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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0.02 21:54 수정 : 2008.10.17 17:58

하야시 야스오시

[진화하는 세계의 진보] 4. 일본
일 지역운동 개척자 하야시 야스오시의 조언

일본 마을만들기운동(마찌즈쿠리)의 개척자이자, 도쿄 희망제작소 이사장이기도 한 하야시 야스오시는 일본 지역운동의 산 증인이다. 그는 활동가들이 지역에 뿌리내리기 위해선 “교류와 공감을 통한 신뢰 구축이 가장 중요하다”며, “지역주민을 가르치려들지 말고 지혜를 배우려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일 두 나라 시민사회운동의 장단점을 짚어 달라는 요청에 그는 “걸어온 길과 사회적 상황이 조금씩 다르다”면서도 “일본은 시간이 오래 걸려 그만큼 실패도 거의 없지만, 한국은 속도가 매우 빠르다”고 에둘러 답했다. 그는 도쿄에 있는 자신이 사는 집 일부를 카페로 개조해 지역주민과 시민운동가들에게 토론과 휴식 공간으로 제공하고 있었다. 지난 6월25일 그곳에서 그를 만났다.

시간 오래 걸리지만 한국보다 실패도 적어
정치에 의존 말고 시민네트워크 구축 힘써야

-일본과 한국 시민운동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한국 시민운동은 전국적이다. 최근 촛불시위는 우리들에게 엄청나고 대단하게 보인다. 한국과 일본이 걸어온 길이 조금씩 다르고 사회적 상황도 다르다. 차이점이 있다면 한국은 문제에 대해 논의하는 방식이 집중적이고 역동적인 데 반해 일본은 조용하고 오랜 시간동안 진행한다. 그렇게 되면 실패가 거의 없다. 하지만 한국은 속도가 매우 빠르다. 일본도 논의하는 방식이나 문제를 촉발시키는 데 한국처럼 속도를 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왜 일본 시민운동이 지역·생활에 천착하게 됐나?

“1960년대 안보투쟁 뒤 많은 활동가들이 운동은 생활현장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느끼게 됐다. 눈에 띠지는 않겠지만 아래로부터 위로 향하는 방식으로 생활의 변화를 끌어 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일본의 정치는 거의 변하지 않았지만 그동안 이런 운동을 통해 시민의 생각이나 생활은 많이 변했다. 시민들이 수평적 소통방식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많이 바뀌었지만, 최근 새로운 힘이 침투해 들어가면서 또다른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바로 세계화, 지구화의 문제다.


-세계화, 지구화와 맞설 복안이 있는가?

“쉽지 않다. 고이즈미 정권 이후 의료보험에서도 돈 없는 사람은 죽으라는 정책으로 바뀌고 있다. 부자들의 세금을 깎아주는 것과 같은 정치적 문제들도 등장했다. 1970년대에 일본은 사회주의 국가에 버금갈만큼 사회안전망을 잘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젠 고령자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도 없다. 한국이나 일본이 그런 면에서 닮은 것이 많지만 해법은 간단치 않다. 중요한 것은 일본 상황이 행정관료, 정치가들에게 문제를 맡겨서 해결할 수 있는 시대를 넘어섰다는 점이다. 시민들 스스로 지역공동체를 활용해 시민의 힘으로 구체적인 생활상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사회시스템을 만들어 가는 게 더 중요한 문제다.”

-복지는 중앙정부 차원에서 해결할 몫 아닌가?

“중앙정부가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시민사회가 우선 그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으면 안된다. 또 정부가 그런 시스템을 만드는 게 시민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한다. 지역별 특성이 다른데 정부가 시스템을 짜고 시민사회가 그 빈틈을 메우는 방식은 바람직하지 않다. 시민들이 생활현장에서 실행하고 지원해 나갈때 지방자치단체 역시 뭘 지원해줄 수 있는지 구체적 내용을 알게 된다. 재정도 지방정부에 기댈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주민들의 요구를 지방정부 보조금으로 해결하려 한다면, 결국 세금이 더 비싸져야 하는 모순이 발생한다.”

-운동가들이 지역에 뿌리를 내리는 데 중요한 자세는 무엇인가?

“가르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지혜를 배우러 들어가야 한다. 활동가들이 시민을 보는 방식이나 관점이 달라져야 한다. 과거에는 시민을 이론으로 끌어가야 하는 존재로 봤다면, 현장에 들어가 시민들과 소통하고 관찰하면서 보통의 시민들에게 중요한 인식과 행동력이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됐다. 지역 안에 다양한 가능성과 해결방식이 있음을 인식하고 믿게 됐다. 지역 주민들은 자신의 문제를 잘 표현하지 못한다. 반면 활동가들은 그걸 잘 포착하고 정리할 수 있다. 서로 교류하고 공감하는 과정에서 신뢰가 쌓여 간다. 지역 주민들이 어떤 문제를 곤란해 하는지 듣고 관찰하고 배우면서 인간관계가 만들어지며, 자신이 이 지역에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먼저 고민하고 들어가는 접근 방식이 중요하다.”

