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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2.11 14:00 수정 : 2008.02.11 14:12

[연중기획] 다시 그리고 함께 / 새로운 모색을 위하여
제2부 성찰 (다시보는 참여정부 5년) - (6) ‘참여’ 잃은 참여정부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자 신분이던 2003년 1월6일, 시민사회단체 연대회의 신년하례식을 찾은 그는 “시민운동의 축적이 당선의 밑천”이라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이어 “국민적 참여와 관심 속에 대통령이 돼 으쓱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왔다. 5년 뒤에도 으쓱한 마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앞으로도 계속 도와달라”고 했다. 연대의 손짓이었다. 그러면서 “가끔씩 언론에 ‘이 친구 믿었는데…’라고 할만한 기사들이 나올 것”이라며 대통령으로서 시민단체와 같은 길을 갈 수 없음을 털어놓기도 했다. ‘미래’를 알리는 징조였던 셈이다. ‘연대회의’는 전국 322개 진보·개혁적 시민사회단체의 상설 연대기구였다.

참여정부 출범 초 많은 이들은 진보개혁적 시민사회단체가 국정운영의 협력자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시민운동진영이 참여정부에 보낸 기대는 적지 않았다. 비교적 개혁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노 대통령의 후보 시절 공약은 이들의 정책적 요구와 상당 부분 일치했다. 무엇보다 노 대통령이 시민운동의 가치였던 ‘참여민주주의’를 국정운영 철학으로 내세운 것도 기대를 갖게 했다.

그러나 ‘기대’는 오래지 않아 ‘실망’으로, 또 ‘배신’으로 바뀌어 갔다. 결국 참여정부는 정권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보수언론은 물론, 지지층이었던 진보개혁적 시민사회진영으로부터도 고립되는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시민사회와 직접 소통을 꾀했던 참여정부가 오히려 소통과 연대에 실패한 이유는 무엇일까.

“대안없이 비판만 한다” “대안 내놔도 수용 안해”
기대가 실망, 불신으로…시민사회와 끝없는 불화


# 1. 시민세력과의 괴리

참여정부는 시민사회운동 진영과 주요 정책을 둘러싸고 임기 내내 크고 작은 충돌을 빚어왔다. 개혁 진영의 뜻이 반영될 것으로 기대했던 ‘대의 민주주의’는 실종됐다. 새만금 개발, 방폐장 건설 등 환경문제는 물론 국민연금·의료급여, 비정규직 입법, 이라크 파병, 한-미 자유무역협정 등 민생·복지·노동 분야에서도 참여정부 정책과 시민단체의 요구는 엇갈렸다. 재벌총수 범죄, 금산법 등 경제·재벌 정책에서도 시민단체는 정부안을 ‘저지’하기에 바빴다. 몇몇 정책적 방향이 일치했던 경우도 정부 정책의 축소·변형을 두고 비판은 끊이지 않았다.

‘설득’과 ‘토론’도 부족했다. 참여정부는 공약을 뒤집은 것은 제쳐두고라도 왜 뒤집었는지, 그리고 대안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시민사회운동 진영과의 소통조차 꺼리기 시작했다. 시민사회와 ‘소통’과 ‘연대’를 위한 공감대는 급격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참여정부 초기 가장 갈등이 심했던 환경문제에서 참여정부는 ‘일방통행’식이었다. 박진섭 생태지평 부소장(환경운동연합 전 정책실장)은 “천성산, 사패산 터널에 대한 노 대통령의 공약은 ‘백지화’였다. 하지만 집권하고 나더니 ‘재검토’로 바꿨다. 공약과 정책이 다를 수 있으니까 그것까지 양보했다. 그렇다면 순수하게 찬반을 다퉈봐야 하는데 그런 과정 없이 우격다짐식으로 밀어붙였다”고 평가했다. 이러다보니 환경단체 쪽에서 “솔직히 참여정부의 정체성을 모르겠다”는 볼멘소리가 흘러나왔다.

참여정부는 거꾸로 시민단체를 향해 ‘도와주지는 않고 괴롭히기만 한다’거나 ‘대안없는 비판만 한다’며 비난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시민단체 한 인사는 “노 대통령 탄핵사태와 4대 개혁입법 추진 때 시민사회단체가 정치적 부담을 감수하며 ‘화끈하게’ 밀어줬던 것을 그들은 보지 않는다”고 답답해 했다. 또 “새만금 문제, 금산법, 한-미 자유무역협정, 비정규직법 등에서도 시민사회가 수정 절충안을 내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대안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수용할 의사가 없었다는 것이다.

