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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메네이, 아흐마디네자드 그리고 라프산자니(왼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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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승의 중동이야기] 호메이니 이후 이란
호메이니 사후에도 미국과 이란의 관계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미국은 9-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였고 이것은 세계의 정치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테러와의 전쟁’은 또 다른 9-11 비극을 탄생시켰다. 이것은 ‘테러와의 전쟁’이 아니라 오히려 ‘테러리스트를 양산시키는 전쟁’으로 나타나고 있다. 조지 W 부시 미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을 ‘이슬람 파시즘과의 전쟁’으로 미화시켰다. 그는 “이슬람파시즘을 파시스트와 나치, 공산주의자의 계승자”라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주목받는 국가가 바로 이란이다. 미국은 이란을 다양한 용어로 규정하고 있다. 깡패국가, 악의 축, 이슬람 파시즘. 반면에 이란도 미국을 거대한 사탄(Great Satan)이라고 부른다.
호메이니의 사망 이후 이란의 권력구도는 갈등과 분열이 더욱 심화되었다. 혁명 초기 호메이니의 지지를 받았던 급진파로부터 보수파와 중도파로 권력 이동이 이루어졌다. 보수파의 상징인 하메네이가 호메이니의 후계자로 임명되었고 1989년 8월 중도파의 라프산자니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호메이니의 사망, 이란-이라크 전쟁의 종식 및 소련의 붕괴는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추진해 온 이슬람좌파 그룹에게 커다란 타격을 안겨 주었다. 그들은 최고지도자, 대법원장 및 국회 대변인을 보수파에게, 내각의 수반을 중도파에게 넘겨주었다. 하지만 1997년 하타미의 대통령 당선과 함께 개혁파로 새롭게 등장하였다.
1989년 호메이니 사후 이란의 정치단체 크게 세 가지 세력으로 분열되었다. 첫 번째는 보수파로 투쟁하는 성직자연합(Jame-e Rouhaniyat-e Mobarez: JRM)이 대표적인 조직이고 콤 종교센터의 교사협의회의 후원을 받고 있다. 보수파는 이슬람우파 그룹에서 출발했고 호메이니의 후계자로 하메네이가 임명되면서 이란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 시기부터 보수파는 이슬람 가치의 수호, 문화적 교조주의 및 외세 배격 등을 주장하였다. 보수파의 지지기반은 보수적인 성직자, 혁명수비대, 민병대 및 상인들이 있고 시장-사원의 동맹관계를 통해서 전통적인 이슬람사회를 주장한다. 보수파의 상징적인 인물은 최고지도자 하메네이이다.
두 번째는 중도파로 이란건설의 활동가들 연합(Kargozaran Sazandegi-ye Iran: G-6)이 주도하는 세력으로 라프산자니 전임 대통령이 상징적인 인물이다. 중도파는 보수파에서 분리해서 나온 세력으로 부분적인 시장경제의 도입과 외국기업의 참여를 강조하면서 온건주의와 실용주의 노선을 주창하고 있다. 중도파의 지지기반은 신흥 중산층, 기업인들, 공무원들 및 지식인들이다. 중도파는 1989년 라프산자니의 대통령 당선 이후 지지 세력이 확산되었지만 독자적인 세력화 구축에 실패해 보수파와 연대했다.
세 번째는 개혁파로 투쟁하는 성직자들 연맹(Majma-e Rouhanione Mobarez: MRM)이 대표적인 조직이다. 개혁파는 이슬람좌파 그룹에서 출발했고 호메이니의 지지를 받았었다. 하지만 호메이니 사후 보수파의 집권과 함께 정국의 주도권을 빼앗겼지만 1997년 하타미의 대통령 당선으로 다시 등장하였다. 이 시기부터 개혁파는 언론의 자유, 문화적 관용주의 및 대외개방을 주장하고 있다. 개혁파의 지지기반은 지식인, 여성, 중소상인, 노동자 및 진보적인 관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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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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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5월 23일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하타미는 대외적으로는 ‘문명 간의 대화’를 바탕으로 이란의 자주성을 존종하는 모든 국가들과 우호관계를 유지하겠다고 주장했고 대내적으로는 자유와 인권이 구현되는 ‘이슬람 시민사회의 부활’을 강조하였다. 하타미의 등장은 이슬람혁명 이후 이란사회의 커다란 변화를 의미하였고 이란국민들은 그를 압도적으로 지지하였다. 2000년 총선에서 하타미의 개혁파가 압도적으로 다수의석을 차지했고 2001년 제8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하타미는 재선되었다. 하지만 이란 젊은이들은 개혁조치의 즉각적인 실시를 주장하면서 거리로 뛰어나와 1997년 7월 9일 테헤란 대학가를 중심으로 대학생들은 ‘자유’와 ‘독재타도’를 주장하면서 시위를 벌였다. 7․9 학생운동은 이슬람혁명 이후 등장한 최초의 반정부 시위였다. 이란 젊은이들은 보수파 뿐만 아니라 개혁파에게도 등을 돌리게 되었다.
