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3.02 17:47
수정 : 2009.03.02 18:03
[유달승의 중동이야기] ‘악마의 시’와 호메이니의 파트와
1988년 9월 26일 영국에서 출간된 살만 루시디(Salman Rushdie)의 소설 ‘악마의 시’는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면서 이슬람의 거센 반발이 나타났다. 이 소설은 유럽에서 높은 문학적 평가를 받았지만 이슬람에선 이슬람에 대한 신성모독 행위라고 규정하면서 항의 시위가 이어졌다. 1989년 2월 12일 파키스탄의 이슬라마바드에 있는 미 대사관 앞에서 무슬림들의 대대적인 규탄 시위가 벌어졌고 2월 13일 카슈미르에서는 폭동이 일어나 1명이 사망했고 100여명이 부상당했다.
2월 14일 호메이니는 라디오방송을 통해서 파트와를 발표했다. “전지전능하신 신의 이름으로. 우리는 신 안에 있으며 신께로 돌아갈 것이다. 나는 이슬람, 예언자 그리고 쿠란에 반대하는 악마의 시 작가와 출판자에게 사형선고를 내린다. 나는 모든 열정적인 무슬림들에게 그들을 신속하게 찾아서 집행할 것을 요구한다. 어느 누구도 이슬람의 존엄성을 모욕할 수 없다. 신의 의지에 따라 이 길에서 죽는 자는 순교자로 간주될 것이다. 루홀라 호메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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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만 루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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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명서에서 인용한 쿠란 구절(“우리는 신 안에 있으며 신께로 돌아갈 것이다” 쿠란 제2장 156절)은 일반적으로 슬프거나 큰 불행에서 사용되는 것으로 이번 사태의 심각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월 15일은 ‘애도의 국경일’로 선포되었고 수천명의 시위대들이 거리로 뛰어나와 “영국에게 죽음을”이라는 구호를 외쳤고 영국 대사관에 돌을 던졌다. 2월 16일 금요예배에서 하메네이 대통령은 호메이니의 파트와 이후 격앙된 분위기 속에서 정치적인 타협을 제안했다. “만약 그(루시디)가 진심으로 사죄하고 그 책과의 관계를 부정하면 사람들은 그를 용서할 것이다.” 2월 18일 루시디는 언론에 공표되기 이전에 켄터베리 대주교의 측근을 통해 이란 외무성으로 짧은 성명서를 보냈다. “이 출판물로 인해 신실한 이슬람 추종자들에게 심각한 고통을 끼쳐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수많은 신앙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이번 경험을 통해서 다른 감수성을 인식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루시디의 답변에 대해서 호메이니의 사무실에서는 어떠한 사죄도 사형선고를 기각시킬 수 없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제국주의자 서구 언론들은, 이슬람공화국 공직자들이 ‘악마의 시’ 작가에게 내린 사형선고를 그가 사죄하면 철회한다고 말했다는 거짓 주장을 하고 있다. 이맘 호메이니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것은 100% 인정할 수 없다. 살만 루시디가 사죄해 경건한 사람이 될지라도 모든 무슬림들은 그를 지옥으로 보내기 위해 그의 삶과 부를 추적해야 한다.’ 또한 이맘 호메이니는 다음과 같이 추가로 말씀하였다. ‘만약 비무슬림이 무슬림들보다 더 빨리 루시디의 소재를 찾아서 처단한다면 그 행위에 보답하는 것이 무슬림들의 의무이다.’”
사실 호메이니는 ‘악마의 시’에 대해서 처음에는 커다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악마의 시’는 1988년 8월 복사본이 이란에 도착해 곧 번역되었다. 이어서 이 책의 평론과 발췌본이 이란방송을 통해서 알려졌다. 호메이니의 사무실에는 이 책의 번역본과 반박문이 전달되었고 이에 대한 대책을 요청했다. 호메이니는 그것을 읽고 나서 간략하게 답변했다. “세상에는 항상 터무니없는 미치광이들이 존재한다. 이런 부류에 대해서는 답변할 가치도 없다.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하지만 ‘악마의 시’에 대한 이슬람의 불만과 저항이 점차 고조되기 시작하자 호메이니는 기존의 입장을 바꾸었다. 그는 이번 사건을 통해 전세계 무슬림들의 분노와 좌절을 대변해 이슬람를 하나로 결집시킬 수 있는 계기로 활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또한 8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도 불과하고 결말 없이 끝난 이란-이라크 전쟁 이후 이란 국내의 혼란을 무마하고 자신의 지지 세력을 강화시키는 정치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그는 2월 22일 ‘성직자들의 편지’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성명서를 썼다. 이 편지는 호메이니의 가장 단호한 의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비평가들의 질문에 대해서 자신의 입장을 방어하는 내용이었다. 혁명의 성과가 무엇이냐는 비평가들의 질문에 그는 혁명의 형태와 목적이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답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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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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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보호로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정복당하거나 패배하지 않았다. 우리는 더 높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과 장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외부의 공격을 물리치고 이슬람을 보호하는 우리의 중요한 목표가 좌절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전쟁이든 우리가 치른 대가에 대해서 축복을 가져온다. 전쟁은 우리에게 전제정치의 억압과 침략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전쟁을 통해 세계를 삼켜버리는 기만적인 얼굴의 베일을 벗겼다. 우리는 전쟁을 통해 반드시 우리 자신의 발로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전쟁을 통해 동양과 서양의 강대국의 장벽을 부수었다. 우리는 전쟁을 통해 이슬람혁명의 뿌리를 통합시켰다.”
