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그리고함께] 제2부 성찰 (4) 실종된 경제개혁
경제개혁 실종이 결국 ‘민생경제 악화’ 부메랑으로
출범 초부터 관료 숲 싸여 성장 중심·재벌 챙기기관치금융 재연·출총제 무력화 ‘무능한 진보’ 초래 16대 대통령선거에서 노무현 민주당 후보가 극적 승리를 거둔 다음날인 2002년 12월20일. 노 후보의 개혁적 선거공약을 만드는 데 핵심 구실을 했던 예닐곱명이 민주당사 8층 후보실로 모여들었다. 노 당선인으로부터 차나 마시자는 연락이 갑작스레 온 것이다. “승리의 기쁨을 나누고, 앞으로 할 일에 대한 얘기도 자연스럽게 나왔죠. 그런데 당선인이 그러는 거예요. ‘앞으로 정치·사회에 (개혁의) 역점을 두고, 경제는 안정 위주로 가겠다’고. 순간 ‘노무현 정권에서 경제개혁은 물 건너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이름을 밝히지 말 것을 요청한 한 참석자의 말이다. 참여정부 5년 동안 시장·재벌개혁이 사실상 실종됐다는 비판이 많다. 이에 대해선 지금까지 참여정부에 몸담고 있는 진보·개혁 성향 인사들도 크게 이의를 달지 않는다.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보좌했던 한 인사도 “부동산을 빼면 경제개혁을 제대로 한 게 거의 없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이 후보 시절부터 “최초로 재벌개혁에 성공한 대통령이 되겠다”며 강한 의지를 천명했던 점을 생각하면 개혁의 실종은 큰 의문이었는데, 대선 다음날의 차모임은 궁금증을 풀어줄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 개혁정부 동떨어진 정책 17대 대선에서 여권의 참패는 참여정부에 대한 민심이반 탓으로 지적된다. 그리고 그 결정적 요인으로 민생경제 악화가 꼽힌다. 하지만 진보·개혁진영 인사들은 경제개혁 실종에도 똑같은 무게를 싣는다. 민생경제 악화와 경제개혁 실종이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태인 전 청와대 비서관은 “민생경제를 어렵게 만든 양극화를 해소하려면 시장·재벌개혁을 통해 투명하고 공정한 경제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는데, 노 대통령은 국민에게 자기 가치도 보여주지 못하고, 국민 요구에도 부응하지 못하면서 무능한 개혁진보로 낙인찍혔다”고 말한다.
참여정부는 집권 초기에 증권집단소송제, 상속증여세 완전포괄주의 도입 등의 성과를 냈지만, 곧 후퇴했다. 대기업 횡포로부터 중소기업을 보호하고 비정규직 양산의 악순환을 끊는 작업은 소리만 요란할 뿐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반면 재벌의 과도한 경제력 집중을 막기 위한 출자총액제한제는 유명무실화되고, 금융사를 통해 계열사를 지배하는 것을 막기 위한 금산법(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은 ‘삼성 봐주기’ 의혹으로 퇴색했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한성대 교수)은 “(공정한 시장을 위한) 제도를 제대로 못 만들었고 엄정하게 집행도 못 했으며, 경제질서의 근본인 법치주의 집행에도 제동을 걸었다”며 “노 대통령 스스로 만들어 낸 개혁정부라는 이미지와는 전혀 동떨어진 경제정책을 편 게 최대 실패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권력은 이미 시장으로 넘어간 것 같다.” 노 대통령이 임기 중반께인 2005년 5월16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중소기업간 상생협력 대책회의에서 재벌 회장들에게 한 말이다. 시민단체들한테서 “개혁 포기 선언이냐”는 성토가 쏟아졌다. 하지만 대통령의 이 발언은 처음이 아니었다. 집권 초인 2003년 7월에 이미 “단기적으론 기업이 제약받지만 장기적으로는 기업에 의해 정부정책이 움직여갈 수밖에 없다”며 비슷한 말을 했었다. 