2005년 제9대 이란 대통령 선거는 이란의 내부 분열을 가속화시킨 또다른 사건이었다. 아흐마디네자드는 강력한 이슬람사회를 위한 평등주의를 제기하면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이슬람혁명 정신을 사회정의라고 주장하면서 빈곤 타파와 부정부패와의 전쟁을 선언하였다. 아흐마디네자드는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추상적인 구호보다는 빈부격차 해소, 부정부패와의 전쟁이라는 사회문제를 지적하면서 이란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임금 인상, 물가 인하, 부정부패 척결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또한 저소득층 가계자금 확대, 농촌 개발기금, 건강보험 확대 등을 제시했다. 특히 석유와 천연가스로 벌어들인 부를 공평하게 나누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이슬람혁명 이후 지금까지 지속되어온 사회문제는 혁명1세대인 하타미, 라프산자니도 해결하지 못한 것이다. 그의 당선을 통해서 혁명1세대에서 혁명2세대로 세대교체가 나타났다. 비록 그가 보수파의 지지로 당선되었지만 그의 지지기반과 이론적 토대는 보수파와 구별되며 이를 신보수파라고 부를 수 있다. 신보수파의 지지기반은 급진적인 성직자, 군부 및 민병대이다. 신보수파는 이슬람가치를 수호하는 보수파와는 달리 사회정의를 강조하고 있다. 신보수파의 대표적인 조직은 이란 이슬람의 건설자(Abadgara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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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마디네자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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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마디네자드의 핵 주권론은 자신의 통치권을 강화시키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현재 이란사회는 핵문제를 둘러싸고 개혁파와 보수파의 대립, 보수파 내부의 갈등 등 다양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는 핵 문제를 통해서 한편으로는 개혁파를 압박하고 있다. 개혁파의 유화정책이 국제사회에서 이란의 핵문제를 잘못된 방향으로 전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다른 한편으로는 보수파 내부에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키려고 한다. 그는 이슬람혁명 이후 역대 대통령 중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대통령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란은 독특한 정치구조를 가지고 있다. 대통령의 권한은 상대적으로 제한되어 있고 최고지도자는 국가의 최고결정권자이다. 하지만 그는 핵 논쟁을 통해서 기존의 보수파를 견제하고 있다. 이란의 핵 강경책은 이란 정계의 내부를 해결하기 위한 또 다른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핵 문제를 통해서 대내적으로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키고 있다.
국정조정위원회 의장인 라프산자니는 2007년 9월 4일 전문가회의 의장으로 당선되었다. 이것은 2005년 대선에서 패배한 라프산자니의 정계복귀를 의미하는 것이고 향후 이란 정국의 변화를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다. 이번 사건은 신보수파를 견제하기 위한 보수파와 중도파의 연대를 의미한다. 하메네이는 직, 간접적으로는 아흐마디네자드 대통령을 지지했지만 그의 강경노선에 불만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는 메스바헤 야즈디의 행동에 위기 의식을 느끼고 있다. 이것은 이번 선거에서 라프산자니의 진영에 하메네이를 지지하는 보수파 성직자들이 대거 참여한 것이다. 현재 보수파는 신보수파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라프산자니 카드를 활용하고자 한다.
현재 이란에서는 이슬람법학자통치론에 대한 새로운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이 논쟁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 번째 주장과 두 번째 주장은 이슬람법학자통치론을 지지하는 논쟁이지만 세 번째 주장은 이슬람법학자통치론을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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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프산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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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주장은 흔히 ‘이슬람법학자절대통치론(Velayat-e Motlaqe-ye Faqih)’이라고 부르는데, 최고지도자인 하메네이와 그의 지지자들이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최고지도자의 지위는 신의 대리인이어서 국민들의 투표로 선출될 수 없는 신성한 지위라는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주장은 기본적으로 이슬람법학자통치론을 지지하지만 최고지도자를 국민들의 투표로 선출하여 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아야톨라 모르타자 모타하리(Mortaza Motahhari)가 처음 제기하였고 이후 아야톨라 몬타제리(Montazeli)가 발전시켰다.
세 번째 주장은 이슬람법학자통치론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소루쉬(Sorush)라는 학자는 신학과 종교의 차이점을 주장하면서 이슬람 이데올로기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서구의 언론에서는 소루쉬를 ‘이슬람의 루터’라고 부른다. 즉 그의 사상과 이론은 서구의 종교개혁과 같이 이슬람세계의 변화에 커다란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이란은 중동의 자존심이다. 이란은 중동에서 매우 중요한 국가이며 이란인들은 사실상 중동의 역사를 움직인 주역이다. 20세기 이란은 중동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왔다. 1906년 입헌혁명은 중동에서 발생한 최초의 근대화 혁명이었고 중동 전역으로 확대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51년 석유국유화 운동은 석유민족주의 운동을 탄생시킨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또한 1979년 이슬람혁명은 이슬람세계에서 이슬람원리주의 운동을 주류 이론을 부상시킨 전환점이 되었다. 이슬람혁명 30주년을 맞이한 이란은 또 다른 갈림길에 서 있다. 이슬람혁명 이후 폐쇄사회와 통제경제를 비판하는 이란인들의 개혁열망은 점차 증가하고 있고 이를 둘러싼 개혁파와 보수파의 대립 그리고 보수파와 신보수파의 갈등은 확산되고 있다. 앞으로 이란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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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승 교수는 1998년 이란 테헤란국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9-2000년 하버드대학교 중동연구센터(Center for Middle Eastern Studies)에서 초빙학자로 있었다. 2001-2003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동연구소 연구교수로 일했고 2003년부터 한국외국어대학교 이란어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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