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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4.23 14:52 수정 : 2009.04.23 15:12

아케메니아 제국의 영토. 사진제공 유달승, (클릭하면 확대 가능합니다)

[유달승의 중동이야기] 영화 ‘300’과 페르시아

“미국, 드디어 이란에 전쟁을 선포했다.” 이 제목은 2007년 3월 국내에 개봉된 영화 <300>을 비판하면서 13일 이란 일간지에 실린 기사의 헤드라인이다. 아흐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은 3월21일 신년사에서 할리우드 영화 <300>에 대해 미국이 이란에 심리전을 벌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TV 연설에서 “서구 강대국들이 영화제작을 통해 이란의 이미지를 노예로 만들었다”면서 “심리전과 선전수법으로 우리 국가의 발전을 방해하려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보다 앞선 12일에는 자바드 샴카드리(Javad Shamqadri) 문화 수석이 “미국이 심리전의 일부로 이란의 문화를 겨냥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이란 문화와 이슬람혁명의 가치를 손상시키기 위한 의도로 제작되었다고 공격했다. 이 영화를 둘러싸고 논쟁이 확산되자 워너 브라더스(Warner Brothers)는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 “<300>은 프랭크 밀러(Frank Miller)의 만화에 영감을 얻어 제작된 것이며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느슨하게 차용했을 뿐이다. 제작사는 이 영화를 관객들에게 재미를 주기 위한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만들었다. 결코 다른 나라의 민족성이나 문화를 깔보기 위한 것도 아니고 정치적 계산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영화 <300>은 기원전 480년 제3차 페르시아 전쟁에서 테르모필라이(Thermopylae) 전투를 소재로 한 전쟁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는 페르시아인을 흑인으로 등장시켰고 페르시아 군대를 괴물로 묘사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단지 이러한 것들이 아니다. 이 영화는 제3차 페르시아전쟁의 성격을 민주주의와 전제주의의 대립으로 묘사하고 있다. 300명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사들이 100만 대군에 맞서 자유와 정의를 위해 죽었다는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페르시아와의 마지막 전투에서 “우리를 기억하라”라는 레오니다스 스파르타 왕의 대사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새로운 역사로 기억되고 있다. 이에 따라 페르시아 전쟁의 본질을 페르시아 전제군주에 대항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서구의 투쟁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이라크 전쟁을 비롯한 현대의 전쟁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고대의 전쟁도 단순히 자유와 정의를 위한 전쟁이라고 볼 수 없다. 영화가 보여주는 전쟁에 대한 환상은 현실의 전쟁에 대한 환상으로 이어진다. 페르시아전쟁은 사실상 지중해를 둘러싼 지역패권 전쟁이다.

페르시아인(Persian)은 야만인(Barbarian)인가?

크세르크세스 1세. 사진제공 유달승

이 영화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스파르타 = 그리스 = 서양 = 자유, 페르시아 = 동양 = 야만인 = 노예제도와 압제. 이 영화는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Herodotos)의 ‘역사’를 근거로 삼고 있다. 헤로도토스는 서구세계에서 최초의 역사가이자 최초의 이야기꾼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할리카르나소스(Halicarnassus) 출신이다. 이곳은 오늘날 터키 남서쪽 해안도시인 보드룸(Bodrum)이고 그 시기에는 페르시아제국의 일부였다. 그렇다면 헤로도토스는 그리스계이지만 사실상 페르시아 제국의 백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고국에서 추방된 이후 10여 년간 수차례의 여행을 통해 ‘역사’라는 책을 서술했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이 글은 할리카르나소스 출신 헤로도토스가 제출하는 탐사 보고서이다. 그 목적은 인간의 행적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망각되고 그리스인과 야만인의 위대하고도 놀라운 업적들이 사라지는 것을 막고 무엇보다도 그리스인과 야만인이 서로 전쟁을 하게 된 원인을 밝히는데 있다.” 그는 그리스인과 야만인, 또는 그리스인과 비(非)그리스인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한 목적으로 ‘역사’를 썼다. 그는 페르시아 제국의 백성이었기에 누구보다도 페르시아 문화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인 또는 페르시아 문화를 왜 ‘야만’으로 비하했을까? 오늘날 야만인을 의미하는 단어 ‘Barbarian(야만인)’은 그리스어 바르바로스(Barbaros, Barbarous)에서 기원했으며 이국인, 비(非)그리스인 또는 다른 언어와 관습을 가진 외국인을 뜻한다.

