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과 집착이 무섭다는 내 남친의 ‘망할놈의 쿨’에 관하여. 일러스트레이션 최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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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오지혜의 오여사상담소
Q 구속과 집착이 무섭다는 내 남친의 ‘망할놈의 쿨’에 관하여 문화예술계에 종사하는 남자와 엇비슷한 일을 하는 여자가 만났습니다. 남자가 “내 여자가 되어 달라”고 해 여자는 그러기로 했습니다. 한데 관계가 시작된 이후 남자가 본인은 ‘자유로운 영혼’이라 커밍아웃(?)을 합니다. 구속·집착 이런 거 무섭답니다. 무섭게 집착하는 여자 친구와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러려나 이해하려 해도 좀 아니다 싶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여자친구 있냐 물으면 뭐랄거냐 그랬더니 없다 그럴 거랍니다. 사생활을 뭐하러 오픈하냐, 있다고 하면 뭐하는 사람이냐 결혼은 언제 할 거냐 질문이 이어질 텐데, 이럽니다. 남자에게 복잡한 일들이 겹쳐 한 보름 못 만났습니다. 문자 한 통 없더군요. 그러다가 태연히 보고 싶다는 문자를 보냅니다. 만났습니다. 그동안 뭐했냐 했더니 머리 식히러 여행도 다니고 이런저런 일 정리를 했답니다. 여자도 혼자 여행하는 거 안 해 본 바 아니고 그러고 싶은 기분 압니다. 하지만 최소한 ‘여자친구’를 생각한다면 같이 가자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 여행 간다 얘기 정도는 하고 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여자는 남자보다 네 살 연상이고 노처녀의 대열에 든 지 오래입니다. 그렇다고 결혼에 목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전부터 한 가지 바람이 있었으니 같은 업계의 사람은 만나지 않아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찌나 자유로운 영혼들이 많으신지 ‘사람 나름’이라는 생각도 애초에 버렸고 아침저녁으로 출퇴근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습니다만 어쩌다 이 남자랑 엮였는지 자신이 밉습니다. 여자도 남자처럼 가끔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그걸로 충분하다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자신은 죽었다 깨나도 그 망할 놈의 ‘쿨’이 안 되리라는 거 잘 압니다. 수신 거부해야겠죠? A 따지지 마세요, 얼른 헤어지세요 그 남자는 당신을 전혀 사랑하지 않아요. 당신의 글 처음부터 끝까지 구석구석을 살펴봐도 그 사람의 당신을 향한 ‘사랑’은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어요. ‘그 남자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인가? 뭐 그런 제목의 책도 있잖아요. 좋긴 한데 남자 쪽이 좀 심드렁한 거 같고 그렇다고 끝내자니 정들어서 안 되겠고, 그러다 보면 저 사람도 속으로는 날 사랑하는데 표현이 서툴러서 일거야, 자기환상을 만들어 내게 되죠. 그런 분들한테 그 책은 “얘! 정신차려! 그 사람은 너 전혀 관심 없어!”라고 말해 주는 책이라고 하네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그 분은 당신을 전혀 사랑하지 않아요. 게다가 친구로조차 생각지 않고 계시네요. 당신말대로 작은 배려조차 없으신 걸로 봐서 그래요. 헤어지세요. 남친이 나쁜 사람이라서기보다는 두 분이 어울리지 않아서라는 게 저의 만류 이유입니다. 지금 당신의 남친하고 거의 똑같은 멘트를 날리고 똑같은 행위들을 해대는데도 아무 문제 없이 사귀고 있는 짝을 종종 봅니다.(물론 흔하진 않겠죠.) 그들이 행복한 이유는 여자의 ‘헌신적인 사랑’이 아니고 정신세계가, 말하자면 연애관이 같기 때문입니다. 당신과 당신 남친은 사랑을 하며 살아 가시기에는 세계관이 너무 큰 차이를 보이고 있으니 억지로 견뎌봤자 속 끓을 일만 늘어날 거라는 거죠. 여친 있냐고 물으면 없다고 할 거라는 거, 언뜻 들으면 누구나 ‘이런 나쁜!!’ 할 수 있는 대목이지만 진짜 나쁜 놈은 당신 없는 곳에서 잡아떼면 뗐지 애인이 물어보는 앞에서 그렇게 얘기하진 않습니다. 게다가 사생활 오픈했다가 덴 사람인양 말하는 ‘나름 명분’도 갖고 있네요. 사랑은 화장품 향기 같은 거라고 강석경 선생이 말씀하셨죠. 남친께서 당신이 자기를 받아 준 바로 그 순간부터 사랑이 식기 시작한 사실을 차마 고백하기 민망해서 계속 둘러대는 건 아닐까요? 그리고 여행을, 그것도 ‘이것저것 정리할 게 있어서 떠나는 여행’을 여친과 꼭 같이 가야 한다고는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답니다. 하지만 ‘고지’를 안 하고 간 건 분명 예의 없는 행동이었네요. 그런 분들은 아마 ‘한 술 더 뜨는’스타일의 여인을 만나면 그때서야 당신한테 자신이 얼마나 몹쓸 연애를 저질렀는지 깨달으시겠죠. 하지만 지금 이 상태에선 따지고 들면 도망만 더 멀리 갈 뿐 결코 바뀌진 않을 것 같네요. 아! 그런데 ‘자유로운 영혼’을 필수로 삼고 살아가는 ‘문화예술계 종사자’로서도 한 말씀 드려야 겠네요. 예술하는 사람들이 선망, 혹은 누리고 살고 있는 ‘자유로운 영혼’이란 세상의 편견과 선입견에서 자유롭고 당대의 권력에 눈치보며 살지 말자! 뭐, 이런 걸 말하는 거랍니다. 내 여자가 되어달라 해놓고 말 없이 여행 다녀오고 작은 배려조차 안 하는 건 영혼이 자유로워서가 아니라 인격이 모자라서입니다. 출퇴근하는 사람들은 진지하게 연애하고 딴따라들은 죄 양아치들이라는 것도 굉장한 편견인 것 같습니다. 사람 나름! 맞아요.
오지혜의 오여사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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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여사상담소’는 이번주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좋은 글 주신 오지혜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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