장하성 고려대 경영대학장이 2003년 4월초 관치금융이 재연된 카드사태 처리와 에스케이글로벌 사태 수사에 제동을 거는 듯한 노 대통령의 태도에 강한 의구심을 나타냈을 때 일부에선 “너무 성급한 비판이 아니냐”는 반응도 있었지만, 사실은 대통령의 의중을 정확히 읽고 있었던 셈이다. # 재벌 봐주기 ‘금산법 파동’ 노 대통령이 정권 초기부터 기존 경제관료들에게 의존한 것을 놓고, 경제개혁 의지가 처음부터 없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하는 이들이 많다. 당선인과 차모임을 하는 데 있었던 정태인 전 비서관의 얘기를 들어보자. “당선인이 참석자들에게 ‘여러분들이 주도가 돼서 인수위를 구성하라’는 당부를 했어요. 하지만 실무는 이병완씨(나중에 청와대 비서실장 역임) 등이 맡을 거라고 했지요. 그때부터 ‘이건 아닌데’하는 걱정이 많았습니다. 결국 실제 인수위에 참여한 사람은 나와 서동만 상지대 교수 정도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관료들과 (대통령 측근인) ‘386’의 견제로 배제됐어요.” 노 대통령은 초대 경제부총리에 김진표씨를 기용했다. 김 부총리가 처음 성사시킨 게 법인세 인하였다. 이는 대선 때 한나라당 공약이었고, 노 후보는 형평성에 어긋난다며 반대했었다. 노 대통령의 경제공약을 만들었던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노 대통령이 바보가 아닌데 김진표씨 기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겠느냐”며 “대통령은 처음부터 성장 지상주의, 관료 의존주의, 재벌 중심의 경제운용 방향을 잡고 있었다”고 말했다. 2005년 7월5일 국무회의에서 벌어진 금산법 개정안 파동은 관료에 의존한 개혁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당시 삼성은 금산법을 어기고 계열 금융사를 이용해 다른 계열사 주식을 취득한 게 드러났는데, 재경부와 금감위는 미온적 대처로 특혜 의혹을 받고 있었다. 이정우 당시 청와대 정책기획위원장(현 경북대 교수)이 재경부가 개정안을 국무회의에 상정한다는 얘기를 처음 들은 것은 회의 바로 전날 저녁이었다. “주요 국무회의 안건은 청와대 서별관회의(고위정책조정회의)에서 미리 조율을 했는데, 이 건은 사전에 전혀 걸러지지 않았어요.” 이 위원장이 급히 사안의 전모를 파악했을 때는 이미 자정이 임박한 늦은 시각이었다. 급히 대통령에게 문서로 보고하고, 다음날 오전 회의 직전 다시 대통령을 만났다. 노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한덕수 당시 경제부총리에게 “일부 재벌을 봐준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한 부총리가 우물쭈물했고, 윤증현 금감위원장도 마찬가지였다. “국무회의가 큰 혼란에 빠졌죠. 대통령이 정회를 선언했고, 관련 장관들이 긴급회동을 했어요. 그런 일은 처음이었습니다.” 이정우 전 위원장은 사건의 ‘주모자’를 묻는 질문에 “본질은 관료들의 ‘삼성 봐주기’인데, 짐작은 가지만 말하긴 이르다”며 “재벌과 관료들 사이에 유착관계가 형성돼 있어 구조적으로 재벌개혁이 어렵게 돼 있었다”고 말했다. 삼성과 관료, 참여정부의 삼각 유착 의혹에 대한 증언도 나온다. 노무현 후보 캠프에서 일했던 한 인사는 “대선승리 직후 당선인의 최측근 인사가 차기정부에서 중용할 관료들로 김진표·박봉흠·윤진식씨 등 4명의 이름이 들어 있는 명단을 내놓았는데, 삼성에서 줬다는 얘기가 많았다”고 말했다. # 통제 불능·문책 실종 부동산은 노 대통령이 “반드시 잡겠다”고 거듭 강조했던 최대 역점 분야다. 그러나 참여정부의 최대 실책이라는 최악의 성적표만 남겼다. 노 대통령이 부동산 정책에 소극적이고, 때로는 반기까지 들었던 경제관료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것을 원인으로 빼놓을 수 없다. 