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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2.04 13:58 수정 : 2008.02.14 15:01

진보 외치며 정책은 보수 ‘정체성 혼란’(※ 그림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다시 그리고 함께]새로운 모색을 위하여
‘개혁 나침반‘ 잃고 우왕좌왕…지지층도 등돌려

[연중기획] 다시 그리고 함께 / 새로운 모색을 위하여
제2부 성찰 (다시보는 참여정부 5년) - (5) 방향 잃은 정체성

“제가 좀 황당하다고 느끼는 게 있는데, ‘당신 신자유주의자지?’라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한쪽에서는 좌파정부라고 하는데, 답답하다. 참여정부는 좌파신자유주의 정부다. 좌파신자유주의 정부가 나쁘냐, 그렇지 않다. 좌파든, 우파 이론이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로 쓰면 된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6년 3월23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국민과의 인터넷 대화’에서 참여정부를 ‘좌파신자유주의’로 규정했다. 당장 민주노동당이 “국정 혼란과 인사 혼란에 이어 정체성 혼란마저 온 것 같다”고 혹평하는 등 논란에 휩싸였다. 그러자 청와대가 “좌파 정책이든 신자유주의 정책이든 필요한 것은 모두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강조한 것으로, 일종의 조크(농담)”라고 진화에 나섰다. 노 대통령이 비록 ‘농담’으로 이런 표현을 썼을지 모르지만, 이 말은 참여정부의 정체성 혼란을 지적할 때 뭇사람들의 입길에 자주 오르내리는 단골 메뉴가 됐다.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으로 참여정부 노동정책에 관여했던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은 “노무현 정부는 자기 정체성이 불분명했다. 말로는 중도좌파라고 하면서 실제 노선은 극단적인 보수가 할 수 있는, 삼성과 손을 잡는다거나 한-미 자유무역협정, 이라크 파병 같은 걸 했다”고 평가했다.

이처럼 참여정부가 진보개혁 세력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지 못하고 흔들리면서 지지자들의 기대와 실제 정책 사이의 괴리는 점차 커져 갔고, 지지세력들은 하나둘 참여정부를 떠나갔다.


# 1. 노동정책

취임 1년뒤 “노동계 얘기만 듣나…난 변했다”

정체성 혼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게 노동정책이다.

참여정부 초기 대통령 비서실 노사개혁태스크포스팀장을 지냈던 박태주 한국노동교육원 교수의 말이다. “내가 대통령 후보 노동특보로 있으면서 공약을 짰는데, 5년전 참여정부 초창기에 내걸었던 정책만 해도 이른바 진보세력이 후한 점수를 줬다. 김금수 노사정위원장을 임명하고, 양대노총을 방문하는 등 (노동계에) 힘을 실어줬는데, 대통령이 되고 나서 어느 순간 진정성이 없어져 버렸다.”

참여정부 초기의 노동정책은 노동자들에게 호의적이었다. 노 대통령도 “사회적 힘의 균형에서 노동계에 비해 경제계가 더 세다. 향후 5년간 힘의 불균형을 시정해 가겠다”며 노동계에 힘을 실어줬다. 이런 기조는 2003년 3월의 두산중공업 파업과 5월의 화물연대 파업까지는 그대로 이어졌다. 당시 권기홍 노동부 장관은 “화물연대의 요구가 틀리지 않는데 불법행동에 대해 엄단하기만 하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대화와 타협을 강조했다.

그러나 2003년 6월의 조흥은행 파업과 철도노조 파업 때부터 참여정부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조흥은행 파업 때 경찰 투입을 예고한 데 이어 철도 파업 때는 곧바로 경찰력을 투입했다.

