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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2.04 13:47 수정 : 2009.02.05 14:57

유달승의 중동이야기 ‘아라비안 나이트와 중동’

[유달승의 중동이야기] 8년 전쟁 끝내고 손잡은 이란-이라크

이란-이라크 전쟁은 1984년에 들어와서 유조선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면서 ‘유조선 전쟁’이 시작되었고 페르시아만은 ‘공포의 바다’로 변했다. 이라크는 1982년 8월 페르시아만 북부해역을 ‘출입 금지 수역’으로 선포하면서 이란의 석유수출과 해외로부터 군수품 도입을 저지하기 위한 해상작전을 실시했다. 1983년 10월 12일 이란은 “만약 이란의 석유수송이 중단된다면 세계 어느 국가도 페르시아만의 석유를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고 경고했고 1984년 3월 13일 이란은 처음으로 쿠웨이트 유조선을 공격했다. 이 시기부터 1987년 3월까지 총 181척 유조선이 공격당했다. 108척은 이라크, 나머지 73척은 이란에 의해 피격되었다. 페르시아만의 위기가 고조되자 1987년 7월 미국은 전함을 파견해 유조선 호송작전을 전개했다. 1987년 10월 10일 미 전함과 이란 군함 사이에 교전이 발생했다. 1988년 7월 3일 미 전함은 이란여객기를 격추시켜 탑승객 298명 전원이 사망했다.

또한 1984년에는 미사일 공습을 통한 ‘도시전쟁’의 형태로 나타났다. 2월 28일 이라크는 처음으로 이란의 수도 테헤란을 대규모 공습했고 3월에는 이란의 주요 도시들로 확산되었다. 이란은 이라크 도시에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반격에 나섰다. 하지만 이라크의 미사일 공격으로 이란 전역은 두려움과 공포심에 휩싸였다. 이 시기부터 이란은 본격적인 미사일 개발사업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이라크 선공에 본격적인 미사일 개발에 착수한 이란

이란 군대

이란의 미사일 개발 배경과 과정은 크게 세 시기로 구분된다. 제1기는 이슬람혁명 이전 시기로 1977년에서 1979년까지이다. 이란의 미사일 개발의 기원은 197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이란의 마지막 왕 모함마드 레자 샤와 관련되어 있다. 1977년 7월 이란의 토파니안(Toufanian) 전쟁성 차관은 이스라엘을 방문해 모셰 다이안 외무장관과 에제르 와이즈만 국방장관을 만나 이란-이스라엘 군사협정을 체결했고 ‘꽃 프로젝트’(Project Flower)를 논의했다. 이 프로젝트는 150-200 km 사정거리에 해당하는 탄도 미사일 개발이었다. 이란은 2억 8천만 달러 상당의 석유를 이스라엘에게 제공했고 시르잔(Sirjan)과 라프산잔(Rafsanjan) 지역에 미사일 시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제2기는 이란-이라크 전쟁( 1980-1989년) 시기이다. 이슬람혁명 이후 이란은 장거리 로켓포와 탄도미사일 개발에 커다란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는 FROG-7A 로켓포를 사용해 이란의 도시를 공격했고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이 시기부터 이란은 탄도미사일 개발에 대한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란은 1980년대 중반부터 러시아, 북한, 중국의 기술지원을 통해 미사일 생산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1983년 이란은 북한과 탄도 미사일 개발 상호지원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고 북한에 탄도 미사일 개발에 필요한 자금과 장비를 공급하게 됐다. 1985년 3월 12일 이란은 스커드-B 미사일로 처음으로 이라크의 키르쿠크를 공격했고 이틀 뒤에는 바그다드를 공격했다. 곧이어 당시 라프산자니 국회의장은 북한과 중국을 방문해 군사원조에 대한 협정을 체결했다. 1987년 이란은 샤하브 미사일 시리즈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1988년 초 이란은 스커드-B 미사일을 개량하여 사정거리 320 km의 샤하브-1 미사일을 개발했다고 선언했다. 1988년 2월29일부터 52일간 이란과 이라크는 인구가 밀집한 상대국 도시에 미사일을 발사해 민간인을 학살하는 ‘도시 전쟁’에 돌입했다.

제3기는 이란-이라크 전쟁 이후 현재까지이다. 이란-이라크 전쟁 이후 이란은 1989년 7월 파키스탄과의 방위 협정을 통해 군사적인 연대를 강화시켰다. 1996년 터키와 이스라엘의 방위협정은 이란에게는 커다란 위협 요인으로 인식되었다. 2003년 이라크 전쟁 이후 이란의 미사일 개발은 더욱 강화되었고 이는 ‘이란 위기론’에 대한 대응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2004년 초 이란은 누르, 나스르, 코사르 등 3종의 신형 미사일을 개발했는데, 사정거리가 170 km 정도로 호르무츠 해협까지 타격할 수 있다. 미국은 이란이 러시아와 북한의 원조를 통해 다양한 형태의 미사일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이란은 잠재적인 위협에 대항한 정당한 권리라고 반박했다. 현재 이란은 샤하브-3b 이외에도 사정거리 1,800 km의 샤하브-3a도 개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란의 중형탄도 미사일은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 및 터키를 공격할 수 있는 것으로 중동의 군사지형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중동에서 미국의 동맹국과 그곳에 배치된 미군에게 직접적인 위협요인이 될 수 있다.

