을 일관된 기준을 적용하기 위해 기준을 ‘1966년 이후 최대 가뭄’으로 고쳤다. 가장 최근의 장기계획인 2006년의 보완계획은 따라서 1966~2003년을 검토구간으로 삼았다.

 그렇다면 왜 20세기 초의 큰 가뭄을 장기계획에 포함시키지 않았을까. 2006년 보완계획에 참여한 김승 박사는 “어떤 형태로든 최악의 가뭄을 고려에 넣자는 주장이 있었지만 뾰족한 대책도 없이 국민만 불안하게 한다는 판단에서 넣지 않았다”고 밝혔다. 만일 조선 말 규모의 가뭄이 닥쳐 한강이 사실상 말라버린다면 엄청난 사태가 벌어질 것이 뻔하다.

 

 1966년 기점 땐 1년만 물 부족…1777년 부터 땐 50년 ‘갈증'

 

조선 영조 46년(1770년) 제작된 측우기. 측우대 위에 원통 모양이 측우기이다. 기상청에 보관돼 있다.
우리나라의 측우기록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적어도 2시간 간격으로 측정한 자료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됐다. 세종 때 장영실이 발명한 측우기를 이용한 관측시스템은 임진왜란 때 붕괴했지만, 1772년 복구돼 <승정원일기> 등의 기록을 통해 자료가 남아있다.

 조선시대 측우기 관측자료를 분석해 온 임규호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는 “왕조 말의 정치적 혼돈기에 일부 측정자료가 부실한 점은 눈에 띄지만 그것을 고려하더라도 약 100년 전 큰 가뭄이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김승 박사가 임 교수 등의 연구를 바탕으로 분석한 결과(도표 참조)를 보면, 1777년부터 2003년까지 226년 동안 서울의 연평균 강수량은 1215㎜였다. 이는 수자원계획 수립 때 기준으로 삼는 1966~2003년 사이 37년 동안의 연평균 강수량 1400㎜보다 185㎜나 적은 값이다.

 김 박사는 2011년의 용수수요를 기준으로 한강유역의 물 수급 상황을 평가했더니 1966년 이후 자료를 근거로 한 2006년 수자원계획에서는 37년 중 1년만 물 부족이 발생해 97%의 안전도를 보였다. 물 부족 사태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계산이다.

 그러나 평가기간을 1777년까지 늘리면 물 부족 햇수는 50년에 이르며, 안전도는 78%로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수자원계획에서 물 부족이 가장 심했던 것으로 평가한 1975년 물 부족량이 7억㎥인데 비해, 측우기록 상 최대 갈수년이었던 1900년의 물부족량은 무려 111억㎥에 이르렀다.

 김 박사는 “우리는 극도로 강수 변동성이 큰 국토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며 “기후변화가 불러오는 새로 가뭄 발생 위험에 대비해 더욱 보수적으로 수자원을 관리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한반도 대가뭄, 2012년 시작해 2025년 정점

부경대 변희룡교수팀 분석

1653, 1777, 1901년 등 124년 주기로 대재앙

 

 조선 왕조에 종말을 불러왔던 대가뭄이 몇 년 뒤에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변희룡 부경대 환경대기과학과 교수팀은 최근 한국기상학회 가을 학술대회에 발표한 논문 ‘주기로 본 한반도의 다음 대가뭄’이란 논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연구팀은 측우기 관측결과와 조선왕조실록 등 역사기록을 토대로 역사상 가장 큰 가뭄은 1882년 시작해 1901년 정점에 이른 뒤 29년간 계속된 가뭄을 꼽았다. 두번째로 심한 가뭄은 1901년보다 124년 전인 1777년을 중심으로 13년간 계속됐다.

 이런 심한 가뭄은 124년씩 거슬러 올라간 1653년(실제로는 1652년)과 1405년에도 발생했다.

 연구팀은 그 근거를 조선왕조실록에서 ‘가뭄’이나 ‘기우제’란 용어를 사용한 빈도가 전체 왕조기간 평균이 각각 6.3회와 2.9회인 데 견줘 가뭄시기엔 23.8회와 10.3회로 잦다는 데서 찾았다.

 이런 주기에 비춰 다음 대가뭄은 2012년 시작해 2025년 정점에 이를 것이라고 이 논문은 내다봤다. 연구팀은 이런 124년 주기의 원인이 천문학적 이유일 것으로 추정했다.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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