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달승의 중동이야기 ‘아라비안 나이트와 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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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승의 중동이야기] 34. 호메이니, 몬타제리와 결별
1985년 11월 전문가회의에서 호세인 알리 몬타제리(Hossein Ali Montazeri)가 최고지도자 호메이니의 후계자로 선출되었다. 전문가회의는 고위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기구로서 최고지도자를 선출하고 해임할 수 있고 헌법 개정을 심의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각 주에서 인구 50만 명당 1명을 선출하고 임기는 8년이다. 2006년 12월 15일 제4기 전문가회의 선거에서 86명의 성직자들이 선출되었고 2007년 9월 4일 라프산자니는 전문가회의 의장으로 당선되었다. 라프산자니가 전문가회의 의장으로 당선된 것은 2006년 12월 15일 실시된 제4기 전문가회의와 지방의회 선거의 결과를 반영한 것이다. 두 선거에서 아흐마디네자드의 신보수파는 라프산자니의 연합세력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했다. 지방의회 선거에서는 친여 성향의 당선자가 20%에도 미치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테헤란 의회 15석 가운데 중도파와 보수파가 8석, 개혁파가 4석을 차지한 반면 신보수파는 2석만 당선되었다. 전문가회의에서는 아흐마디네자드 대통령의 정신적 지도자인 메스바헤 야즈디가 라프산자니에게 88만표 뒤졌다. 이번 선거로 메스바헤 야즈디의 전략은 커다란 난관에 봉착했다. 그는 차기 최고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신보수파가 전문가회의를 장악하기 위한 정치 행보를 추진해 왔다. 이번 사건은 신보수파를 견제하기 위한 보수파와 중도파의 연대를 의미한다. 하메네이는 직, 간접적으로는 아흐마디네자드 대통령을 지지했지만 그의 강경노선에 불만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는 메스바헤 야즈디의 행동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 이것은 이번 선거에서 라프산자니의 진영에 하메네이를 지지하는 보수파 성직자들이 대거 참여한 것이다. 현재 보수파는 신보수파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라프산자니 카드를 활용하고자 한다. 라프산자니의 재등장은 앞으로 이란의 정계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라프산자니(왼쪽)와 호메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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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타제리는 호메이니가 ‘삶의 열매’라고 언급할 정도로 중요한 최측근이었다. 그가 호메이니의 후계자로 선출될 것이라는 사실에 그 누구도 의심치 않았다. 몬타제리는 1922년 에스파한 부근의 나자파바드(Najafabad)라는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에스파한에서 초기 신학 교육을 받았고 곧바로 콤에 가서 호메이니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1963년 백색혁명을 반대하면서 반샤 운동을 시작했고 호메이니가 추방당한 이후 이란 내 성직자조직을 설립하면서 사실상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그는 1974년 투옥되었다가 1978년 석방되었다. 몬타제리는 이슬람혁명 이후 사실상 2인자였다. 그는 1979년 테헤란 금요예배 지도자가 되었고 그해 가을 제헌 헌법을 심의했던 제1기 전문가회의 의장이었다. 1983년부터 정부 관공서에는 호메이니의 사진 옆에 몬타제리의 사진도 함께 걸어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 무대에서 그의 역할은 매우 미비했다. 그는 단순하고 성실한 종교지도자였다. 하지만 그의 인자하고 부드러운 말투는 정치적으로 위압감을 주지 못했다. 그는 강경한 반미 운동과 세계이슬람운동을 위한 혁명수출을 비롯한 외부 문제에 대해서는 확고한 입장과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내부 문제에 대해서는 유화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특히, 반대파 지도자들에 대한 온건한 입장은 강경파의 커다란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85년 6월 라프산자니는 중국과 일본을 방문했다. 일본 방문에서 라프산자니는 레이건 미 대통령으로부터 레바논의 헤즈볼라에게 억류된 미국인 인질 석방을 도와준 것에 대해서 감사 메시지를 받았다. 이 메시지는 미국과 이란의 관계에서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것은 훗날 이란-콘트라 사건으로 알려졌다. 이란-콘트라 사건은 레이건 정부 시절 미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미국인 인질을 석방시킬 목적으로 이란에 비밀리에 무기를 판매하고 판매대금 일부를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에 제공한 것이다. 이란은 이라크와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서 무기가 필요했지만 미국과 이란의 무역은 금지되어 있었다. 이 복잡하게 얽힌 교섭 문제는 이스라엘이 중간 무역을 담당했다. 미국은 1985년 9월과 1986년 2월 이스라엘을 경유해 이란에 무기를 판매했다. 1986년 5월 로버트 맥팔레인 국가안보 보좌관은 비밀리에 테헤란을 방문했지만 그의 방문 소식은 곧바로 알려졌다. 일부 급진파는 이 사건을 비난하면서 서구, 특히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대해서 경고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급진적인 성직자 메흐디 하쉐미(Mehdi Hashemi)이다. 그는 몬타제리의 사위 하디 하쉐미(Hadi Hashemi)의 형이자 세계이슬람해방운동을 위한 혁명수비대의 대표였다. 이 기구는 이슬람혁명 수출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하쉐미와 추종자들은 몬타제리의 권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보수적인 성직자들을 비판하면서 급진적인 신학 센터를 추진했다. 1986년 10월 12일 하쉐미를 비롯한 40명의 측근들은 반역죄와 파괴 행위 뿐만 아니라 이슬람혁명 이전에 발생한 정치적 살해 혐의로 체포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직접적인 체포 배경은 미국과의 비밀 거래를 반대한 것이었다. 로버트 맥팔레인의 테헤란 방문은 11월 3일 레바논의 일간지 알 쉬라(al-Shiraa)에 보도되었다. 1987년 9월 27일 메흐디 하쉐미는 사형당했다.
1987년 11월 몬타제리는 호메이니의 정당 해체를 반대하면서 정당의 합법화를 주장했다. 그는 전쟁 중이라도 이슬람정부가 열린 사회로 나아가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대중 참여가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몬타제리의 발언에 대해서 호메이니는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무자헤딘 할크는 이라크에서 이슬람공화국을 전복시키기 위해 군사조직을 창설했고 이란-이라크 전쟁 중 이라크 군대와 함께 이란을 공격했다. 1988년 무자헤딘 할크는 이란 영토의 80 마일까지 진격하면서 국경선 부근의 일부 마을을 점령했다. 호메이니는 이란 국민들에게 이슬람의 영토를 수호하자고 주장했고 무자헤딘 할크의 행위를 비난했다. 무자헤딘의 침공은 곧 진압되었지만 수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했다. 이 사건 이후 이란에서는 무자헤딘 할크에 대한 비난 여론이 형성되었다. 1988년 늦여름과 초가을 사이에 이란 정부는 수감 중인 무자헤딘 할크 조직원과 정치범에 대한 대량 학살을 자행했다. 몬타제리는 이러한 행위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편지를 호메이니에게 보냈다. 또한 1989년 초 몬타제리는 케이한에 다음과 같은 비평을 실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우리의 가치를 유지하기 보다는 더 많은 슬로건을 만들어냈다. 이 과정에서 희망이 사라지고 고립되고 말았다. 마침내 우리는 슬로건을 부정하게 되었고 모든 원칙을 잊도록 강요당하는 시점에 서있다. 나는 우리가 약속했던 것과 우리가 성취해야 하는 것 사이에 커다란 거리가 존재한다고 인정한다. 재건하기 이전에는 우선 행정과 그 특성에 대한 국가의 재건이 이루어져야 하고 국가의 경영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재건이 되어야 한다. 국민들이 지도자에게 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알리 몬타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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