참여정부는 2006년 3·30 종합대책을 통해 투기지역 내 주택담보대출에 대해서는 원리금 상환액을 대출자의 연간소득에 연동시키는 총부채상환비율(DTI)을 적용하기로 했다. 집값 안정을 위해 막판까지 망설였던 금융규제라는 고강도 처방을 꺼낸 것이다. 그러나 이를 비웃듯 그해 8~10월 석달 사이 아파트값이 10% 이상 급등했다. 노 대통령은 급기야 “유동성 관리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며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재경부, 금융감독위원회, 한은 등에 대한 조사를 지시했다. 결과는 조사담당자의 입에서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는 탄식이 나올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부동산 정책 수립에 참여했던 한 인사는 “실제 은행 대출창구에서 디티아이 규제가 거의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며 “재경부와 금감위의 명백한 직무유기였다”고 말했다. 당시 경제관료들은 경기부양을 이유로 부동산 정책에 금융을 동원하는 데 부정적이었고, 은행들도 디티아이 규제를 하면 망한다며 아우성이었다. 대통령의 불호령과 함께 금융감독당국의 은행 창구지도가 시작되고, 청와대가 일일보고를 받으면서, 집값은 급속도로 안정세를 되찾았다. 반드시 잡겠다던 집값도 관료 말 들으며 ‘갈팡질팡’
“관료는 따라오기 마련…약속 못지킨 대통령 책임” 경제관료들의 집단 사보타주(태업)에 대해선 어떤 조처가 내려졌을까? 당시 책임 있는 관료들을 모두 문책하는 방안이 제기됐다. 그러나 결국은 관리 소홀의 책임을 물어 청와대 경제보좌관만 경질하는 선에서 봉합됐다. 당시 청와대에 있었던 한 인사는 “책임자인 윤증현 금감위원장을 마땅히 엄중 문책했어야 했다”며 아쉬워했다. 윤씨는 지금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을 위해 인수위 자문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참여정부 내내 노 대통령을 보좌해온 청와대의 핵심인사는 “종부세 부과기준을 6억원으로 하면 경제 망치고 국회도 통과할 수 없다고 난리친 사람들이 관료들과 관료 출신 여당 의원들이었다”며 “초반에 잡을 수 있었던 부동산 정책에서 실패한 것은 (관료들을 통제하지 못한) 우리의 책임이고, 다른 정책들도 다 그랬다”고 아쉬움을 표시했다. 정태인 전 비서관도 “노 대통령이 오늘은 이정우 위원장의 말을 듣다가, 내일은 관료들의 말을 듣는 식으로 우왕좌왕했다”고 비판했다. 노 대통령은 2007년 신년기자회견에서 “경제정책은 (누가 해도) 차별화가 불가능하다”고 말했지만, 참여정부 경제정책의 주도권을 관료들에게 맡긴 대가는 컸다. 홍종학 경원대 교수는 “2003년 초 터진 카드부실 사태와 에스케이글로벌 사건 처리를 보면 과거 전두환 정권 때와 똑같이 금융기관의 돈을 끌어다가 재벌들을 살려줬다”며 “카드사태 경우 시장경제의 원칙에 따라 부실을 만든 카드사의 경영진과 투자자, 정책을 잘못한 관료들에게 응분의 책임을 물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원칙대로 하면 금융시장이 무너진다며 관치금융을 재연한 관료들을 오히려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능한 공무원이라고 치켜세웠다. 참여정부 출범 초기부터 에스케이글로벌·카드사태 등이 잇따라 터져 안정을 중시할 수밖에 없었다는 반박도 있다. 노 대통령 스스로 “시장이 무너지는데 보고만 있으란 말이냐”고 항변한 적도 있다. 하지만 유종일 교수는 “안정을 위해 정부가 개입을 하더라도, 사태를 일으킨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책임추궁을 하는 원칙은 분명히 했어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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