-풀뿌리 운동을 통해 실현시키려는 이상이 뭔가?

“숲을 보고 활동하는 사람도 있고 나무를 보고 활동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역할에 따라 서로 논의를 거쳐 하나의 그림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어떤 형태로든 그걸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건 다양성과 다원성이다. 옛날에는 전체적인 계획 속에서 부문을 진행하는 방식이었는데, 이제는 그게 불가능하다.”

도쿄/이재명 기자 miso@hani.co.kr


도쿄토건 일반노동조합 소속 여성 조합원들이 도쿄 신주쿠 서부역 앞 거리에서 ‘소비세 증설 반대와 후기고령자 의료제도 폐지’를 요구하는 홍보 활동을 벌이고 있다. 도쿄/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정치와 간극 좁힌 시민운동

지방정부 정책에 영향력 압도적
선거땐 정당에 휘둘리는 악습도

일본에서 시민운동과 정치의 간극은 우리보다 훨씬 좁다. 일본 시민운동 진영 역시 시민운동가의 정치 진출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없진 않다. 하지만 한국이 시민운동가의 정치진출이나, 시민단체와 정당의 연대활동에 극도로 부정적인 것에 견주면 일본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이다.

피스보트 운동을 하다 정치인이 된 쓰지모토 기요미 사회민주당 의원(3선)은 엔지오 출신의 정계 진출이 갖는 장점을 조목조목 꼽았다.

그는 특정 집단이나 조직이 아닌 모든 사람의 이익을 추구하는 엔지오의 무당파성은 일부 협회 등 이익집단의 대표 역할을 하는 기존 정치인과 달리 공익에 기여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풍부한 현장활동 경험과 정보, 지식, 전문성으로 무장하고 열린 활동을 추구하는 활동방식도 장점으로 꼽았다. 수평적·네트워크적 활동은 위계적·수평적 구조에 찌든 기존의 일본 정치 풍토를 바꿀 수 있는 모멘텀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도 했다. 다만, 그는 “정치인으로서 엔지오의 조사나 정책, 입법활동을 할 수 있는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일 뿐”이라며 “엔지오와 정치는 서로 독립적인 존재로 선을 분명히 그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일본 사회운동이 정당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코이케 아키라 공산당 의원 조차도, 시민운동가들이 소속단체와 독립해 정치에 진출하는 것에 대해서는 찬성한다. 그는 일본 정당이 선거 때마다 시민운동을 수단화하는 악습이 남아있다고 비판했다. 자민당은 물론, 사민당도 각자의 지지기반이 되고 있는 경단련이나 노동조합 등을 선거에 활용하고 이들 단체들이 여기에 휩쓸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민운동가의 정계 진출과 관련해선, “정치가 시민운동의 지혜나 아이디어를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판단하면 적극적으로 활용해 볼만하다”고 말했다.

지역차원에서 시민운동이 적극적인 정치세력화을 꾀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훨씬 적극적이다. 생협 조직의 하나인 생활자네트워크는 직접 자신들이 뽑은 대리인을 지방의회나, 지방자치단체장으로 출마시킨다. ’대리인 운동’은 직업적 정치가나 관료, 즉 정당을 통해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려 하기 보다 ‘생활자 정치인’을 풀뿌리 시민조직이 직접 옹립해 정치권력의 획득을 추구하고, 성공하기도 했다.

생활자네트워크는 지난 20여년동안 지방의회와 지방자치단체를 풀뿌리 민주주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제도적 공간으로 보고, 시민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시민에 의한 정치를 실현시킨다는 취지 아래 활동하고 있다.

지방행정과의 관계도 훨씬 우호적이다. 김경묵 일본 주쿄대 교수는 “지방정부 수준에서는 시민사회단체 없이 공공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을 정도로 영향력이 압도적”이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이를 기반으로 중앙정치에 진출하려는 움직임도 나오고 있다. 도쿄생활자네트워크는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과 정책연합을 통해 민주당 소속으로 의원 한 명을 출마시켜 참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나까무라 에이쿠 사무국장은 “전국에 네트워크가 있기 때문에 하나의 정당을 만들 수도 있지만, 당선가능성 측면에서 지금은 오히려 다른 당과 연합해 후보로 나가는 게 높다고 봤다”며 “네트워크 후보를 기존 정당에 침투시키는 방식으로 중앙무대로 나갈 수 있는 루트를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다른 지역의 생활자네트워크는 이런 방식의 중앙정치 진출에 부정적인 게 현실이다.

도쿄/이재명 기자 mis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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