노 대통령은 당시 이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왜 (조흥은행 파업에) 공권력 투입을 지시했는가 하면, 최근 몇몇 노동조합들이 정부 길들이기나 본때를 보여주려고 하는 경향이 있어서이다. 그런 방식의 파업은 용납 못하겠으므로 단호하게 대처하겠다.”(2003년 6월23일 전국근로감독관과의 오찬간담회) 그 뒤 참여정부의 노동정책은 오른쪽으로 급선회하면서 노동자들한테서 점점 멀어져 갔다.

2004년 3월 청와대에서 노 대통령을 만난 이수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은 “난 노동계가 참여정부의 지지기반이라고 보는데, 노 대통령은 그때부터 벌써 ‘어떻게 (노동계의) 일방적인 얘기만 듣겠느냐. 난 전체를 생각해야 하고, 이제는 일부의 대통령이 아니기 때문에, 특히 보수진영의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 난 변했다’고 말하더라”고 전했다.

황인성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은 대통령의 변화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대통령은 노동운동이 대기업 중심의 자기 밥그릇 챙기기라며 굉장히 불신했다. 대통령은 노동운동에 대한 실망을 계속 얘기했다. 노동운동이 약점이 있더라도 대의에 맞는 거라고 생각하면 그걸 중심으로 사고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노동계에 대한 대통령의 인식이 이렇게 바뀜에 따라 우리사회 양극화의 주범 중 하나인 비정규직 문제도 함께 표류했다. 참여정부 3년 동안 청와대에서 노동정책을 담당했던 권재철 한국고용정보원장은 “2004년부터 청와대의 큰 화두는 노사관계에서 고용정책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노동계에서는 청와대가 비정규직 문제 등을 노사관계 차원에서 다루지 않고 정부와 국회에 맡겨놓음으로써 사실상 방치했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이석행 현 민주노총 위원장의 회고다. “위원장이 되고 나서 2006년 6월 청와대에서 노 대통령을 만났다. 비정규직법 시행령이 국무회의를 통과하기 직전이어서 노동계의 요구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반응은 차가웠다. ‘내가 무슨 힘이 있나. 민주노총이 우릴 이렇게(무력하게) 만들지 않았냐.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는 식이더라.” 이 위원장은 노 대통령에게 몇 가지 요구 사항을 전달했으나, 아무 것도 받아들여진 게 없었다.

결국 비정규직 문제가 점점 악화하면서 참여정부 출범 당시 지지기반이었던 노동계는 결정적으로 참여정부에 등을 돌리게 됐다.

진보 외치며 정책은 보수 ‘정체성 혼란’(※ 그림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2. 한-미 FTA 체결

시장논리 밀어붙이기…농민·영화인 ‘희생양’으로

한미 자유무역협정 체결은 진보정권으로서의 참여정부 정체성에 큰 타격을 준 상징적인 사건이다. “미국에 사진 찍으러 가느냐”고 까지 말했던 노 대통령이 일본이나 중국을 제치고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 것은 ‘아이러니’다.

미국과 먼저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게 된 데는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의 역할이 컸다. 2004년 7월28일 45살 나이로 장관급인 통상교섭본부장에 발탁됐던 김 본부장은 미국 콜롬비아대에서 국제통상을 전공한 대표적인 개방론자이다.

청와대에서 수석비서관을 지낸 한 고위관계자는 “김 본부장은 그동안 추진되던 일본이나 중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을 접고, 캐나다와 하려고 했다. 그런데 캐나다가 미국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렸다. 그러자 김 본부장이 아예 미국과 하는 게 낫다고 노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김 본부장이 노 대통령에게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제안한 것은 2004년 11월께다. 당시 노 대통령은 ‘아세안+3’에 참석해 싱가포르와 자유무역협정을 타결하는 등 개방정책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을 때였다.

