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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4.09 20:00 수정 : 2008.04.12 14:31

지혜로운 배신을 연구하세요

[매거진 Esc]오지혜의 오여사상담소

Q 해외에 눌러사는 게 불효가 될 텐데, 파파보이는 되기 싫고…

올해 29살로 영국에서 유학을 하는 학생입니다. 학업을 곧 마치는 대로 캐나다로 이민 가서 정착하려고 합니다. 한국에서의 개인적 일들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앞으로 저의 삶의 질에 대한 고민과 가족과 아이들 때문이죠. 저의 고민은 이런 마음을 아버지에게 어떻게 표현해야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제가 이곳에서 박사 공부까지 하길 원하십니다. 근데 저는 박사 공부를 할 생각도 없고 한국에 정착할 생각도 없는데 아버지를 설득할 자신이 없습니다.

전 장남이기도 합니다. 아버지는 새어머니를 비롯한 가족이 있으십니다. 경제적으로도 윤택한 편이시고요. 개인적으로 이게 불효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마음은 불편한 게 사실입니다. 같이 있는다고 꼭 효도를 하는 건 아니지만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는 게 영 꺼림칙합니다. 아버지랑 저의 관계는 한국에서 있을 때는 갈등과 폭언이 오갈 정도로 안 좋다가 유학 와서 제가 아버지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고 조금씩 마음을 열면서 이전보다 훨씬 좋아졌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지금 굉장히 자랑스러워하시고 아버지의 희망과 삶의 기쁨에서 제가 큰 부분을 차지하는 거 같습니다. 특히나 이전에 못했기 때문에 더 기대를 많이 하시는 거 같네요. 그렇다고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파파보이가 되고 싶지는 않은데 어떻게 하면 되지요? 일단은 이민이라는 말은 꺼내지 말고 캐나다에 취직해서 살다가 그냥 거기서 뭉개버리는 방식으로 속일까요? 어떤 게 좋은 건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A 이 땅엔 왜 이렇게 자식을 자기가 키우는 화초 정도쯤으로 생각하거나 아님 자기가 원격 조종하는 로봇인 줄 아는 부모들이 넘쳐나는 걸까요? 아마도 우리 부모 세대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국가도 학교도 사회도 그들의 부모도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건강하게 자기 인생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질 못하셨으니 그저 자기 인생을 자녀에게 송두리째 파묻어 버리고 나중에 늙어서 평생 쏟아 부은 정성을 계 타듯이 타 먹으려 드니, 집집마다 이 난리들이 나는 거죠.

제가 이곳에서 누누이 말씀드렸죠? 부모 사랑은 하늘과 같다는 거 다 뻥이라구요. ‘조건’ 그거 다 있다구요. 아들이라 해도 자식까지 있는 한 집안의 가장인데, 그의 인생을 이래라저래라하고 자기 말 안 들으면 삐치거나 ‘폭언’하는 거, 그게 다 당신의 아버지가 당신을 키우실 때 자기 자신을 당신에게 ‘올인’했기 때문이고, 그거 이제 보상받으시려고 그러는 거거든요. 심지어는 당신 아버지 같은 수많은 우리의 부모님들은 그게 최고의 자식 사랑 법이라고 굳건히 믿고 계시니 환장할 노릇이죠. 물론 한편으론 마음이 짠하기 이루 말할 수 없답니다. 방법이 잘못돼서 그렇지 그 사랑의 ‘양’만큼은 하늘에 맞먹게 큰 건 확실하니까요.


파파보이가 되긴 싫다 하셨지만 파파보이 기질이 보입니다. 물론 당신을 그렇게 키운 건 당신 아버지시구요. 자, 그러나 그건 과거일 뿐 이제 와서 날 왜 이렇게 키웠냐고 따지고 들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버지한테만 책임을 묻기엔 이미 당신은 서른을 눈앞에 둔 성인이고 게다가 아이들의 아버지십니다. 그러니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당신 아버지로부터 하루빨리 독립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비슷한 상담 질문이 오니 답도 비슷해질 수밖에 없네요. 제가 말씀드리는 독립이란 아버지와 연을 끊으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몸은 계속 연을 맺되 정신과 영혼이 독립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제일 좋은 방법은 더이상 이래라저래라하는 거에 휘둘리지 않게 경제적으로도 독립을 하시는 겁니다. 하지만 나이 스물아홉에 마누라와 애 둘 딸린 학생 신분은 현실적으로 그게 제일 취약점이실 겁니다. 파파보이 소리 듣기 싫은데도 아버질 설득할 자신이 없는 이유 중의 하나도 그동안 과하게 지원받아 오신 게 민망해서이기도 하잖아요. 그렇죠?


오지혜의 오여사상담소
이곳에 상담을 요청해 오시는 분들이 맞닥뜨린 상황은 정말 가지가지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는 ‘욕심’입니다. 아버지의 돈이 가져다 주는 달콤함과 독립해서 온전히 부모 노릇, 남편 노릇하는 것의 당당한 자유로움, 그 둘은 절대로 절대로 동시에 누릴 수 없다는 걸 먼저 깨달으셔야 합니다. 자신의 인생 플랜을 브리핑하는 것 하나 제대로 못 해서야 어찌 가정을 이루고 애는 또 어찌 키우겠어요? 게다가 아내들이 제일 짜증스러워하는 남편 상이 마마보이, 파파보이랍니다. 가족들 보기 체면이 말이 아닌 딱한 가장이 되는 거보단 좀 불편하고 좀 늦게 가는 인생이라도 자유로워지시길 권합니다.

아버지께 효도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고맙지만 가엾은 저 노인네를 어떡하면 상처 주지 않고 배신하나, 그걸 연구하세요. 인간에 대한 예의를 최대한 지키면서 지혜롭게, 그리고 천천히 속여 드리세요. 고지식하게 미리 다 브리핑하고 욕먹지 마시고, 5개년 계획 같은 거 치밀하게 세우셔서 적당히 뻥도 쳐 가면서 지혜롭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셨죠? 자, 그럼 파이팅!

오지혜 영화배우
고민상담은 go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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