실제 2003년 새만금 개발을 둘러싼 갈등이 커지자, 시민단체 쪽에서 갯펄 일부를 매립해 개발하는 대신 방파제는 막지 말고 바닷물을 유통시키자는 절충안을 내놓았다. 정치적 명분은 정부가, 실리는 환경단체가 챙기는 일종의 ‘윈-윈’안이었다. 박진섭 부소장은 “이 대안에 대해 참여정부 고위인사들은 모두 합리적인 안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참여정부는 시스템으로 운영되니 청와대라고 해서 나설 수 없다며, 직접 전라북도, 관련부처와 상의하고 설득해 오라고 해 황당했다”고 말했다. 결국 이 안은 무산되고 말았다. 참여정부 안에서 ‘총대를 메는’ 사람이 없이, 시스템 뒤에 숨었던 셈이다.

2004년 입법예고된 비정규직 보호 관련 법안을 둘러싼 공방도 마찬가지였다. “일방적으로 정부 법안을 만들어놓고 ‘노사 양쪽이 대화하면 어느 정도 받아줄게’ 하는 식이었다. 당사자들의 의견을 들으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정책 입안 주체로 끌어내지는 못했다.” 이용득 전 한국노총 위원장의 비판이다. 정부는 노사정위원회에서 합의에 실패하자 그해 11월 그간 논의결과를 토대로 만든 정부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노동계의 극렬한 반대투쟁이 이어졌다.

이라크 파병, 한-미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반대한 것을 두고도 노 대통령은 “사실을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따져야 하며, 실현가능한 대안, 현실에서 적용할 수 있는 대안이 필요하다”며 진보진영을 공격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서도 시민단체 쪽은 “한-미 자유무역협정 체결만 해도 개방 자체를 반대한 게 아니라, 사안의 중요성에 비춰 협상 체결과정에서 시민사회는 물론 국회, 심지어 정부부처도 소외시킬 정도로 절차적 문제가 있었고 이를 막기 위해서는 우선 저지운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반박했다. 시민사회에 정보를 제공하고, 합리적 반론을 진지하게 듣는 설득과 토론의 장이 없었다는 것이다.

김기식 참여연대 전 사무처장은 “대의정치, 정당정치의 본질은 넓게는 시민사회, 좁게는 지지세력과의 소통을 통해 그들의 정치적·정책적 요구를 수렴하고 국정에 반영시키는 것”이라며 “노 대통령 정치실패의 핵심은 대의적 역할을 제대로 못한 데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2004년 말쯤 역사와 대화하고 역사로부터 평가받겠다고 한 순간 노 대통령은 정당정치 노선을 일탈해 철인정치 논리에 빠져들었다”고 덧붙였다.

# 2. 시스템의 덫

참여정부는 용산미군기지 이전, 새만금 매립, 방폐장 건설처럼 수십년 묵은 갈등사안을 “다음 세대에 넘기지 않겠다”며 적극적으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설거지 정부’를 자처하기도 했다. 또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실을 신설해 시민사회단체와 소통하고 갈등관리 시스템을 제도화했다. 정부차원에서도 각종 위원회, 사회적 대화기구 등을 신설해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담으려 노력한 것도 긍정적으로 평가할만하다. 지난해 12월 고리 원전1호기 재가동 문제가 원만하게 타결된 것도 늦었지만 이런 노력의 성과물로 보인다.

그러나 시스템에 의한 ‘참여’는 정교하지 못했고, 수준도 낮았다. 소통을 통해 정책 형성에 기여하도록 하자는 게 아니라 정책을 관철시키기 위해 소통하자는 것으로, 앞뒤가 바뀌었다는 평가다. 참여정부 몇몇 위원회에서 활동했던 하승수 변호사는 “회의에 참가해서 의견을 내놓으면 듣기만 할 뿐 피드백이 없었다”며 “의견을 듣고 반영하려는 게 아니라 자기 결론을 가지고 요식적으로 만났다”고 말했다.

시민사회수석실은 힘이 실리지 않으면서 청와대 내 야당으로 존재했다. 시민단체 한 인사는 “시민사회수석실쪽 요구로 정책협의를 하고 나면 정작 정책실 소관이라 의견을 전달할 뿐이라고 했다”며 “이런 상황에서 책임있는 논의가 이뤄질 수 있었겠냐”고 말했다.

‘사회적 대화’ 연석회의 한편에선 국회 강행처리 파행
‘옛날에 나도 해 본 일인데…’ 자만에 빠져 소통 왜곡

게다가 역대 시민사회수석들의 면면을 보면 대부분 변호사나 부산·대구 등 지역출신으로, 세대교체가 이뤄진 현역 시민운동단체 리더들과는 소통을 위한 신뢰나 네트워크도 부족했다. 시민단체 출신 참여정부 인사들이 때론 ‘옛날에 나도 해본 일인데…’라는 주관적 자만에 빠져 소통을 왜곡하기도 했다. 청와대 한 인사는 “관료 출신보다 시민사회 출신 인사들이 반목하는 경향이 강했고 이 때문에 결과가 더 나빠진 경우도 있다”고 했다.