호메이니, 이란여객기 격추 사건으로 휴전 결정

호메이니
1987년 7월 20일 유엔 안보리는 종전 결의안 제598호를 채택했고 이라크는 동 결의안을 수락했지만 이란은 거부했다. 하지만 1988년 4월 이라크는 주요 전투에서 승리했고 이란 국내에서는 정부와 전쟁에 대한 비판여론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바자르간은 분노에 찬 공개서한을 보냈다. “만약 우리가 삶의 제물이 되어야 하고 전쟁에 의해 이슬람을 강요받아 우리의 권리를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다면 당신(호메이니)은 자유로울 수 있소.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삶의 대가는 과연 무엇인가요? 1986년 이후 당신은 승리의 선언을 중단하지 않았고 승리할 때까지 저항하자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패배를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당신은 이라크의 패배를 언급하면서 정권이 붕괴되었다고 주장하지만 당신의 잘못된 정책으로 이라크는 강력해지고 있고 경제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파산 위기로 나아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당신은 피를 흘린 사람들을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우리 순교자들의 피를 언제쯤 멈출 것인가’라고 묻고 싶습니다.” 호메이니의 답변은 5월 28일 제3대 의회 취임식에서 그의 아들 아흐마드의 연설을 통해 나타났다. 그는 한계점과 문제점을 제거해야 한다고 언급하면서 혁명을 저버리는 것보다 더한 죄는 없다고 표명했다. “전쟁의 운명은 전쟁터에서 결정 나지 협상테이블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1988년 7월 3일 미 전함이 이란여객기를 격추시킨 사건이 발생하자 호메이니는 외교적인 해법을 선택하기로 결심했다. 7월 16일 아흐마드 호메이니 그리고 라프산자니는 대통령 집무실에서 호메이니의 제안을 논의했고 결국 그 결정에 동의했다. 7월 18일 작년 유엔 안보리 종전 결의안 제598호를 받아들였다. 호메이니는 휴전 결정에 대한 연설을 발표했다. “그것은 이슬람과 무슬림의 이해에 관한 것이 아니다. 나는 이것을 수락한 적이 없고 죽음과 순교를 선호한다. 그러나 우리는 선택권이 없다. 우리는 신이 우리에게 원하는 무엇인가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나에게 독을 마시는 것보다 더 쓴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전지전능한 신을 위해 독 성배를 마실 것이다.” 호메이니는 독을 마시는 것보다 고통을 생각하는 것이 낫다고 결단했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신이시여! 당신의 의지를 존경합니다.”라고 반복했다. 8년간의 전쟁은 7월 20일 휴전 협정으로 종결되었다.

연설하는 호메이니

석유 생산 문제로 갈등 빚는 이라크와 쿠웨이트

이란-이라크 전쟁 이후 중동정치에서 이라크가 급부상하게 되었다. 서구세계는 사담 후세인에게 불만이 있더라도 안정적인 석유 공급로를 확보하기 위해서 이라크를 지지했다. 또한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보수왕정국가들과 친미국가 이집트도 이슬람원리주의 운동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 이라크를 지원했다. 또한 이라크는 이란-이라크 전쟁 이후 미국의 지원으로 중동의 군사대국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이라크는 8년간의 전쟁동안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에 진 부채와 황폐화된 경제 재건을 둘러싸고 심각한 재정적인 압박에 직면했다. 전쟁 이전 이라크의 외환보유고는 350억 달러에 이르렀지만 전쟁 이후 부채가 800-1000억 달러에 이르렀다.

