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진보 진영의 대표적 두뇌집단인 정책연구소의 지난 6월24일 회의 모습. 정책연구소는 연구원과 인턴들이 함께 회의에 참석해 주요 안건을 논의한다. 이날 회의에서는 외부 단체와 함께 아랍계 미국인들을 위한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문제가 논의됐다. 워싱턴/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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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 다시 그리고 함께
4부. 진화하는 세계의 진보 - (1) 미국
두뇌집단은 저수지다. 여론과 담론이 두뇌집단으로 모이고, 그것이 연구자들에 의해 요리돼 한 사회의 정책으로, 국가의 비전으로 새옷을 갈아입는다. 정책과 비전, 정보의 유통을 담당하는 언론이나 정치인도 두뇌집단이 튼실하지 않으면 함께 부실해질 수밖에 없다. 저수지가 마르면 논에 댈 물이 없는 이치와 다르지 않다.
한국의 두뇌집단은 허약하다. 특히 진보·개혁 진영의 두뇌집단은 재정이나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국민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갈 수 있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정책 대안들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의제를 선도하는 힘도 약하다.
<한겨레>는 제3부 ‘진보·개혁에 따져묻다’에 이어 제4부에서 우리보다 앞서 ‘새로운 진보’의 길에 대한 고민을 해온 다른 나라들의 사례를 살펴보기로 했다.
미국의 두뇌집단과 온라인운동, 독일과 영국의 두뇌집단들, 일본의 풀뿌리 민주주의 등 외국 진보그룹으로부터 시사점을 찾아보는 연중기획을 여섯 차례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다.
미국진보센터투자가 돈줄 밑천삼아
캠퍼스 진보활동 활발
미래의 지식인 키워내
지난 7월6일 <워싱턴 포스트>는 버락 오바마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할 경우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수석보좌관을 지낸 존 포데스타에게 인수위원회를 맡기려 한다고 보도했다. 그 뒤 포데스타가 주도적으로 설립한 미국진보센터(Center for American Progress)에 각별한 관심이 쏟아졌다. 창립된 지 불과 5년밖에 안 된 신생 두뇌집단이 ‘오바마 정부’의 핵심 두뇌 구실을 할 것임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3년 창립된 미국진보센터는 ‘진보판 헤리티지’를 지향한다. 대표적 두뇌집단인 헤리티지재단처럼 워싱턴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목표로 설립됐다. 조직 규모도 방대하고 활동도 공격적이다. 강연과 세미나는 물론,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이용한 홍보전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지난 6월25일 <한겨레>가 찾아간 미국진보센터는 ‘캠퍼스 진보운동’이 한창이었다. 연구원들이 대학에 찾아가 학생들과 세미나나 강연회를 여는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다. 캠퍼스 진보운동은 미래의 진보적 지식인을 길러내기 위한 것으로 학습활동 이외에 장학금 지원 사업도 한다. 존 뉴러 언론담당 부국장은 “보수 진영은 70, 80년대부터 로스쿨 등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일자리를 알선해줬다. 이들이 정부나 의회, 두뇌집단에 들어가 보수적인 정책을 만들거나 집행하면서 지난 20, 30년 동안 보수의 전성기가 진행된 것”이라며 “캠퍼스 진보운동은 보수 쪽에서 힌트를 얻은 셈”이라고 말했다. 정책연구소
차기 정부가 해야 할 일
정책 만들어 제안키로
다른 조직과 연대도 힘써 미국진보센터의 1년 예산은 2000만달러 규모로, 3700만달러의 헤리티지에는 못 미치지만 그래도 매우 탄탄하다. 조지 소로스를 비롯한 친민주당 성향의 투자가들이 거액의 설립자금을 댔고 지금도 재정에 막대한 도움을 주고 있다. 숀 기번스 미디어정책 국장은 “부시 정부의 지나치게 보수적인 정책으로 경제 불평등이 심화하자, 막강한 보수적 두뇌집단에 맞설 수 있는 탄탄한 조직이 진보 진영에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광범위하게 형성됐기 때문에 이런 지원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진보센터가 이념적 성격이 강한 이슈만 다루지 않고 기후 온난화, 줄기세포 등 과학과 만화, 영화 등 예술 영역까지 연구 분야를 넓힌 것도 ‘큰손’들의 지원을 유도할 수 있었다. 미국진보센터는 또 입법 로비 활동의 대가로 모금을 할 수 있는 ‘액션펀드’를 만들었다. 기부금에 대한 소득공제를 받는 대신 규제완화 등 직접적인 혜택을 원하는 기부자들을 겨냥한 것이다. 진보센터는 3년 만인 2006년 전국 300여개의 주요 두뇌집단들 가운데 언론 인용 빈도 순위 10위를 기록하는 등 굴지의 두뇌집단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미국진보센터를 제외하고는 재정난에서 자유로운 두뇌집단가 거의 없다는 데 진보 진영의 고민이 있다. 이와 관련해 진보적 지식인들은 진보적 두뇌집단 가운데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정책연구소(Institute for Policy Studies, 1963년 설립)의 활동에 주목하고 있다. 정책연구소는 최근 35명의 진보적 지식인들과 함께 ‘차기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는 주제로 공동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부시 정부의 정책을 평가한 뒤 새 정부가 반드시 추진해야 할 정책을 제시하는 프로젝트다. 프로젝트 보고서는 각 대선 후보 캠프에 전달되고, 잡지를 비롯한 인쇄매체에 기고 형태로 공개될 예정이다. 존 커배너 대표는 “오바마나 매케인 가운데 누가 대통령이 되든, 새 정부에 반드시 진보적 성향의 인재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압박하기 위한 것”이라며 “진보 진영은 그동안 반대운동만 해서, 반대는 잘하지만 정책을 제안하는 일에는 서툴렀다. 이번 프로젝트는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고 말했다. 정책연구소는 아랍계 미국인 단체들과 함께 이란 출신의 미국인들을 돕기 위한 프로젝트도 시작했다. 2003년에는 전세계 반전단체들과 함께 이라크전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조직해 보수 진영을 깜짝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워싱턴/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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