노 대통령은 2006년 9월28일 <문화방송>의 ‘100분 토론’에 참석해 “대통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 보고를 받고 의사표시를 하기 시작한 것은 2004년부터다. 그 다음에 (이를 추진하도록) 통상교섭본부장에게 지시한 것은 2005년 5월경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미 자유무역협정 협상이 곧바로 시작되지는 못했다. 이 협정 추진을 주도했던 한덕수 국무총리는 “우리는 일치감치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려고 2003년부터 준비를 해왔다. 그러나 미국이 시큰둥했다. 한국은 아예 미국의 협상 대상국에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5년 하반기에야 미국이 긍정적으로 돌아섰고, 2006년 2월 공식 협상을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협상 개시 직전인 2006년 1월, 그동안 한미간 뜨거운 통상현안이었던 미국 쇠고기 수입 개방과 스크린쿼터 축소 조처가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한미 자유무역협정 협상의 길을 닦기 위한 우리 정부의 ‘성의 표시’였던 셈이다. 국내 농민들과 영화인들이 ‘성의 표시’의 ‘희생물’이 되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바라보는 노 대통령의 시각은 철저히 경제 논리를 바탕으로 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사상적으로 좌·우의 문제도 아니다. 이거 국민들이 먹고 하는 문제 아닌가? 이걸 가지고 자꾸 어떤 사상적인, 이념적인 대결의 수단으로 끌어넣으려고 하는 그런 것은 현명한 처사가 아닌 것 같다.”(2007년 5월21일 <엠비엔> 특별회견 중에서)

그러나 진보진영은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신자유주의의 상징이자 참여정부 정체성의 잣대로 보았다. “진보는 정체성을 확실히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사로 잡힐 게 아니라, 이에 대항해야 한다. 그런데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제도권 속 진보는 완전히 파탄났다.”

진보학자인 김상봉 전남대 교수(철학)는 정체성을 잃어버린 참여정부를 가혹하게 평가했다.

# 3.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장사논리 안맞다”…2년뒤엔 “거역할수 없는 흐름”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문제도 참여정부 내내 오락가락하면서 지지층을 실망시켰다. 특히 이 문제는 당·정·청이 뒤얽혀 진흙탕 싸움을 하는 바람에 민심이 참여정부를 떠나게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관료들은 참여정부 초기부터 일관되게 분양원가 공개에 부정적이었다. ‘시장원리’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김진표, 이헌재 경제부총리 등은 일반 국민들의 분양원가 공개 요구를 단호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민심을 얻어야 하는 열린우리당이 2004년 4월 총선에서 분양원가 공개를 공약으로 내걸고 나서면서 당정간에 이견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정간에 갈등을 보이고 있을 때 노 대통령이 결정적으로 관료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노 대통령은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는 장사의 원리에 맞지 않는다”며 “이것은 건설업계의 압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대통령의 소신”이라고 강조했다.(2004년 6월9일 민주노동당 초청 청와대 만찬에서)

즉각 당에서 반발하고 나섰다. 김근태 당시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는 6월14일 보도자료문을 내 “당-정, 당-청 간 치열하게 논쟁을 해 결론을 내는 것은 당연하다. (청와대와) 계급장을 떼고 논쟁하자”고 제안하면서 “당이 정부를 설득해 분양원가 공개를 관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반대로 분양원가 공개 대신 원가연동제를 도입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집값 폭등으로 좌절감에 빠져있던 서민들은 참여정부에 분노를 표시했지만 대통령과 관료들은 요지부동이었다.

분양원가 공개 문제는 2006년 7월 또다시 논란에 휩싸였다. 5·31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열린우리당이 다시 분양원가 공개를 들고나왔다. 되돌아선 민심을 잡아보려는 것이었다. 그동안 분양원가 공개에 반대했던 노 대통령도 그제서야 돌아섰다. “(예전에는) 반대했는데, 국민들이 분양원가 공개를 바라니까 그 방향으로 가야되지 않겠느냐.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라고 본다.”(2006년 9월28일 <문화방송> ‘특집 100분 토론’에서)

결국 먼 길을 돌아 2007년 9월부터 분양원가 공개가 시작됐지만, 집값 폭등으로 가슴이 뻥 뚫린 서민들이 이미 참여정부에 등을 돌린 뒤였다.

