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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6.24 20:59 수정 : 2008.06.25 16:02

진보·개혁에 따져묻다 - 비정규직 해법 (상)

지난 23일 이랜드 그룹 노동자들의 파업이 1년을 맞았다. 1년 전, 이랜드 그룹은 비정규직법의 시행을 앞두고 계산원들을 외주 용역업체로 내몰았다. 한 달에 80만원 남짓 받던 아줌마 노동자들은 임금과 고용이 더 불안한 용역업체로 내몰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이랜드 파업 사태가 사회적 관심을 모았던 것은 기업이 비정규직법을 어떻게 악용할 수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기업이 비정규직을 고용할 수 있는 기간을 2년으로 제한하고, 부당한 차별을 시정하도록 한 비정규직법은 시행 초기부터 심각한 논란에 휩싸였다.

비정규직법은 과연 비정규직을 보호했을까. 지난달 9일 비정규직으로 살아가는 3명의 시민 패널들은 <한겨레>가 주최한 ‘진보ㆍ개혁에 따져 묻다’ 토론회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한겨레>는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을 고려해, 두 차례에 걸쳐 ‘따져 묻기’를 시도했다. 그 첫번째 주제가 비정규직법에 대한 평가다.

예상대로 명쾌한 답변과 해답을 끌어내기란 어려웠다. 진보ㆍ개혁 진영 내에서도 평가와 해법이 크게 엇갈렸기 때문이다. 비정규직법을 좀 더 기업친화적으로 바꾸려는 이명박 정부 아래에선, 이 법에 대한 평가와 대응이 좀 더 복잡해진 측면도 있다. 다만, 참석자들은 기간제ㆍ용역ㆍ파견ㆍ호출 등 갈수록 복잡해지는 비정규직 고용형태에 맞춰, 다양하고 구체적인 정책 수단이 강구돼야 한다는 데는 공감대를 이뤘다.

논란 많은 ‘비정규직법’ 어떻게

김문성 “지불능력 있는 기업도 책임 회피 늘어”
이목희 “차별 시정효과 3~7년 안에 나올 것”

지난해 7월부터 시행된 비정규직법에 대한 진보·개혁 진영의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먼저 민주노총과 진보정당들의 평가는 매우 혹독하다. 이들은 비정규직을 고용할 수 있는 사유를 제한하지 않은 채, 2년이라는 기간만 설정한 탓에 애초부터 한계가 뚜렷한 법이라며 반발해 왔다. 비정규직법을 폐지하고 정규직 전환 특별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이런 이유에서 나왔다.


반면, 비정규직법 입법을 주도한 참여정부를 중심으로 한 개혁진영은 1년만 지켜보자고 했다. 대신, 임금은 차등 지급받지만 고용은 보장되는 일명 ‘중규직’이 늘었고, 차별시정 사례도 점차 늘어날 것이라고 낙관했다. 법 시행 과정에서 불거진 문제들은 손질하되, 법의 긍정적 효과는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토론에선 입법을 주도한 통합민주당의 이목희 전 의원과 입법 저지 농성을 벌였던 진보신당 심상정 공동대표가 논쟁을 벌였다. 법 시행 1년이 다가오는 시점이지만, 이들은 2년여 전과 마찬가지로 팽팽하게 맞섰다. 양쪽의 논쟁이 오가는 동안, 비정규직 전문가들은 법을 둘러싼 논쟁을 잠시 접어두고 기업의 비정규직 고용을 감시하는 사회적 운동을 전개하자고 제안했다.

김문성=같은 일을 하는데도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비정규직법이 만들어졌지만, 지급 능력이 있는 기업들도 책임을 회피하는 경우가 수두룩했다. 이랜드 사태가 대표적이지 않나. 비정규직들의 정규직 전환을 피하기 위해 2년 안에 해고하거나 외주로 돌릴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이목희=이랜드 사태는 매우 특수한 상황이다. 악덕 기업주가 비정규직법의 취지, 사회적 합의 이런 것들을 무시하고 저지른 범죄다. 비정규직법을 만들 때 외주 용역을 규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못했다. 어느 누구도 이랜드 같은 사태가 터질 것이라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오미선=이랜드가 특수한 경우인가? 이 법이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사용자가 정규직 전환을 피하기 위해 외주화를 선택할 것이라는 우려가 많았다. 그런데 법 만든 분들이 그걸 몰랐다니 어이가 없다.

이목희=너무 현실을 심각하게 보는 건 아닌가 싶다. 이 법을 악용해서 나타나는 문제들은 별도의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지난 2월 기준 통계를 보면, 민간부문 300인 이상 사업장 113업체에서 2만여명이 정규직으로 전환됐고, 공공부문에선 9006기관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또 차별시정 효과도 한꺼번에 안 나타난다. 대기업은 3~4년, 중소기업은 6~7년 정도 걸린다. 차별이 시정되면 비정규직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차별이 없는데 뭐하러 기업이 비정규직을 쓰겠나.

심상정=비정규직 고용에 대한 남용 방지 대책이 전제되지 않았기 때문에 입법 효과는 의미가 없다. 눈 가리고 아웅식이다. 정규직 전환은 일명 ‘중규직’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이들도 여전히 고용이 불안정하다. 공공부문만 해도 정규직으로 전환시켰다면서, 인건비 책정은 안 했다. 사업비로 예산 책정이 안 되면 다 그만둬야 하는 것 아닌가. 차별시정 신청의 경우도 당사자가 신청하도록 돼 있다보니 회사 눈치를 보기 때문에 신청을 않게 된다. 결과적으로 비정규직 남용은 확대됐고, 차별시정은 ‘그림의 떡’이 됐다.