사담후세인 동상

1990년 2월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은 암만에서 열린 아랍정상회담에서 미국함대가 페르시아만에 계속적으로 주둔하고 있는 것을 비난하면서 미국이 결정하는 원유가격 문제를 비난하였다. 이 연설 직후 18-21달러였던 유가가 갑작스럽게 11달러 수준으로 떨어졌다. 쿠웨이트는 OPEC 생산쿼터의 증대를 요구했고 이 문제가 논의되기도 전에 세계석유시장에 많은 초과생산분을 방출함으로서 격심한 가격인하를 초래하였다. 이로 인해 어려운 경제상황에 처해 있던 이라크는 수십억 달러의 손해를 입었다. 더 나아가 쿠웨이트는 채무변제를 요구했다. 이라크는 쿠웨이트 접경지역의 루마일라 유전의 석유를 쿠웨이트가 부당하게 가져갔다고 주장했다. 5월 28-30일 바그다드에서 개최된 아랍정상회담에서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전쟁은 때로는 군인들을 통해 발생하여 폭파와 살인 및 쿠데타 등의 폐악을 일으키고 때로는 경제적 수단에 의해 발생한다. 미국과 친미왕정국가들의 유가정책은 이라크에 대한 일종의 전쟁이다.” 6월 하순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이 문제의 원만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4자간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레이트 및 쿠웨이트) 정상회담개최를 제의했고 7월 10일 4개국 석유장관들의 회담이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이미 합의한 바 있는 생산쿼터로의 복귀에 동의했으나 회의가 폐막되자마자 쿠웨이트의 석유장관은 오는 10월에 석유생산쿼터 증대요구를 재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7월 12일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연설문을 발표했다. “고의적인 부당함에 고통받는 이라크 국민들은 자신의 권리와 자신을 방어할 충분한 권리가 있다고 믿는 까닭에 ‘생계가 끊어지는 것보다는 목숨이 끊어지는 것이 낫다’라는 격언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며 만일 이 격언이 이라크 국민들을 보호할 그 무엇을 제공할 수 없다면 찬탈당한 권리를 이라크 국민들에게 되돌려줄 단호한 행동이 반드시 취해질 것이다.”

탈냉전과 함께 어제의 적은 오늘의 동지

반미를 상징하는 벽화(미국에게 죽음을).

1990년 8월 2일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합병하면서 시작된 걸프전쟁은 1991년 2월 28일 이라크의 완패로 끝났다. 걸프전쟁은 냉전체제의 해체가 본격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미국과 제3세계 간에 벌어진 전쟁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고 세계정치의 판도를 변화시켰다. 소련과 동구사회주의 국가들의 개혁정책으로 형성된 탈냉전의 분위기 속에서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었다. 전통적인 친미국가 사우디아라비아가 소련과 수교했고 친소국가였던 시리아가 미국의 군사행동에 동조해 군대를 파견했다. 세계정치는 철저히 국익에 따라 이합집산이 나타났다.

1990년 9월 12일 이란의 최고지도자 하메네이는 미국을 비난하면서 “미국의 페르시아만 지역에 대한 침략적이고 탐욕스런 계획과 정책에 대한 투쟁은 지하드이며 이 과정에서 희생자들은 순교자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반미성전’을 선포했다. 또한 이란은 이라크가 원유와 현금을 주는 대가로 식량과 의약품을 공급했다. 이란의 이러한 행동은 8년간의 전쟁을 치룬 이라크에게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더 나아가 10월14일 이란과 이라크간의 외교관계 정상화가 발표되었다.

이란-이라크 관계의 커다란 전환점은 1997년 모함마드 하타미가 이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구체화되었다. 모함마드 하타미 이란 대통령은 양국 간의 전쟁포로 문제를 거론하면서 이라크와의 관계개선을 주장했다. 1998년 1월에는 알 사하프(al-Sahaf) 이라크 외무장관이 이란을 방문하여 대미 관계 공동대응 및 경제협력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1999년 11월 12일에는 바그다드에서 양국간 무역 및 경제협력 합의서에 서명하고 양국 간의 포로교환이 성사되었다. 2000년 9월에는 하타미 이란 대통령과 이라크 부통령의 면담이 있었고 10월에는 카말 하라지 이란 외무장관이 이라크를 방문하여 이라크 민항기의 이란 영공 통과를 허가하였다. 이러한 화해 분위기는 최근 미국이 ‘대테러 전쟁’을 확대시키려는 움직임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면서 보다 더 본격화되었다. 2001년 1월 21일 이란은 이라크전쟁 포로 697명을 석방했고 이라크는 이란인 죄수 50명을 석방하고 시아파 순례객들이 이라크내 시아파 성지를 방문할 수 있도록 국경을 개방했다. 1월 27일 하타미 이란 대통령은 사브리 이라크 외무장관과 만나서 "현안들을 대화와 이해를 통해 미래지향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사담 후세인 순니파 정권이 붕괴되고 시아파 정권이 집권하면서 이란과 이라크 관계는 시아파 연대가 형성되어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2005년 11월 21일 잘랄 탈라바니 이라크 대통령은 이란을 방문했고 2008년 3월 2일 아흐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은 1979년 이슬람혁명 이후 최초로 이라크를 방문하면서 양국 관계의 새로운 역사를 선언했다. 미국의 대테러 전쟁은 이란과 이라크의 관계를 적에서 동지로 바꾸어 놓았다.


유달승 교수는 1998년 이란 테헤란국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9-2000년 하버드대학교 중동연구센터(Center for Middle Eastern Studies)에서 초빙학자로 있었다. 2001-2003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동연구소 연구교수로 일했고 2003년부터 한국외국어대학교 이란어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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