호메이니는 이란-이라크 전쟁을 비판한 몬타제리에게 순교자들의 친척들과 헌신자들에 대해서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했다. “나는 전쟁에서 희생당한 순교자들을 신이 받아들이시길 기도한다. 우리는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우리는 전쟁에서 수행한 행동에 대해서 단 한순간도 후회하지 않는다. 우리가 종교적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싸운 것을 잊었는가?” 그는 자유주의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성직자들에 대해서 경고했다. “우리는 결코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성직자들의 원칙과 목표에 조화를 이룬 적이 없었던 소위 정치인들의 쓰라린 경험에서 교훈을 얻자. 그렇지 않으면, 과거 자신들의 반역에 대한 악명을 잊고 근거 없는 동정과 순진함을 통해 우리 체제를 중대한 위치로 되돌릴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처음부터 우리와 함께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와 함께 가지 않은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혁명은 어떤 단체의 소유물이 아니다. 우리는 그런 단체들과 자유주의자들에게 가졌던 관대한 신뢰감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고 있다.”
또한 호메이니는 이슬람혁명 이후 망명했던 이란인들의 귀국을 언급했다. 호메이니는 그들의 귀국을 환영했지만 침묵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달았다. “봉사를 위해 고국으로 돌아오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조국의 품은 열려 있다. 하지만 혁명에 대해서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왜 ”미국에게 죽음을“이라고 말했는지, 우리가 왜 전쟁을 했는지, 우리가 왜 무자헤딘 할크와 반혁명분자들에게 신의 명령을 내렸는지, 우리가 왜 비동비서(非東非西)라는 슬로건을 외쳤는지, 우리가 왜 스파이 소굴을 점령했는지, 그리고 수백 가지의 문제들이 왜 발생했는지 당신은 질문해야 한다. 중요한 점은 신의 적이라든가 체제의 반대자와 범죄자의 피상적인 동정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경우라면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적을 이롭게 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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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만 루시디를 보도한 이란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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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이니의 파트와 선언 이후 이란의 종교단체 ‘15 호르다드 재단’(15 Khordad Foundation)은 살만 루시디의 목에 거액의 현상금을 걸었고 살만 루시디는 영국 경찰의 보호 아래 숨어 지내야 했다. 1991년 7월 ‘악마의 시’를 번역한 이탈리아의 에또레 카르리올로가 습격당했고 일본의 이가라시 히토는 살해당했다. 또한 1993년 7월 터키의 아지즈 네신은 투숙한 호텔에서 불이 나 화상을 입었다. 1998년 9월 22일 이란의 개혁파 하타미 대통령은 제53차 유엔총회 연설 이후 “루시디 사건이 완전히 끝났다”고 밝히면서 새로운 전환점이 마련되었다. 9월 24일 카말 하라지 이란 외무장관은 유엔본부에서 로빈 쿡 영국 외무장관과의 회담에서 이란의 종교단체가 루시디 현상금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다고 발표했다.
2007년 6월 16일 영국 버킹엄궁은 문학 분야의 공로로 엘리자베스 2세가 살만 루시디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한다고 발표하자 이슬람세계는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18일 이란 외무부의 모하마드 알리 호세이니 대변인은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미워하는 대상 중 한 사람에게 상을 수여하는 것은 이슬람에 대해 적의를 나타내는 것이자 이슬람 사회에 적대감을 갖겠다는 것"이라면서 영국을 맹렬히 비난했다. 2008년 6월 25일 살만 루시디는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악마의 시’에 대한 호메이니의 반응은, 국제사회에서 표현과 예술의 자유 논쟁으로 확산되었다. 서구세계에서는 ‘악마의 시’를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표현과 예술의 자유를 강조했다. 반면에 이슬람에서는 종교적으로 신성시되는 것을 모독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이 논쟁은 ‘악마의 시’ 사건 이후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2006년 2월 덴마크 신문의 ‘무함마드 만평’ 사태에 이어서 2007년 2월 스웨덴 신문에서 또 다시 ‘무함마드 만평’을 게재하면서 언론의 자유를 주장했고 이에 대해서 전세계 무슬림들의 항의 시위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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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승 교수는 1998년 이란 테헤란국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9-2000년 하버드대학교 중동연구센터(Center for Middle Eastern Studies)에서 초빙학자로 있었다. 2001-2003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동연구소 연구교수로 일했고 2003년부터 한국외국어대학교 이란어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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