# 4. 정체성 실종

기득권층에 밀려 정권초기 진정성 상실

참여정부의 정체성이 언제부터, 그리고 왜 흔들리게 됐을까.

박태주 한국노동교육원 교수는 “노무현 세력이 개혁진보세력으로 출발한 것은 맞다. 참여정부 초기에는 진정성이 있었다. 그러나 우호적이지 않은 자본과 언론 등 사회적인 힘의 관계에 밀려, 굉장히 빠른 속도로 ‘투항’해버리고 말았다”고 말했다. 참여정부 출범 당시에는 진보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참여정부가 출범 이후 곧바로 정체성 혼란에 빠진 것에 대해 조돈문 가톨릭대 교수(사회학·민교협 공동의장)는 “진보에 대한 노 대통령의 철학이 부족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철학이 확고하지 않다보니 선거 과정에서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을 보였지만 대통령이 된 뒤에는 곧바로 이런 진보성을 잃어버렸다”고 평가했다.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도 참여정부의 정체성 혼란을 가중시키는 데 한몫 했다. 대선에서 참패한 뒤 대통합민주신당은 올해 초 패배 원인을 이렇게 평가했다. “변화를 바라는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국회 과반의석을 차지한 열린우리당은 국가보안법 폐지, 언론관계법, 사립학교법, 과거사법 제정 등 과감한 개혁 입법을 추진했다. 그러나 강력한 의지 부족과 리더십의 혼선, 그리고 전술적인 오류로 인해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함으로써 지지층을 실망시켰다.”

통합신당의 한 핵심 관계자는 “당내 스펙트럼이 너무 넓었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국방장관 출신(조성태 의원)과 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임종인 의원)이 국회 국방위원회에 같이 있는 정당이 무슨 정체성 운운할 수 있냐는 것이다.

이처럼 노 대통령 자신의 정체성이 확고하지 않은데다가 여당마저 흔들리면서 참여정부는 총체적인 정체성 혼돈 상태에 빠졌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최영기 한국노동연구원장은 “노 대통령은 자신의 존재 기반인 민주화 세력과 서민대중을 ‘배신’했다. 진보개혁을 표방하면서 누구보다 신자유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정책들을 폈다”고 지적했다. ‘전체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어차피 잡지도 못할 ‘산토끼’를 쫒느라 우왕좌왕하다 ‘집토끼’까지 놓치게 되고, 이는 ‘진보진영’의 몰락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정석구 선임기자, 황예랑 기자 twin86@hani.co.kr


“정책·정체성 고민없고 개혁의지도 부족했다”

◎ 천정배 전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인터뷰

2002년 12월19일 대선 이후 새천년민주당 정풍운동의 주역은 ‘천신정’(천정배·신기남·정동영)이었다. 천정배 의원은 열린우리당이 2004년 4·15 총선에서 152석을 차지한 뒤 원내대표로 선출돼 정체성 논란의 한 가운데 있었다.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의 실패에도 큰 책임이 있다. 지난달 25일 의원회관에서 천 의원을 만났다. 그는 <한겨레> 신년기획을 빠짐없이 읽고 있었다.

천정배 전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열린우리당은 왜 실패했나?

=첫째, 조직화되지 못했다. 이건 능력의 문제다. 둘째, 국민의 뜻과 유리됐다. 민주성의 문제다. 시대정신을 읽지 못했다는 얘기다. 회사를 창업할 때는 사람과 조직 모두 새로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생각이 부족해 세상은 바뀌었는데 과거 관행대로 했다. 그래서 더 나빠졌다. 한마디로 개혁 의지가 부족했다. 그 결과는 독선과 혼선으로 나타났다.

-조직화되지 못했다는 뜻은?