하지만 헤로도토스는 ‘역사’를 통해 페르시아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확산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얼마나 객관적으로 역사를 서술했을까? 그는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사실에 의존하기 보다는 대부분 구비 전설과 소문에 기초하고 있다. 또한 자신의 눈으로 관찰한 사건들도 자의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나는 그곳 주민들에게 듣고 그 전투가 벌어졌던 곳에 갔다가 참으로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그 전투에서 전사한 자들의 뼈가 사방에 흩어져 있었는데, 양군이 처음 싸우기 시작했을 때 서로 떨어져 있었듯 한쪽에는 페르시아인들의 뼈가, 다른 한쪽에는 이집트인들의 뼈가 나뒹굴고 있었다. 페르시아인들의 두개골은 연약해 조약돌을 한 번만 던져도 구멍이 나는 반면, 이집트인들의 두개골은 돌멩이로 내리쳐도 깨지지 않을 정도로 단단했다. 그 곳 주민들이 말해준 이유에 나도 동의했는데, 이집트인들은 어릴 때부터 머리를 깎기 때문에 뼈가 햇빛에 노출되어 점점 더 단단해진다는 것이었다. 같은 이유로 그들은 대머리가 되지 않는다. 세상에 이집트 만큼 대머리가 드문 나라는 없으니 하는 말이다. 그것은 이집트인들의 두개골이 단단한 이유이기도 하고, 페르시아인들의 두개골이 연약한 이유이기도 하다. 페르시아인들은 어려서부터 티아라(tiara: 터번)를 써 햇빛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이쯤 해 두자. 다리우스의 아들 아케메니아조의 페르시아인들이 리비아인 이나로스에게 궤멸된 적이 있는 파프레미스에서도 나는 이와 비슷한 차이를 내 눈으로 본 적이 있다.” (역사 제3권 12)

키루스 대왕. 사진제공 유달승

그는 페르시아인들이 터번을 착용했기 때문에 연약한 두개골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복장은 자연환경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덥고 건조한 사막지역에서는 태양열과 모래바람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하기 위한 복장이 필요하다. 반면에 같은 더운 지역이라 하더라도 아프리카는 습도가 높아서 간단한 복장으로도 가능하다. 그는 자신이 관찰한 사건을 인위적으로 과장해 왜곡된 해석을 시도했다.

“각 부족이 얼마나 많은 인원을 전군에 제공했는지 나는 정확히 말할 수 없다(그것을 기록해 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군만 총 170만 명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인원 점검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행해졌다. 한곳에 1만 명을 되도록 빈틈없이 밀집시킨 다음 그 주위에 원을 그리고는 그 1만 명을 내보내고 배꼽 높이로 담을 쌓는다. 그런 다음 담을 친 공간 안으로 다시 다른 자들을 집어넣은 식으로 전체 인원수를 점검했다. 인원 점검이 끝난 뒤 군대는 부족별로 편성되었다.” (역사 제7권 60)

그는 제3차 페르시아 전쟁에서 페르시아군의 규모를 170만 명으로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이 이 규모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현대 학자들은 페르시아군의 규모를 10만에서 2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페르시아 제국이 당시 그 규모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더라도 고대의 보급체계로는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또한 역사가들은 테르모필라이 전투에 참여한 그리스 도시국가의 병력을 약 7천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그리스 도시국가의 병력은 백에서 천 단위였다. 스파르타군 300명, 아르카디아군 2,120명, 코린트군 400명, 미케네군 80명, 헬로트군 900명, 포키아군 1,000명, 로크리아군 1,000명, 테스피아군 700명, 테베군 400명 등이다.

“5일 뒤 소란이 진정되자 마고스인들에게 반기를 들었던 자들은 사태를 논의하기 위해 모였다. 이 모임에서 연설이 행해졌는데, 그리스인들 중에는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그런 연설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역사 3권 80)

그는 과두제, 민주제 그리고 군주제의 정부 형태와 관련된 그리스의 논쟁에서 페르시아의 정치가 우월하다는 이야기를 소개했다. 하지만 그리스에서는 이 이야기를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단어 ‘Barbarian(바바리안)’은 초기에는 경멸적인 야만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을 구분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헤로도토스가 이 용어를 잘못된 개념으로 확산시킨 최초의 원인 제공자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페르시아 제국의 오해와 진실

키루스 대왕의 원통. 사진제공 유달승

영화 <300>에서는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Ⅰ)를 우스꽝스러운 아프리카 추장, 신하들을 발로 밟는 등 잔혹한 전제군주의 상징으로 그렸다. 헤로도토스는 크세르크세스 1세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이들 수백 수십만 명 가운데 준수한 용모와 헌칠한 키로 크세르크세스와 통수권을 다툴만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역사 제7권 187) 크세르크세스 1세는 유대인 에스더 여왕의 남편이고 구약 성경에서 아하수에로 왕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란에서는 페르시아 제국을 아케메니아 제국(Achaemenian Empire; BC 550-330)이라고 부른다. 페르시아라는 용어의 기원은 이란 남서부 지역의 명칭인 파르스(Pars)에서 시작되었고 고대 그리스인들은 파르스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이 지역은 아케메니아 제국의 발생지였다. 하지만 아케메니아 제국은 인더스강에서 이집트까지 다양한 종족을 통합한 인류 최초의 세계 제국이었다.