지난 23일 파업 1주년을 맞은 이랜드그룹 노조원들이 서울 서초동 뉴코아 강남점 앞에서 열린 결의대회에서 ‘비정규직 철폐’를 다짐하는 함성을 지르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김문성=맞는 말이다. 비정규직이 하는 일 가운데 한두 가지만 정규직과 다르면 동일한 업무가 아닌 게 돼서 차별시정이 안 된다. 법이 너무 허술해서 비정규직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

이목희=비정규직법이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것은 맞다. 차별 시정권을 노조에도 부여하는 등 일부 보완이 필요하다. 중규직의 경우도 그게 무슨 정규직이냐는 논란이 있지만, 점차 노조를 통해 처우를 개선해 나가야 할 일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비정규직법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은 대단히 무책임한 것이다. 이 법이 없어지면 비정규직들한테 유리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

심상정=좀더 지켜보자고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부정적 효과가 확대될 거다. 지난해는 그나마 입법 초기라서 중규직으로 생색내기를 했지만, 이런 중규직도 일정 시점이 되면 더 늘어나기 어렵다.

은수미=비정규직법의 효과라고 단정하긴 어렵지만, 사회보험 적용률과 유급휴가 등 여러 부분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격차가 줄었다. 입법으로 인한 개선 효과가 있었을 거다. 비정규직법을 만드는 데 6년 가량 걸렸는데, 이 과정에서 비정규 문제에 대한 사회적 담론을 형성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본다.

김유선=더 열악한 처지에 있는 용역·파견·호출 노동자들의 수가 많아졌다. 법이 만들어질 때는 누구나 지금보다는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만든다. 한 명이라도 더 좋아지는 것을 전제로 해서 만든 법 때문에 오히려 상황이 나빠진 사람이 나온다면 문제가 있다.

이목희 “일각의 법 폐지 요구는 무책임한 책동”
심상정 “비정규직 남용 막을 대원칙 마련해야”

이목희=법을 없애자는 쪽에 묻고 싶다. 민주노총이 비정규직의 사용사유 제한을 소리높여 외치는 걸 보면 참 슬프다. 사용사유를 제한하면 극소수의 대기업 비정규직들만 혜택을 보게 된다. 영세업체는 사용사유를 제한하면 선택이 두 가지뿐이다. 베트남으로 공장을 옮기든지, 아니면 스페인처럼 불법·탈법을 고용하든지. ‘칠팔십만원 받더라도 좋으니 제발 일만 하게 해 다오’라는 절박한 노동자들도 많다.

심상정=사용사유 제한이 만병통치약이라는 것은 아니다. 비정규직의 형태가 다양하므로 해법도 다양하게 나와야 한다. 어떤 경우는 사용사유 제한도 필요하고, 저임금에 대한 대책도 필요하고 간접고용 대책도 필요하다. 더욱이 앞으로는 고용형태가 더욱 다양해질 것이기 때문에 지금의 정규직 개념이 해체될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한 가지 처방만으로는 문제 해결이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가 어떤 대원칙 같은 것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고용은 정규직으로 하되 특별한 사유가 인정될 때 비정규직을 허용한다는 원칙 말이다.

이목희=그렇다고 비정규직법을 폐지하자는 건 원칙론에 입각한 비겁한 접근이다. 노동운동 일부 지도부가 무책임한 선동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심상정=출발선이 다르다. 참여정부는 기업이 살려면 비정규직 고용은 불가피하다는 걸 전제로 깔고 차별해소에 나섰다. 사용사유 제한을 포함해서,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는 강력한 정책수단이 발휘돼야 한다. 적어도 같은 업종 내에서 평균치 이상으로 비정규직을 고용하는 기업에는 고용안정세를 부과해야 한다.

김유선=사용사유 제한도 그 수위는 다양할 수 있다. 이것도 단계적으로 확대해 나간다면 검토해볼 만한 것 아닌가.

은수미=올해 고용 예측치가 18만3천명인데, 참여정부의 연평균 28만명보다 적다. 재계는 이런 일자리 감소가 비정규직법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정규직 전환에 따른 부담 때문에 임시·일용직을 쓰지 않는다는 거다. 그래서 법을 고치자고 한다. 호시탐탐 ‘개악’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비정규직법을 흔들면 비정규직은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지금 있는 법마저 더 나빠질 수 있다.

김문성=물론 ‘개악’은 막아야 한다. 그러나 이 법이 비정규직을 보호할 것이라는 신뢰를 현장에서 잃었는데 누구의 힘으로 막을 건가.

은수미=같은 법이라도 결과는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경영계는 법을 회피할 방법만 찾고 있고, 노동계는 법에 문제가 많다면서 아예 모니터링할 생각조차 없다. 법을 건드리기 전에 노사정이 공동으로 비정규직법에 대한 모니터링을 할 것을 제안한다. 실제 비정규직법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 고용의 양과 질이 어떻게 변하는지 조사하자. 특히 대기업은 사회적 책임 차원에서 간접 고용까지 포함한 고용 형태에 대해 사회에 공개하도록 하고,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기업에 인센티브를 주는 사회적 운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 또 노조가 있는 곳은 비정규직 고용 현황에 대한 데이터를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적어도 자기 사업장에 있는 모든 노동자의 임금 및 근로 조건에 관한 데이터는 갖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춘재 황보연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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