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4.30 13:58
수정 : 2008.05.02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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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른 계곡에 축대를 쌓아 만든 다랑논은 산골 농민의 애환이 서린 경관이다. 지리산 길 시범 구간인 ‘다랭이 길’을 탐방객이 지나고 있다. 사단법인 숲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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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현장] 우리나라 첫 장거리 ‘도보길’ 시범구간 21km 개통
산을 둘러 싸고 숲길·강변길·논둑길·마을길
“자연·문화 그리고 자신을 만나는 길 되길”
오솔길엔 솔잎이 푹신하게 깔려 있었다. 지난 27일 경남 함양군 마천면 의탄분교 폐교 터에서 열린 ‘지리산 길’ 개통식을 마친 참가자들은 금계마을과 창원마을을 잇는 시범구간 걷기에 나섰다. 솔숲을 30분쯤 지나자 아이나 친구들과 나누던 이야기 소리가 잦아들면서 참가자들은 자기 발걸음 속으로 빠져들었다. 멀리 지리산 주 능선이 시야에 들어왔고 새들의 노랫소리가 갑자기 크게 들렸다.
우리나라의 첫 장거리 도보길이 지리산에 열렸다. 조성사업이 마무리되면, 국립공원의 능선을 한 걸음도 밟지 않으면서 지리산을 온전히 품안에 넣을 수 있게 된다.
지리산을 원형으로 둘러싼 옛길, 고갯길, 숲길, 강변길, 논둑길, 농로길, 마을길을 따라 이어진 800리 도보길을 모두 걷는 데는 약 한 달이 걸린다. 정상을 향한 속도전 등산과는 차원이 다르다.
사업 주체인 사단법인 숲길 이사장인 도법 스님은 “지리산 길 조성사업은 현대문명의 근원적 병폐를 치료하는 대안을 모색하자는 문제의식에서 시작됐다”고 말했다.
속도의 문화를 느림과 성찰의 문화로, 수직의 문화를 수평의 문화로 되돌리자는 소망이 도보길에 담겨 있다.
“길을 걸으면서 자연과 마을과 문화를 만나고, 끝내는 자기와 만나 영혼의 위안을 얻는 순례의 길이 됐으면 한다”고 스님은 강조했다.
이날 개통식을 한 시범구간은 전북 남원과 경남 함양을 잇는 ‘다랭이 길’과 함양군 마천면의 ‘산사람 길’ 등 모두 21㎞이다.
창원마을 다랑논은 다음달 중순의 모내기를 앞두고 땅고르기 작업에 바빴다. 가파른 골짜기에 돌축대를 쌓아 층층이 만든 다랑논은 고단했던 농민의 애환이 담긴 이곳의 독특한 산골경관이다. 그러나 손이 덜가는 밭으로 바뀌거나 아예 버려진 다랑논도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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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른 골짜기에 층층이 있는 다랑논. 사단법인 숲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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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봉 숲길 상임이사는 “지리산 길은 피폐해진 산촌 마을 살리기와도 연결돼 있다”며 “마을회관이나 빈 집을 고쳐 숙박시설을 만드는 한편 당산제 등 마을축제를 되살리고 감자수확, 묵 쑤기 등 체험프로그램을 발굴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마을과 마을을 길로 잇고 여기에 교류의 피를 흘려 무너지던 공동체를 되살리자는 것이 이 사업의 가장 큰 목적이다.
산에 오르면 산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산 둘레를 걸으면 능선은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다랭이 길’은 지리산 주 능선을 가장 오랫동안 조망할 수 있는 구간이다.
반면, ‘산사람 길’은 주로 숲길이다. ‘산사람’은 지리산 주민들이 한국전쟁 전후에 빨치산(공산 게릴라)을 이르던 말이다.
안내에 나선 의중마을 주민 허엽(77)씨는 깊은 골짜기를 가리키며 “저리로 들어가면 빨치산이 숨어있던 비트가 있다”고 말했다. 지리산 길의 탐방 안내자인 ‘길동무’로 나선 그는 “낮엔 대한민국, 밤엔 인민공화국 시절 의용군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숨어 지냈다”고 말했다. ‘산사람 길’의 주요 이정표인 벽송사는 한국전쟁 때 빨치산의 야전병원이 설치됐던 곳이다. 그러나 이 절은 허씨가 살던 의중마을과 함께 경찰에 의해 불태워지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절 뒤에 자리잡은 1천년 된 소나무 거목인 ‘도인송’과 ‘미인송’만이 굴곡진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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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과 경상남도 함양을 잇는 다랭이 길. 지리산 주 능선을 가장 오랫동안 조망할 수 있다. 사단법인 숲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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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랭이 길과 산사람 길 모두 주민과 상인의 주요 이동통로였지만 그저 ‘광목길’ ‘소금길’ ‘벽송사 길’ 등으로 불렸다. 도로가 생긴 뒤에는 속절없이 버려졌다. 숲길 곳곳에 과거에 다랑이논이었음을 짐작케 하는 돌축대들이 나타났다.