아케메니아 제국의 창건자는 키루스 대왕(Cyrus Ⅱ)이었다. 이란에서는 그를 쿠루쉬(Kurush)라고 부르고 쿠르(Kur)는 ‘태양’, 바쉬(vash)는 ‘같은’으로 ‘태양과 같은’ 존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 역사가 크세노폰(Xenophon)은 자신의 저서 ‘키로파이디아’(Cyropaedia)에서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 대왕을 인자하고 이상적인 군주로 언급했고, 페르시아인들은 그를 백성의 아버지로 불렸다고 한다. 키루스 대왕은 기원전 539년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후 ‘키루스의 원통’으로 알려진 세계 최초의 인권선언문을 발표하면서 노예로 잡혀있던 유대인들을 해방시켰다. “나 키루스는 세계의 왕이자 전지전능한 왕이며 바빌론, 수메르 그리고 아카드의 왕이다…나는 수메르와 아카드의 영토를 결코 위협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백성들과 그곳의 모든 신전을 보전할 것이다…나는 마르두크(Marduk)의 뜻으로 이 땅의 왕이 되었으며 그 뜻을 기꺼이 받아들이노라…아후라 마즈다의 뜻으로 공표하니, 내가 살아있는 한 너희의 전통과 종교를 존중할 것이다. 나는 결코 전쟁으로 통치하지 않을 것이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억압해서도 차별해서도 안되며, 이유 없이 남의 재산을 강탈해서도 안되며, 다른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해서도 안되며, 부채 때문에 남자도 여자도 노예로 삼는 일을 금한다…”

구약 성경에서는 키루스 대왕은 ‘고레스 왕’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4장 28절)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은 고레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네 오른 손을 잡고 민족들을 네게 굴복시키고 왕들을 무장해제 시키겠다. 네 앞에 있는 성문을 활짝 열어줘서 성문들이 다시는 닫히지 않게 하겠다.”(45장 1절) 키루스 대왕은 유대인이 아니었지만 유대인의 신앙을 보호해 준것에 대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다리우스 대왕. 사진제공 유달승

키루스는 21세기에도 자주 인용되고 있다. 2003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쉬린 에바디(Shirin Ebadi)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이란인이고 키루스 대왕의 후예이다. 그는 2500년 전 권력의 최정상에 있을 때 백성들이 원하지 않으면 통치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황제였다. 그는 개인의 종교와 신앙을 강압적으로 개종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를 보장했다. 키루스 대왕의 선언은 인권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서 중의 하나이다.”

페르시아 전쟁은 최초의 동서양 문명의 충돌로 묘사되고 있지만, 그 전쟁의 본질은 사실상 지중해를 둘러싼 페르시아 제국과 그리스 도시국가연합의 지역패권 전쟁이다. 그리스와 페르시아 관계에서 커다란 전환점은 다리우스 대왕(Darius Ⅰ)의 스키타이족 원정이었다. 그는 기원전 513년 페르시아 제국의 북부 국경선을 보호하기 위해 스키타이족을 공격했다. 비록 이 원정은 실패했지만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정복하면서 에게해 북부 해역과 다뉴브강 하류를 장악했고 유럽으로 진출하는 중요한 교두보를 확보했다. 이를 통해 흑해 무역 통제권을 차지하게 되면서 그리스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페르시아 전쟁은 이오니아의 반란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기원전 499년 밀레투스의 아리스타고라스(Aristagoras)는 페르시아 제국이 임명한 군주를 축출하고 이오니아 반란을 주도했다. 아리스타고라스의 요청으로 아테네는 배 20척, 에레트리아는 배 5척을 지원했고 페르시아 제국은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면서 시작되었다. 페르시아 전쟁은 기원전 492년에서 기원전 479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서 페르시아 제국과 그리스 도시국가연합 간에 벌어진 전쟁이었다.

역사는 승자를 위한 승자에 의한 기록이다. 승자의 역사는 자유와 정의를 추구하는 가치로 미화되고 있고 전쟁의 원인을 선과 악의 대립으로 단순화시키고 있다. 하지만 역사는 이해관계에 따라 끊임없이 왜곡되기 때문에 단지 흑백 논리만으로 기록되어서는 안 된다. 엄청난 흥행에 성공한 <300>은 영화 차원을 넘어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있다. 오늘날 역사는 영화감독에 의해 새롭게 씌여지고 있다.

유달승 교수는 1998년 이란 테헤란국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9-2000년 하버드대학교 중동연구센터(Center for Middle Eastern Studies)에서 초빙학자로 있었다. 2001-2003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동연구소 연구교수로 일했고 2003년부터 한국외국어대학교 이란어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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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유달승의 중동이야기 ‘아라비안 나이트와 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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