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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6.18 10:35 수정 : 2008.06.18 19:11

지난 6일 저녁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광화문 네거리까지 도로를 가득 메운 15만여 시민들이 촛불을 치켜든 채 ‘고시 철회, 전면 재협상’ 구호를 외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환경통신] ‘기술위험 관리정책 비판’ 논문 나와
정부는 정치·사회·문화적 맥락 빼고 ‘괴담’ 탓만
경제를 안전에 앞세우며 독주해 불신·저항 불러

주성영 한나라당 의원은 지난 16일 그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광우병에 걸릴 확률은 벼락 맞을 확률의 3053분의 1이라며,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가 과장되고 왜곡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동복 전 명지대교수의 말을 따 “그렇다면 담배와 자동차 사고에 대한 촛불시위는 어째서 없는가?”라며 촛불 시위자들을 ‘생명 상업주의자’라고 비꼬았다.

광우병에 대한 집권당 정치인의 이런 시각은 그리 낯설지 않다. 정부와 그 주변 전문가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많은 시민들이 가장 답답해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광우병의 위험이 지닌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을 제거해 버리고 오로지 과학기술적 위험만을 들어 일방적 설득을 시도하는 정부의 기술위험 관리정책을 비판한 연구가 나왔다.

정병걸 동양대 교수와 성지은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박사는 지난 14일 동국대에서 열린 한국과학기술학회 학술대회에서 한 ‘정치화된 위험과 위험관리의 실패’라는 주제발표에서, “이번 쇠고기 사태를 계기로 위험관리를 제도화하지 않는다면 유전자변형작물이나 나노기술처럼 광우병 못지않은 폭발력을 지닌 기술위험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

지난 14일 한국과학기술학회(회장 김문조 고려대 교수) 학술대회가 `사회적 쟁점으로서의 과학기술‘을 주제로 동국대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광우병 사태를 기술위험 관리의 문제로 분석한 논문이 발표됐다. 한국과학기술학회 제공.

■ 위험 확률과 인식의 괴리

정 교수는 “인간광우병에 걸릴 확률은 1백만분의 1에도 못 미치지만 국민들은 ‘내가 걸리거나 말거나’, 곧 2분의 1 확률의 공포로 느낀다”고 말했다. 정부는 이를 두고 과학적 이해 부족과 비합리적 태도라며 ‘괴담’ 때문으로 돌렸다. 그러나 연구팀은 “위험은 단지 계산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일반인은 위험을 판단할 때 위험결과에 대한 기술적 예측 말고도 자발적 노출 여부, 재난 가능성, 예방적 통제가능성, 위험과 편익 분배의 공평함, 미래 세대에 대한 위협 등 다양한 평가기준을 동원한다. 예를 들어, 자동차운전이나 흡연이 실제로 더 큰 피해를 주더라도 익숙하지 않고 자신의 통제능력을 벗어나는 원자력발전소를 더 위험하다고 느낀다. 위험을 알고 스스로 선택한 위험과 남이 강요하는 위험은 차원이 다른 것이어서 비교할 대상이 아니다.


게다가 광우병은 공포를 불러일으킬 조건을 두루 갖췄다. 감염경로가 불확실해 누가 피해자가 될지 불확실하다. 치료법과 예방법을 모르고, 잠복기가 긴데다 감염되면 100% 가까운 치사율을 보인다.

연구팀은 이런 위험의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측면을 무시하고 과학적 문제로 단순화해 설득하려 든다면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킨다고 지적했다.

■ 신뢰의 붕괴

광우병에 대한 불신의 뿌리는 깊다. 영국 등 유럽 국가들도 처음엔 광우병이 인간에게 전파되지 않는다고 했다가, 환자가 발생하자 소의 특정부위나 특정 연령 이하의 소는 안전하다는 식으로 말을 바꿨다. 그러나 특정위험 부위는 계속 늘어났고 안전한 소의 나이는 거듭 하향 조정됐다. 소비자 안전보다 축산농가의 보호를 앞세운 정책이 더 큰 소비자의 불신을 불렀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정부는 2003년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하자 쇠고기 수입을 중단했다. 정부와 언론은 대중에게 미국산 쇠고기의 위험성을 강하게 부각시켰다. 그러나 한미 자유무역협정과 함께 ‘국민 건강’은 ‘경제’와 같은 수준의 고려대상이 되더니, 마침내 이명박 정부 들어 ‘경제’가 ‘안전’을 압도하게 됐다.

일반인은 어떤 위험을 받아들일지 여부를 관련 제도나 정부가 믿을 만한지로 판단한다. 정책이 결정되는 과정이 공정하면 내키지 않아도 따른다. 그러나 정부가 광우병의 위험에 대한 일관성을 상실하고 소통 대신 일방적 설득을 하려 하자 신뢰는 완전히 붕괴하고 국민적 저항이 일어났다.

■ 위험의 정치화가 해법

광우병처럼 불확실성이 큰 위험에서 “문제는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합의의 부족”이다. 또 위험의 객관적 평가가 어렵고 과학적 근거가 부족할수록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정당성의 확보가 중요해진다.

정 교수는 “광우병 사태의 본질은 확률은 낮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위험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이다”고 강조했다. 과학적으로 완벽하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정치적으로 풀어가는 게 관건이라는 얘기다. 그는 “시민참여나 공개적 토론 같은 ‘위험의 정치화’를 받아들여 공식적인 정책의제로 다룸으로써 위험에 대한 과도한 공포의 확산으로 인한 소모적 논란을 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한국은 기술위험관리 후진국

대중 무지 탓 돌려…사후 대응 중심

우리나라는 압축 성장 과정에서 기술위험을 부차적인 문제로만 다루는 등 기술위험 관리에서 선진국에 뒤떨어지는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성지은·정병걸·송위진 박사팀은 지난 연말 발간한 정책보고서 ‘탈추격형 기술혁신의 기술위험 관리’에서 광우병, 환경호르몬, 비접촉무선인식기술(RFID), 휴대전화 전자파, 나노기술, 유전자 조작 식품 등의 기술위험을 사례로 선진국과 우리나라의 기술위험 관리 차이를 분석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외형적으로는 기술영향 평가 등 선진국과 비슷한 제도와 정책수단을 받아들였지만 실질적으로 운영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무엇보다 많은 관료와 전문가들은 과학기술과 관련된 사회 갈등의 주원인을 대중의 무지와 외부 개입에서 찾고 있다. 과학적 소양이 부족한 시민들에게 언론과 운동단체가 개입하면서 과학기술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복잡하게 얽히고 갈등이 발생한다고 본다는 것이다. 당연히 의사결정은 관료와 일부 전문가의 몫이고 일반인은 홍보와 계몽의 대상이 된다. 또 기술위험은 기술개발의 부차적 문제로 치부된다.

기술위험에 대한 대응은 선진국처럼 예방적이기보다 사후적 대응 중심이다. 이는 기술위험을 담당하는 독립된 행정체계가 존재하지 않고 해당분야 산업발전을 추구하는 부처가 기술위험 관리도 맡기 때문에 빚어지는 일이다.

이처럼 정부가 개발 중심 시각에 매몰돼 있기 때문에 기술위험 문제는 정책 의제화되기 힘들다. 기술위험에 대한 통제와 규제가 기술 발전을 가로막는다고 믿는 경향도 강하다. 따라서 사건이 발생해도 수동적으로 대응하고, 큰일을 치르고 나서도 배우는 것이 없다.

보고서는 “기술 발전과 안전을 동시에 고려하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며 “기술위험 관리 기능을 기술개발 담당부처에서 떼어내거나 기술위험 전담 기능을 신설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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