왜 그랬을까. 무엇보다 시스템을 원활하게 작동시킬 훈련된 인적자원이 부족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황인성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은 “제도와 시스템을 바꿔야 하는 건 틀림없지만 그것도 사람이 하는 일인 만큼 내용을 채워나갈 훈련된 사람이 필요했다. 설계를 잘해 놓는다고 그냥 집이 되는 건 아니다. 목수도 있고 기술자도 있어야 하는데 그게 부족했다”고 시인했다. 그러다보니 갈등의 우선순위, 경중을 파악하고 풀어나가는 ‘정치력’ 부족으로 오히려 갈등을 키우기도 했다. 황 수석은 “그런 점에서 아마추어라는 지적을 받아도 좋다. 역량있고 일을 많이 해 본 사람은 우선적인 걸 먼저 풀어나가는데 참여정부는 그런 부분이 매끄럽지 못했던 게 분명히 있다”고 인정했다.

어렵게 성사된 소통과 대화, 협의틀마저 파행을 겪으며 불신의 벽은 높아졌다. 정부·경제·노동·시민·여성계 등이 참여한 사회적 대화기구인 저출산·고령화 연석회의의 파행적 운영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지난 2006년 연금제도 개선안을 두고 최종 합의안을 도출하기 위해 협의를 계속하던 시민사회쪽 위원들은 정부에 의해 뒷통수를 맞았다. 여당과 민주당이 이른바 ‘유시민 안’으로 불리던 기초노령연금법안을 표결로 강행처리 했기 때문이다. 한쪽에서는 연석회의를 통해 사회적 대화를 시도하고 다른 쪽에서는 국회에서 강행 처리하는 초유의 사태였다. 노동·시민사회·여성·종교 등의 실무위원들은 정부가 사회적 대화기구의 협의과정을 무시했다며 연석회의를 탈퇴하고 말았다. 이용범 전 국무총리실 시민사회비서관은 “사회적 대화는 신뢰의 축적 속에 가능하다. 신뢰가 한번 무너지면 회복하는 건 너무 어렵다”며 “연금문제라는 사회적 큰 갈등 하나를 사회적 대화로 해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대표적인 사회적 대화기구인 노사정위원회는 참여정부 임기 내내 민주노총을 배제한 채 ‘반쪽’으로 운영됐다. 박태주 한국노동교육원 교수는 “2004년 1월 ‘투쟁과 교섭 병행’을 내건 이수호 지도부 체제가 들어서면서 대화의 숨통이 트일 듯 했는데, 정부는 바로 한달뒤 ‘일자리 창출을 위한 노사정협약’을 체결할 때 민노총을 배제해버렸다. 참여정부가 성과에 집착하면서 조급증을 드러낸 것이 ‘사회적 대화’를 파탄시켰다”고 지적했다. 그 뒤 정부는 민노총이 불참을 선언한 노사정위 대신 노사정대표자회의 등을 통해 노동계와의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2006년 9월 한국노총과 정부, 재계가 복수노조 3년 유예 등의 내용을 담은 ‘노사관계 법·제도 선진화방안(노사관계 로드맵)’에 합의함으로써 민주노총은 정부와의 대화에서 완전히 등을 돌려버리고 말았다. 그 이후 민주노총은 참여정부에 대한 깊은 불신을 거두지 않았다. 노사정위에 관여하고 있는 한 교수는 “노사정위에 민주노총이 불참한 것을 탓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정부의 의지가 부족했다. 복잡한 노동문제를 노사정위에 떠넘기고 노동정책과 관련한 책임을 회피한 측면이 있다”고 평가했다.

참여정부가 시민사회의 참여를 제도화하고 협력적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힘을 쏟은 건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는 시스템은 선호되거나 신뢰받지 못했다. 큰 틀의 설계도에 집착하다 정작 당대의 갈등 처리에 미숙한 형식적 합리주의의 덫에 갇히고 말았다는 평가다. 황인성 전 수석은 “참여정부가 반대자의 의견을 고민하고 수용하는 데 있어 인식이나 감수성이 오만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며 “그 오만이 독선을 가져오고 전체적인 협력적 관계를 실현시키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했다.이재명 황예랑 기자 miso@hani.co.kr


“시민사회운동도 ‘저항’ 틀 못 벗어났다”
원칙 앞세우다 소통전략 마련 못해…정부내 대화론자 입지 축소

참여정부는 ‘적이 사라진 민주주의 시대’에 시민사회단체와 정부가 어떻게 긴장과 협력관계를 유지해야 하는지, 과제를 던져준 시기이기도 하다. ‘시민사회운동의 비타협적 투쟁이 정부의 개혁적 에너지를 올바로 활용하지 못한 측면은 없는가’라는 내부 반성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조대엽 교수(고려대 사회학)는 “시민운동은 그동안 ‘저항과 배제’라는 과거 민주화운동의 틀 속에서 정치·경제 개혁운동을 벌여왔고 참여정부에서도 이런 전략은 지속됐다”고 평가했다. 저항의 전략은 필연적으로 대립과 균열을 낳기 마련이다. 조 교수는 “시민운동진영이 바뀐 시대에 적합한 소통 전략을 세우지 못해 사회적 균열을 확산시키는 한계를 보였다”고 말했다.