=내가 원내대표를 했는데도 이정우 청와대 정책실장을 잘 몰랐다. 나중에 책을 보고 뚜렷한 비전을 갖춘 사람이란 걸 알게 됐다. ‘우리’끼리 교류가 없었다. 아마추어리즘이라고 비난해도 변명하기 어렵다.

-되짚어보자. 창당 과정에 어떤 문제가 있었나?

=만든 사람들의 의도 자체가 잘못됐다. 영남 출마 희망자들은 민주당이 호남당이기 때문에 민주당 잔해를 남긴 상태에서 깨려고 했다. 영남패권주의에 굴복한 것이다. 정강정책을 확고히 만들어야 했는데 정책과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 토론도 없었고 인물 중심으로 뚝딱 만들었다. 당선 가능성 위주로 공천을 했다. 명망성, 경력, 인지도만 봤다. 안정의석에 집착해 과거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유시민에서 강봉균까지 편차가 너무 컸다는 지적이 있다.

=유시민이 진보인가? 임종인은 진보다. 아무튼 그 정도 편차는 민주당에도 있었다. 그러나 민주당엔 김대중 대통령의 지도력이 있고, 중심세력이 확고했다. 열린우리당엔 지도력과 중심세력이 없었다.

-리더십 문제가 컸다는 얘긴가?

=중심세력이 없었다. 시스템을 만들지도 못했다. 간신히 과반을 넘긴 상태에서 당론에서 이탈하는 의원들을 제재할 수단이 없었다. 최악의 장면이 2005년 5월3일 과거사법 투표였다. 한나라당과 타협하면서 내용이 누더기가 됐지만 당론으로 정했으면 따라야 했다. 지도부 4명이나 반대·기권을 했다.

-정체성이 오락가락했다는 비판이 있다.

=정체성이 걸린 정책이 얼마나 있었나? 국회에서 국민생활과 직접 관련이 없는 것을 놓고 싸운다. 한국 정치의 낙후성이다. 정치만 있지, 정책 이슈는 별로 없다. 오락가락이 아니라, 방향 자체가 없는 게 문제다.

-왜 그런가?

=정당의 수준이 그렇다. 정책 비전과 방향을 정립하지 못하고 있다. 박정희 시대 이후 정책을 만들고 집행하는 것은 대통령 몫이었다. 국회나 정당은 거수기 노릇만 했다.

-그런 관행을 바꾸지 못했다는 얘긴가?

=그렇다. 정권교체 뒤 새 정치 패러다임을 짜야 했는데 10년간 하지 못했다. 열린우리당은 탄핵 전에도 많은 지지를 받았다. 국민들이 새로운 정책정당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변화하지 못하고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게 가장 큰 잘못이다.

-왜 못했나?

=문제의식이 부족했고 의지도 없었다. 정치개혁을 명분으로 당을 축소하고 투톱시스템까지 도입했는데, 바보같은 짓이었다. 정책 쪽은 오히려 키웠어야 했다. 한나라당과 구별되는 사회·경제 비전과 정책을 정립했어야 하는데 아쉽다.

-정책정당은 뭘 해야 하나?

=대선 뒤 이명박 당선인이 신용불량자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는데, 내가 원내대표 때 나온 아이디어였다. 한나라당 이종구 의원이 얘기를 많이 했다. ‘도덕적 해이’를 이유로 반대하는 의견이 있어 못했는데 밀어붙였어야 했다.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도 노무현 대통령의 반대를 무릅쓰고 관철시켰어야 했다. 우리 스스로 민생을 살리고 양극화를 해소하는 정책을 관철시켰어야 했다.

-4개 개혁입법은?

=당연히 처리했어야 한다. 한나라당이 몸으로 막아 못했다. 우리 ‘정치력’을 비판할 수는 있지만, 다수결 원리를 외면한 한나라당의 반대가 근본문제였다. 일각에선 우리가 개혁입법을 추진한 게 문제라는데, 옳지 않다. 민생 분야를 제대로 못한 게 문제지, 개혁입법을 추진한 게 문제는 아니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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