나무와 풀을 솎아내고 계단을 설치하는 등의 사업은 지난해부터 시작됐다. 윤정준 숲길 기획이사는 “최대한 원형을 복원하고 부대시설을 최소화하는 원칙으로 조성했다”며 “방부목 대신 콩기름을 쓰고 그 지역 재료를 쓰는 등 신경을 썼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설 자체보다도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시범구간을 둘러본 이창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는 “지리산 길에서 발굴되고 만들어지는 이야기가 방대한 문화적 콘텐츠가 될 것”이라며 “또 하나의 여가시설이 아닌 이야기가 풍부한 길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남원·함양/글·사진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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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길 이렇게 조성된다
‘지리산 길’ 사업을 주관하는 ‘숲길’은 대안운동을 하는 지리산생명연대가 지난해 설립한 법인이다. ‘숲길’은 복권사업으로 조성된 녹색자금 지원을 바탕으로 산림청, 관련 지자체, 마을 주민들과 힘을 모아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지리산 길’(www.trail.or.kr)은 전남·전북·경남 등 3개 도와 구례·남원·하동·산청·함양 등 5개 시·군의 100여개 마을을 잇는 300㎞ 길이의 장거리 도보길이다. 국립공원 1호인 지리산과 섬진강의 자연과 역사·문화자원을 체험하도록 노선을 정했다.
전북 남원 구간은 지리산 주 능선을 바라보기 좋은 역사 길이다. 운봉 들녘 제방길, 남원~구례 옛 고갯길인 숙성치, 동편제와 이성계의 전설이 남아 있는 제 2 통영대로 등이 있다.
전남 구례에는 구례~하동 옛 고갯길의 원형이 남아 있고 섬진강을 바라보며 걷는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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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마을에서 창원마을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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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하동 구간에는 차밭과 섬진강을 따라 걷는 길과 악양 들판을 바라보는 경관이 뛰어나다. 최치원, 청학동, 빨치산, 박경리의 <토지> 등의 이야기가 있다.
또 경남 산청 구간은 남명 조식의 흔적을 찾는 지리산 동부 능선 웅석봉 숲길이며, 함양 구간은 엄천강을 따라 가는 강변길로 빨치산의 역사가 남아 있기도 하다.
오는 1일부터 일반에 공개되는 시범구간은 전북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대동마을에서 경남 함양군 마천면 의탄리 금계마을까지 11㎞ 구간인 ‘다랭이 길’과 마천면 의탄리 의중마을에서 휴천면 송전리 세동마을까지 10㎞ 거리의 ‘산사람 길’ 등 모두 21㎞이다. 입장료는 없다. 아직 마을에 숙박시설이 갖춰지지 않아 면 소재지에서 묵어야 한다.
숲길은 오는 2012년까지 100억원을 들여 ‘지리산 길’의 모든 구간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전국에 장거리 도보길 조성 붐
주 5일 근무제가 정착하고 수준 높은 탐방을 원하는 수요가 늘면서 장거리 도보길을 조성하려는 움직임이 정부 부처를 중심으로 활발히 추진되고 있다.
환경부는 지난 3월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생태탐방로 조성을 핵심과제의 하나로 보고했다.
환경부는 2017년까지 총 1626억원을 들여 전국에 약 2700㎞ 길이의 생태탐방로를 조성하기로 하고, 시범사업으로 올해 안에 경북 안동시에 3㎞ 길이의 ‘퇴계 오솔길’을 조성하기로 했다.
생태탐방로는 ‘국민이 자연과 문화·역사를 즐기고 체험할 수 있도록 조성한 도보 중심의 길’이라고 환경부는 정의하고 있다.
탐방로의 노선은 5대 강의 강길과 영남대로, 삼남대로 등 옛길, 남해 연안 해안길 등이다.
산림청은 ‘숲길’이란 이름으로 장거리 도보길을 추진하고 있다.
김현수 산림청 휴양등산과장은 “지리산 말고도 울진, 오대산, 한라산, 비무장지대 등에서도 숲길을 조성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산림청의 숲길사업은 △청소년과 노년층을 위한 수평적 여가문화 개발 △지역문화와 산촌개발 △복권기금 지원을 통한 민간단체 주도로 추진 등의 특징이 있지만, 환경부의 생태탐방로 조성 사업과 거의 비슷한 성격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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