정부쪽 인사들은 우선 시민사회운동이 “대화와 타협이라는 게임규칙 안에 들어와야 한다”고 지적한다. 차성수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은 “시민운동은 자신이 설득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며 “타협가능한 문제를 가치문제로 접근하고, 자기 주장이 100% 관철돼야 한다고 강요해서도 안된다”고 말했다. 그는 용산미군기지의 평택이전 반대 운동을 예로 들었다. “시민단체의 처음 요구는 서울에 있는 미군기지를 이전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대체 공간인 평택이전마저 반대하면 기지를 도대체 어디로 보내라는 것이냐. 솔직하게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고 그것으로 국민들의 심판을 받아야 했던 게 아니냐”고 비판했다.

시민사회단체 스스로도 ‘원칙’만 내세운 투쟁의 한계에 대해서는 답답함을 토로한다. 2005년 4월 비정규직 관련 법안 처리를 반대하며 국회 앞에서 단식농성을 했던 이수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은 “당시엔 실리보다 명분을 갖고 많이 싸웠다. 특히 민주노총이 비정규직 사용 사유제한 항목을 넣어야 한다는 원칙에 너무 매몰되다보니, 단계적으로 실리를 챙기지 못한 측면이 있다”고 아쉬워했다.

특히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 혹은 ‘규범적’ 시민운동 방식은 정부 내 ‘대화론자’들의 입지마저 어렵게 했다. 이용범 전 국무총리실 시민사회비서관은 ‘한-미 자유무역협정저지 범국민운동본부’와의 경험담을 털어놨다. “협정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국무총리와 주무부서 고위관계자들을 참석시켜 범국본과 비공식 토론 자리를 마련해 보려 했다. 하지만 범국본쪽은 토론 전제조건으로 협상 중단과 재검토를 요구하고 공론화가 먼저라며 텔레비전 토론회만을 고집했다. 범국본쪽을 이해는 할 수 있지만 이런 대화 시도가 몇차례 좌절되면서 ‘소통과 대화’를 강조하는 정부내 목소리는 점차 힘을 잃어갔다.”

이런 운동방식에 대한 거부감은 참여정부의 정책기조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이해당사자인 노사 모두 ‘전부 아니면 전무’의 문화와 관행에 젖어, 대화와 타협으로도 해결가능한 문제를 총파업이라는 극단적 상황으로 끌고가는 경우가 많았다.” 권재철 전 청와대 노동비서관은 “참여정부 중후반기 노동정책에선 법·제도 개선보다 이런 관행과 문화 개선이 우선이었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도 “국정을 끌어오면서 소통 문제가 가장 어려웠다”며 “소통은 대화나 타협 이전의 문제인데, 말귀가 통하지 않았다. 그 원인은 ‘너 어느 편이냐’는 편가름 때문이었다.”(2006년12월 28일, 정책기회위원회 오찬 연설)고 토로했다.

노 대통령의 이런 고민은 “민주주의 핵심적 본질은 대화와 타협”이라는 수차례의 언급으로 나타났다. 차성수 수석은 “시민단체가 자기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패배한 것으로 보는 저항적 정체성을 강요하면 민주주의는 유지되기 어렵다”며 “결과가 어찌됐든 의사결정 과정에 내 주장을 관철시킬 수 있는 통로가 있으면 절차적 정당성을 승인하고 그 결과에 따라줘야 한다”고 말했다.

참여연대는 최근 보수언론의 잇따른 시민단체 비판에 대한 반박 성격의 보고서에서 “자기 주장의 오류가능성, 상대성 등을 인정해야 한다는 시민사회단체를 향한 최근의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민주주의는 결국 타협과 절충이 필요한 제도임을 받아들이는 계기로 삼을 것”이라고 밝혔다.

조대엽 교수는 “시민운동이 사회통합을 향햔 전략적 전환이 요구되는 가장 급박한 시기에 가장 지체된 행보를 보인 셈“이라며 “어쩌면 시민운동단체가 권력과 시민의 틈에서 불어난 몸집으로 어슬렁거리는 사이 개혁정치에 대한 시민사회의 지지는 분산되고 크게 약화되어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재명 황예랑 기자 mis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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